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직접 가수 할 때보다 제작할 때 더 희열 느껴”
1992년 데뷔한 잼(ZAM)은 선풍적인 인기를 끌다 곧바로 해체했다.
―잼이 정말 큰 인기를 얻었다. 당시는 어땠나.
“포지션은 뒤에서 안무를 맡는 거였다. 노래는 못하는 편이다. 랩을 열심히 해보려고 했는데 잘하진 못했다. 잼은 데뷔하자마자 1등도 했다. 데뷔 5개월 만에 콘서트를 했는데 지금까지 이런 경우가 없다고 한다. 7월 17일 콘서트가 잊히지 않는다. 너무 행복했다. 헬리콥터 타고 다닐 정도로 바빴다. 잠실 선착장에서 노래 부르고 헬기 타고 공항 가서 제주도 갔다 와서 또 헬기 타고 대전 가는 식의 스케줄을 소화했다.”
―히트곡 제목과 달리 곧바로 멈춰버렸다. 무슨 일이 있었나.
“DSP 소속으로 활동은 열심히 하는데 통장에 500만 원 남아있었다. 당시에는 기획사와 그런 문제가 많았던 것 같다. 이 문제로 회사와 갈등이 있었다. 국가 행사 오프닝 무대를 30분을 받았다고 하더라. 그 행사를 저희가 못하겠다고 하면서 펑크가 났다. 그 이후 방송 출연 정지를 받았다. ‘내일부터 나오지 마’ 이런 말도 없이 그 다음 날 집에서 TV 보니까 잼 해체라고 발표가 났다. 멤버 의사는 상관이 없었다.”
―해체된 뒤에는 뭘 했나.
“대학 재수 준비한다는 이야기가 나왔는데 그냥 집에 있었다. 방황의 시간을 6개월 정도 짧게 보냈다. 이후에 3인조를 준비했는데 앨범 CD가 나와서 할머니한테 갔더니 영화처럼 ‘현민아 여기 뭐가 왔다’하면서 주신 게 군대 영장이었다. 이래저래 미뤄보려고 노력을 했는데 군대를 가게 됐고 활동을 아예 못했다. 유재석, 이정재와 52사단 마지막 방위로 들어갔는데 기관지 천식이 안 좋아져 4개월 만에 의가사 전역을 했다. 먼저 전역해서 한 달간 두 명의 운전사 역할을 하기도 했다.”
―군대 전역 후에는 무슨 일을 했나.
“군대 이후 나를 좀 객관적으로 보게 되더라. 노래하고 춤을 내가 상당히 못한다는 걸 깨달았다. 직접 노래나 춤을 추기보다는 제작자로 나서야겠다고 생각해 음반 제작을 하기 시작했다. 만드는 건 자신 있는데 PR이 안되다 보니까 아이러니하게 DSP에 찾아가 사장님을 만날 수밖에 없었다. 당시 사장님이 막강한 파워가 있었다. 사장님이 마음에 들어하시고 ‘수익 생기면 너 30% 줄게’라고 해서 데뷔를 했는데 잘 안됐다. 돈 생각은 크게 안하고 서류도 안 받고 그냥 말하면 믿었던 것 같다.”
그룹 잼 멤버였던 황현민 씨가 1일 ‘일요신문’ 인터뷰에 응했다.
―사장님 원망도 많이 했나.
“올해 초 돌아가셨는데 안 좋은 일도 많았지만 돌아가시기 한참 전에 다 풀었다. 나중에 내 아버지 같이 지냈다.”
―다음에는 어떻게 됐나.
“몇 번 그렇게 돈을 못 벌다, ‘아이돌’이라는 우리나라 최초 진짜 꼬마 그룹을 만들기도 했다. ‘허니패밀리’는 제작 단계에서 회사가 자금난에 허덕이면서 이주노 씨에게 가게 됐다. 돈이 없어서 요식업에 뛰어들어 그곳에서 돈 벌면 제작에 손 대고 또 잘 안되면 다시 요식업을 했다. 클럽 운영도 했었다. 랜드로버 상대로 집단소송에 나서기 전 최근까지는 요식업에 종사했다.”
―돈을 벌어 다시 뛰어들 정도로 제작에 집착하는 이유가 있나.
“만드는 게 훨씬 더 재밌다. 제가 1등을 했을 때는 눈물을 안 흘렸다. 근데 내가 만든 팀 앨범만 나와도 혼자서 울컥해 눈물이 쏟아지더라. 제작에서 더 희열을 느꼈던 것 같다.”
―다른 멤버들은 어떻게 지내나.
“메인보컬이었던 조진수 씨와는 오랜 시간 연락을 못했다. 이름을 조민건으로 개명했다. 지금은 미용 사업을 하고 있다. 가장 인기가 많았던 홍일점 윤현숙 누나는 의류사업을 하고 있다. 지금은 사업 때문에 미국에 가 있다. 두 달 뒤에는 백화점 입점도 한다고 했다. 김현중이라는 친구는 프랑스 화장품을 수입해서 홈쇼핑도 출연하고 있다. 신성빈이라는 동생은 건설업 쪽에 종사한 지 13~14년 된 거 같다. 다들 각자 분야에서 열심히 살고 있다.”
김태현 기자 toyo@ilyo.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