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이정화 과장을 만난 것은-정확히 말해 그녀와 같이 일을 하게 된 것은-신입사원 연수를 받고 첫 발령을 받은 때부터였다. 나는 여대 출신의 입사동기생 하나와 함께 상품기획실이란 곳에 배치되었다. 흔치 않은 경우였으나 그녀는 그곳에 있던 세 사람의 과장 중에서 유일한 여자 과장이었다. 실장은 이사급이었고, 그 아래 총 스무 명 남짓한 인원이 모여 있었다.
여자 동기는 남자 과장의 팀으로 갔다. 그래서 이정화 과장, 그녀 밑으로 들어간 수습사원은 나 혼자였다. 나중에 알고 보니 썩 잘 풀린 경우는 아니었다. 그녀는 3개월 전 과장 진급과 동시에 상품기획실 소속이 되었다고 했다. 말하자면 나처럼 그녀도 신입이었다.회사생활을 시작한 초년병들이 다들 그렇듯 처음 몇 달 동안 나는 정신을 차리지 못했다. 아무리 마음먹고 입사를 준비했어도 학교와 사회생활은 천지 차이기 마련이었다. 더구나 유수의 대기업이라 불리는 회사이기에 그런 사정은 한층 더했다. 일 년 넘게 지난 지금에야 익숙해졌으니망정이지 얼마간은 스트레스가 쌓여 위장병까지 얻을 지경이었다.
통신회사의 상품기획이란 꽤 분주했다. 우리가 하는 일은 온갖 캠페인이며 새로운 판매 전략을 짜내는 것이었다. 그리고 팀별로 맡은 그런 기획안들을 일정 주기마다 경영진에게 보고하고 결재를 따내 유통시켰다. 만약 흔한 연애소설이라면 이정화 과장과 나 사이에는 그 시기부터 무슨 사건이 벌어졌을지도 모른다.
뭣도 모른 채 열심인 신입사원과 그를 다독여 주는 다정한 여자 상사-동고동락 속에 싹트는 로맨스란 제법 근사하지 않은가?하지만 유감스럽게도 그녀는 전혀 그렇지 않았다. 뭐랄까 한두 달 정도는 나를 거들떠보지도 않는 것 같았다. 하기야 그럴 만도 했다. 내 위로는 남자 대리가 둘이나 있었고 나는 거의 매일을 그들이 던져 준 일감과 부대껴야 했다. 나란 놈은 그저 책상 두 개 건너 맞은편에 앉아 있는 부하직원일 뿐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었다.
내가 그녀에게 호기심을 가진 이유는 단 한 가지, 외모 때문이었다. 과장이란 거창한 능력에도 불구하고 그녀는 사장실의 여비서들만큼이나 묘하게 눈길을 끌었다. 그녀가 책상 사이를 지날 때면 남자직원들은 슬그머니 하던 일을 멈추고 그녀의 뒷모습을 흘끔거렸다. 작지 않은 키에 언제나 타이트한 치마정장에 감싸인 이정화 과장의 몸매는 도수 높은 안경과 어울리지 않게 상당히 육감적이었다. 물론 그것은 항상 눈요기로만 그쳤다. 바로 그 안경 탓에 그녀는 쉽게 접근하기 힘든 차가운 인상을 지니고 있었다.
<회식>
“K대…. 그러고 보니 K대였군.”이정화 과장, 그녀가 말했다.입사 후 한두 달쯤 지난 그날은 회식이 있었다. 회식이라고 해 봤자 같은 팀 일곱 명이 전부였지만 여자 과장이 있는 우리 쪽으로서는 비교적 드문 일이었다.
우리는 회사 앞 일식집의 한 구석에 앉아 있었다. 매실주가 한 순배 돌았을 무렵 우연히 서로의 학벌이 화제에 올랐다. 내 옆의 남자 대리들-편의상 A와 B대리로 부른다-중 한 명이 그녀의 말에 맞장구를 쳤다.
