캠퍼스 투어는 11월 28일 오전 10시쯤부터 교내 탐방과 전공 소개 강의로 약 2시간 가량 이어졌다. A 중학교 학생 40명과 인솔 교사, 그리고 숙명여대 측 자원봉사자 4명은 제1캠퍼스의 순헌광장에서 단체사진을 찍은 뒤 대자보가 있는 명신관으로 이동했다. 이어 제2캠퍼스에 위치한 중앙도서관과 백주년기념관을 둘러보고 오전 11시쯤 돌아와 명신관에서 강의를 진행한 것으로 알려졌다. 숙명여대 학생 양 아무개 씨(21)는 “학교를 방문한 학생 40명 중 24명이 남학생이었다. 입학도 못하는 여대에 왜 남학생들이 진학탐방을 온 건지 이해할 수 없다”고 말했다.
사건은 오전 10시 30분쯤 명신관 앞 대자보 게시판에서 일어났다. 투어에 참가한 몇몇 남학생들은 게시판에 붙은 페미니즘 대자보를 지나치지 못했다. 이들은 10월 31일 있었던 ‘가슴해방의 날’ 행사를 독려하기 위해 학내 인권동아리 ‘가치’가 게재한 ‘탈브라 꿀팁나누기’ 대자보에 이들을 조롱하는 글을 남겼다.
트위터 캡처
훼손된 게시글은 숙명여대 재학생들이면 누구나 자유롭게 자신의 의견을 적을 수 있는 ‘참여형 대자보’였다. 실제로 대자보 한 쪽에는 파란색 펜이 두 자루 구비되어 있었다. 남학생들은 준비된 펜으로 ‘사람들도 제 가슴에 크게 관심이 없어요. 관심갖는 사람은 가랑이를 쭈차삐세요‘와 같은 문구 아래에 ’응 A(가슴사이즈 추정)‘, ’지X‘ 등의 욕설을 적었다.
숙명여대 자원봉사자 측은 28일 올린 공식입장문에서 “대자보 앞에 교사 3명이나 있었다. 남학생들의 행동을 교사가 우리보다 먼저 알아챘지만 방관했다”고 주장했다. 또한 “남학생들에게 직접적으로 성적 모멸감을 느낄만한 말들을 들었음에도 아무도 제재해주지 않았다”고 호소했다.
재학생 양 씨도 “수업시간 내내 학교 밖이 시끄러웠다. 남학생들이 큰소리로 웃으며 낙서 하고 있더라. 자원봉사자들은 당황한 기색이었다”고 목격담을 전했다.
대자보 훼손 사실이 교내에 퍼지자 관련자들은 즉각 면담을 진행했다. 숙명여대 대외협력본부 커뮤니케이션팀과 자원봉사자, A 중학교 인솔교사들 투어가 끝난 12시쯤 만나 상황을 파악하고 대책 회의를 열었다고 밝혔다.
숙명여대 학생들은 인솔교사들이 해당 사건을 가볍게 받아들이고 있다는 입장이다. 자원봉사자 측에서 남학생들의 자필 사과문과 성평등 교육 이수 등을 요구하자 ‘아이들이 뭘 알겠냐’. ‘그 또래 남학생들은 제대로 사과문을 작성할 능력도 없다’, ‘밥이나 먹으러 가자’ 등 사안의 심각성을 인지하지 못하는 발언을 했다는 것.
교사들의 언행을 문제 삼기도 했다. 자원봉사자 측은 “투어를 시작하고 나서 인솔교사들이 ‘남학생들이 많이 왔는데 예쁜 누나를 보러 왔다’고 말했다. 또 우리가 외부인의 출입을 계속 걱정하자 ‘너무 예민하다’며 언성을 높이고 질책하기도 했다”고 밝혔다.
A 중학교 부장교사는 ‘일요신문’과의 통화에서 “인솔교사들과 숙명여대 자원봉사자들의 입장이 조금 다르다. 교사들이 대자보 훼손을 방조하거나 묵인한 것은 절대 아니다“라면서도 인솔교사들의 발언 내용에 대해서는 ”아직까지 확인하지 못했다”고 말했다.
숙명여대는 본교 홈페이지를 통해 교내 투어 신청을 받고 있다. 투어 담당자는 학교 홍보대사인 앰배서더다. 그러나 이날 진행된 캠퍼스 투어는 개인자격으로 진행된 행사였다. 학교를 찾은 40명의 학생들은 구로구 구로진로직업체험지원센터의 ‘중학생대상 캠퍼스 투어 및 진로강연 봉사활동’ 신청자들이었다. 투어 담당자도 앰배서더가 아닌 일반 재학생이었다.
이렇다보니 자원봉사자들의 준비성이 부족했다는 지적도 나오고 있다. 자원봉사자들은 투어를 준비하는 과정에서 관련 부서에 자세히 알리지 않고 진행한 점과 시설관리팀을 통해 강의실을 대여하지 않고 사용한 점에 대해 사과문을 올렸다.
한편 대자보 훼손을 페미니즘에 대한 공격으로 받아들이는 여론도 적지 않다. 인권동아리 ‘가치’의 관계자는 “이 대자보는 여성들이 브래지어를 착용할 것을 강요당하면서 건강상의 문제와 사회적 억압에 시달리고 있음을 알리고, 브래지어를 벗고도 생활할 수 있는 용기를 나누기 위한 취지로 만든 것이다. 이는 엄연한 백래시”라고 주장했다.
A 중학교 부장교사는 “해당 학생의 학부모와는 면담을 마쳤지만 드릴 말씀이 없다”고 말했다. 그러면서 “이와 별개로 숙명여대 학생회 측에 공문을 보내 사과와 함께 재발방지를 약속 하겠다”고 밝혔다.
A 중학교 학생들이 훼손한 숙명여대 ‘탈브라 꿀팁’ 대자보. 사진=최희주 기자
사건 발생 다음날인 29일 오후 2시쯤 숙명여대를 찾았다. 해당 대자보를 게재한 ‘가치’의 부원 3명이 새로운 대자보를 붙이고 있었다. 동아리 관계자는 “일주일 뒤인 오는 12월 5일까지 A 학교에서 대책을 마련하지 않는다면 대외적으로 공론화를 진행할 계획”이라고 말했다.
전날 남학생들이 남기고 간 흔적은 찾아볼 수 없었다. ‘응, A(컵)’은 ‘응 A는 내 성적이다’등으로 바뀌어있었다. 동아리 관계자는 “누군가 낙서를 다른 내용의 문구로 바꿔놓은 것 같다”고 했다.
최희주 기자 hjoo@ilyo,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