20년 이상 민간인 학살 공론화 나서…“하미마을 비문 삭제는 정신까지 말살하는 행위”
구수정 한베평화재단 이사. 사진=한베평화재단 제공
2016년 추진위가 결성돼 2017년 설립된 한베평화재단에서도 구 이사는 다양한 일을 맡아 활동하고 있다. 10월 4일 구 이사를 옥수동 한베평화재단 사무실에서 만나 이야기를 나눴다. 구 이사는 베트남 꽝남성 하미마을 위령비를 둘러싼 비문 논란을 두고 “당시 하미마을 주민들은 학살을 하고 다시 시신을 불도저로 민 게 2차 학살이라면, 비문을 삭제하는 건 정신까지 말살하는 3차 학살이다”라고 울분을 토로했다.
이어 구 이사는 “참전군인들도 국가에 의해 동원돼 베트남에 갔던 피해자라 보고 있다”며 “시민평화법정 때 피고석에 참전군인이 아닌 대한민국 정부를 세웠던 것도 그 때문이다. 당연히 참전군인들의 고통도 우리 사회가 감싸안아야 한다고 생각하고, 그분들과 첨예하게 갈등하거나 대립하는 것을 원치 않는다”고 덧붙였다. 다음은 일문일답.
―한베평화재단에서는 어떤 일을 하고 있나.
“베트남에서는 한국군에 의해 일어난 민간인 학살 문제를 해결하려고 노력하고 있다. 노력의 일환으로 베트남 피해자 지원사업을 하고 있고 학살이 일어난 날짜에 위령제를 지내는데 조화도 보내고 위령비 개보수 사업도 하고 장학사업도 하고 있다. 한국에서는 평화기행(베트남전쟁 피해지역 현장 답사, 피해자와의 만남 등으로 이뤄진 여행)이라는 사업을 하고 있다. 또한 사무실 한쪽에 아카데미 룸을 만들고 인문학 강좌나 평화교육 사업도 하고 있다.”
―한국 군인들의 학살 문제에 언제부터 관심을 갖게 됐나.
“베트남에서 석사, 박사 과정을 밟게 됐는데 석사 논문 과제가 ‘한국군의 베트남전 개입연구’였다. 이 주제로 논문을 준비하다 보니 한국에서 연구하신 분들 대부분은 한국자료나 미국자료로 연구했다. 나는 베트남에서 유학하고 있어 베트남 자료를 수집해서 보다 객관적으로 베트남 전쟁을 들여다보고 싶었다. 대략 1997년 자료를 찾는 과정에서 베트남 외무부 산하에 있는 국립문서보관소에서 소장한 한국군에 의한 민간인 학살에 대한 보고서를 접하게 됐다. 한국 군인들의 학살을 전혀 모르고 있다 그 내용을 문서로 만나게 된 셈이다. 문서에 너무 충격을 받아서 확인해볼 엄두도 못내고 있었다.”
―검증은 어떻게 시작하게 됐나.
“일본의 ‘피스보트’(세계를 여행하는 크루즈 배인 피스보트 위에서 다양한 프로그램을 진행하는 국제 비영리단체로 도쿄에 본부가 있다)를 탔던 한국 사람들이 일본 사람들 손에 이끌려 학살 현장과 위령비를 봤고 일본 사람들이 ‘너희는 우리보고 항상 역사를 모른다고 하는데 너희들도 너희의 베트남에서 과거를 전혀 모르지 않냐’고 말해 충격을 받았다고 했다. 마침 나도 자료가 있고 베트남어도 할 수 있으니 실제로 검증을 해보자는 마음으로 시작했다. 1999년 봄에 학살 지역을 돌아다녔고 한국군 증오비도, 위령비도 만났다. 한국군에게 피해를 받았다는 피해자도 만나게 됐다. 그 내용을 ‘한겨레’에 르포 기사로 쓰게 됐다.”