“맞아요. 과장님도 K대 출신이시죠?”나는 내심 놀랐다. 그녀는 조용히 입꼬리를 말아올렸다.“꼭 그런 건 아니에요. 일 년만 다니고 일본으로 건너갔으니까.”그랬다. 내가 알기로도 이정화 과장은 일본 유학파였다. 그것은 인사 카드에서도 보지 못했던 처음 듣는 이야기였다.A대리가 내 어깨를 쳤다. “어쨌거나 이 친구가 후배네요, 뭐.”“그런가요? 학번이…?”그녀가 물었다. 나는 머쓱하게 학번을 댔다. “그럼 4년 차이로군요.”“후후, 과장님이 까마득한 선배신데요? 학교에서는 서로 얼굴도 못봤겠는걸요?”누군가가 너스레를 떨었다. 고로 그녀는 꽉 찬 서른 살이었다. 30, 그 숫자를 상기하자 묘한 기분이 들었다. 잘해야 한두 살가량 많아 보였던 그녀의 얼굴이 새삼 다르게 느껴졌다.
선후배 관계라는 말에 그녀가 미소를 지었다. 나도 어색하게 마주 웃었다. 아마도 사석에서 나를 향해 웃어 준 것은 처음일 성싶었다. “한 잔 받아요.”그녀는 나에게 잔을 내밀었다. 그 역시 처음 받는 술잔이었다. “야아…. 벌써 후배 챙겨 주시는 건가요, 과장님?”B대리가 시샘하는 양 한 번 더 농을 던졌다.
우리는 그날 저녁 2차까지 술자리를 치렀다. 이정화 과장은 끝까지 자리를 지켰다. 학교 때문은 아니었으나 나는 다음날부터 그녀와의 사이가 조금씩 가깝게 여겨지기 시작했다. 회사 안에서 그녀의 미소를 볼 기회도 차츰 늘어 갔다.
▲ 그림 최경태 | ||
<여자들>
슬슬 주변을 곁눈질할 여유가 생긴 건 그 즈음이었다. 당시는 현주를 알지도 못한 시절이었으므로 나에게는 애인은커녕 여자친구 비슷한 존재도 없었다. 하여 내 눈에 제일 먼저 들어온 인물들은 회사 안의 여직원들이었다.
상품기획실 전체에는 총 다섯 명의 여자가 있었다. 우선 함께 입사한 동기에게는 아예 시선조차 주지 않았다. 여대를 나와 극성스럽게 치장할 줄은 알았어도 외모가 영 수준 이하인 까닭이었다. 그리고 보기에는 조금 나았지만 각각 2년차와 3년차의 유부녀가 두 사람 있었다. 그들도 쳐다볼 필요가 없기는 매한가지였다.
그 외에 그런대로 관심을 가질 만한 여직원은 미스 박이 있었다. 그녀는 남자 과장의 팀원이었는데, 일반 업무를 보는 동시에 실장의 비서 노릇도 겸하고 있는 아가씨였다. 그녀의 외모는 퍽 준수했다. 늘씬한 몸매에 탤런트를 연상시키는 얼굴은 부서 내에서 소위 퀸카로 통했다. 다섯 중 마지막은 이정화 과장이었다. 하지만 그녀는 애초부터 논외였다. 어차피 연상이었고, 아무리 궁해도 직장상사가 여자로 보일 리는 만무였다. 나는 학창시절의 신영 선배 이후로-첫경험의 그녀도 실제로는 동갑이었으니까-연상을 사귀어 본 적이 없었다. 아니 별반 상상도 한 적이 없었다.
내가 호감을 지닌 쪽은 당연히 미스 박이었다. 1년 입사 선배이기는 했으나 그녀는 오히려 나이상으로는 나보다 한 살이 어렸다. 성격도 꽤 애교 있는 타입이어서 여우스럽게 샐쭉이는 미소는 남자들에게 인기가 좋았다. 그녀의 미니스커트 아래로 쭉 뻗은 다리는 이따금씩 내 눈길을 어지럽혔다. 나는 그 각선미로 인해 몇 번쯤 그녀와 데이트를 시도했다. 철저히 남의 이목을 피한 접근임에도 불구하고 미스 박은 의외로 순순히 응했다. 우리는 두어 차례 저녁도 먹었고 한 번은 영화관에 가기도 했었다.
그러나 그녀에게서는 확답이 돌아오지 않았다. 좀 더 적극적인 태도, 이를테면 정식으로 사귈 것을 주문할 때마다 그녀는 번번이 예의 천연덕스러운 표정으로 대꾸를 피했다. 어쩐지 나 정도로는 성에 차지 않는다는 듯한 반응이었다. 단순히 그녀가 망설일 뿐이라고 추측한 나는 잠자코 기다렸다. 굳이 말하자면 사귀는 것도 아니고 평범한 사이도 아닌, 그런 어정쩡한 관계가 한동안 지속되었다. 나는 그런 사실을 아무도 모르리라 생각했다. 적어도 겉으로는 티가 나지 않도록 행동했다.
<이혼녀>
직장생활을 하는 남자들의 술자리에는 대부분 세 종류의 안주가 오른다. 첫째는 진짜 안주거리, 둘째는 상사나 동료에 대한 험담, 그리고 마지막으로 음담패설이 그것이다.그날도 그랬다. 바야흐로 그녀의 비밀 아닌 비밀을 알게 된 그날도.내가 조금씩 부서에 적응해 가자 회사 선배들은 슬슬 나를 자기들의 술자리에 끼어 주기 시작했다. 여자라 그런지 몰라도 이정화 과장은 대부분 그런 모임에 참석하지 않았다. 특히 비슷한 또래의 남자직원들과는 좀처럼 어울리지 않는 것 같았다.
사건은 단골 고깃집에서 벌어졌다. 우리는 퇴근 후 남자들끼리만 소주잔을 기울이고 있었다. “최 대리가 요새 심심한가 봐.”자신이야말로 심심했는지 그때 A대리가 불쑥 이야기를 꺼냈다. 최 대리는 다른 팀 소속의 유부녀 여직원 가운데 한 사람이었다.“왜?”“그집 맞벌이하잖아. 근데 남편이 두 달째 해외 출장중이래.”“그래? 그 아줌마 또 궁둥이 꽤나 흔들어대겠구만.”“글쎄 말이야. 하지만 나는 별로야. 작년에 애 낳고 나더니 아직 서른도 안됐는데 히프가 너무 펑퍼짐해졌거든.”“흐흐흐, 꼭 벗겨 봤던 사람처럼 말하네?”
“사실 그럴 뻔한 적도 있었어. 지난 번 전체 회식 때 있지? 그때 3차로 갔던 단란주점에서 그 여자 아주 맛이 갔었어. 나랑 블루스 추다가 자기가 먼저 사타구니를 비비적거리더라구. 슬쩍 만졌더니 엉덩이가 뜨끈뜨끈하던 게 마음만 먹었으면 여관까지 데려갔을 거야.”
그는 정말로 아쉬운 양 침을 튀겼다. 둘째와 셋째 안주거리가 적절히 섞이고 있었다. 아무 말없이 웃으면서도 나는 은근히 귀가 기울여지는 것을 어쩌지 못했다. 상대편 B대리가 입맛을 다시며 물었다.“그런 푹신푹신한 게 뒤로 할 때는 더 죽여 주지 않나? 근데 그날은 어째서 못갔어?”
“말 마. 이정화 그 여자 때문이잖아. 어떻게 눈치챘는지 그년이 나서서 집에 보내 버렸어. 잘만 됐으면 최 대리 엉덩이를 실컷 구경했을 텐데.”그년-순간 나는 멋쩍어졌다. 이정화 과장이 그렇게 불린 적은 드물었다. 취중이라고 해도 표현이 지나쳤다. 그러나 직후에 흘러나온 내용에 비하면 그 정도는 약과에 불과했다. 능글맞은 키들거림이 한 차례 가시자 한층 기이한 이야기가 들려 왔다.
“그래도 히프로 치면 이정화 과장이 제일 탱탱하지.” “맞아, 그 오리궁둥이. 그 계집애도 남자 거시기 맛본 지 오래됐을걸.”“누가 아니래? 벌써 반 년이나 지났잖아. 혼자 잠자는 것도 이제는 지겨울 거야.”그들은 신바람을 내고 있었다. 남자 구경한 지 오래, 게다가 혼자 잔다…. 나는 무슨 의미인지 알아들을 수 없었다.
“대리님, 실례지만 그게 무슨 얘기죠?”호기심을 참지 못한 내가 질문을 던졌다. 그러자 A와 B대리는 잠시 서로를 멀뚱히 쳐다보았다.“어…, 자네 몰랐어?”“모르다뇨? 뭘요?”“자네 아직 그 얘기 못 들었구만. 사실 이거 일급 기밀인데…. 뭐 아는 사람은 다 아는 비밀이지만. 이정화 과장, 그 여자 반 년 전에 이혼했어. 이혼녀라구.”그녀가 이혼녀? 나는 멍청해진 눈만 껌벅였다. 말 그대로 전혀 모르고 있던 사실이었다.
<다음호에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