―김문구 월남참전전우복지회 이사장은 ‘위령비를 세운 건 자신인데 여행 코스에 넣고 사진을 쓰는 등 왜 허락도 없이 상업적으로 이용하냐’고 지적하고 있다.
“위령비는 김문구 이사장이 세운 1개가 아니다. 시민단체가 세운 것도 있고, 베트남 정부가 세운 것도 있다. 김대중 정부 때는 한국군 학살이 있던 지역에 40여 개 학교를 지었고 병원도 지었다. 우리 정부가 지었다고 해서 한국 소유 학교나, 병원이 아니라 베트남에 지어진 거고 베트남 지역 주민들의 것이다. 마찬가지로 누가 지었다고 해서 위령비는 그 사람의 소유가 아니다. 그래서 ‘이용한다’는 게 무슨 이야긴지 이해할 수 없다. 또한 김 이사장이 짓고 나서 논란이 있자 이곳을 찾지 않았다. 처음 갔을 때는 태극기도 꽂혀 있었지만 비문 논란이 벌어지자 마을 사람들도 상처받고 10년 이상 방치해 문도 떨어지고 담도 무너져 있었다. 2013년 45주기 위령제를 지낼 때 위령비 개보수 작업을 해야 했다. 올해 초 50주기 위령제 때도 위령비 개보수 작업을 지원한 바 있다.”
―김 이사장은 하미 학살은 ‘어떤 국가 부대가 했는지 모른다’고 주장하고 있다.
“하미마을은 청룡부대 주둔지였다. 2018년 4월 비록 모의법정이지만 김영란 전 대법관이 ‘시민평화법정’의 재판장을 맡고 변호사가 증거도 조사하고 현장답사를 통해 진상규명에 힘쓴 바 있다. 시민평화법정에서 법률적인 검토를 꼼꼼히 한 끝에 한국정부의 책임이 있다고 판단한 바 있다.”
―하미 마을에서 협상과 달리 학살 문구가 갑자기 새겨졌다는 주장도 하고 있는데.
“2000년도 위령비를 짓기 전 기사를 보면 김 이사장은 ‘국가 명에 의해서 전쟁을 했을망정 많은 민간인들이 죽은 것은 어쨌거나 잘못된 것이다. 나는 이 일의 마무리가 후손대까지 내려가선 안 된다고 생각한다’는 말을 했다(김 이사장은 자신은 이 같은 말을 한 바 없다고 주장하고 있다). 또한 베트남은 기본적으로 공문이 오가며 일을 해야 한다. 위령비 개보수를 하더라도 베트남에 승인을 받아 진행한다. 그 협상 과정에 내가 없었기 때문에 구두가 아닌 공문과 같은 절차를 밟아 꼼꼼히 이루어졌는지에 대해서는 알지 못한다. 공문이나 계약 없이 구두로 협상을 했다는 게 말이 안된다.”
―김 이사장은 이곳 간부들이 요구해 한국으로 관광시켜줬다고 하는데.
“이곳은 한국으로 치면 면 단위다. 면 단위 공무원을 관광시켜주는 일을 왜 하겠나. 한편으로는 압력도 넣고 한편으로는 회유도 하면서 비문을 닫았다고 볼 수 있다.”
―어떻게 해결되는 게 바람직하다고 보나.
“압력이 있어도 지우지 않고 대리석으로만 덮어둬서 떼어내면 바로 비문이 있다. 이분들은 45주기, 50주기마다 대리석에 갇힌 비문을 액자로 만들어 선물로 준다. 얼마나 대리석으로 덮인 진실을 열고 싶으면 선물로 주겠나. 박정희 정권은 참전을 결정했고, 전두환, 노태우 전 대통령은 참전한 사람들이다. 50년이 지나도록 돌아볼 수 없었고 성찰할 수 없었다. 참전세대가 용서를 구할 수 없다면 그 이후 세대라도 전쟁 범죄나 민간인 피해가 광범위하게 있었던 만큼 사과하고 과거사를 해결하고 나아가야 한다고 생각한다.”
김태현 기자 toyo@ilyo.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