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극적 소재+초고속 전개+명품 연기…“김 작가, 이번에도 당신의 승리”
SBS 수목극 ‘황후의 품격’ 관련 기사에 달린 댓글이다. 여기서 말하는 ‘김 작가’는 이 드라마를 집필하는 김순옥 작가다. 그는 누구일까? ‘아내의 유혹’을 비롯해 ‘왔다 장보리’ ‘내 딸 금사월’ 등 소위 ‘막장’이라 불리는 드라마를 연이어 써온 인물이다. 또 하나의 수식어는 ‘시청률 보증수표’다. 쓰는 작품마다 시청률 1위를 도맡았다. 물론 욕도 많이 먹는다. 하지만 김 작가가 쓰는 드라마는 욕을 자양분 삼아 무럭무럭 큰다. “도대체 왜 그렇게 난리인데?”라며 궁금해서 한 회를 본 시청자들이 결국은 욕하면서도 궁금해서 다시 찾게 만든다. 그래서 “한 번도 안 본 사람은 있어도 한 번만 본 사람은 없다”는 말이 나오는 것이다.
사진=SBS ‘황후의 품격’ 홈페이지
# “미안해, 보검아. ‘황후의 품격’으로 갈아탔다.”
우선 성과부터 따져보자. ‘황후의 품격’은 11월 말 전국 시청률 7.6%로 시작했다. 뚜렷한 인기작이 없는 상황에서 무주공산을 점령하며 1위로 출발선을 끊었다. 하지만 한 주 만에 정상을 내줬다. 케이블채널 tvN에서 동시간대에 ‘남자친구’가 시작됐기 때문이다. 방송사와 제작사들이 서로 잡고 싶어 안달이 났던 배우 박보검과 송혜교의 컴백작이다. 방송이 시작되기 전 보도 자료도 몇 개 나오지 않았지만 기대감은 엄청났고, 그 기대감은 고스란히 시청률로 이어졌다. 2회 만에 10.3%로 두 자릿수 시청률을 기록한 ‘남자친구’ 앞에 ‘황후의 품격’도 맥을 못 추는가 싶었다.
하지만 두 드라마가 맞붙은 지 3주 만에 다시 골든크로스가 발생했다. 이후 격차는 더 벌어졌다. 12월 20일 방송된 남자친구 8회의 시청률은 9.2%였던 반면 ‘황후의 품격’ 20회는 14.6%로 자체최고시청률을 기록하며 가파른 상승 곡선을 그렸다. ‘남자친구’가 편성상 30분 먼저 시작돼 시청자들을 선점하는 것을 고려할 때, ‘황후의 품격’의 기세는 예상을 크게 웃도는 셈이다.
‘남자친구’의 관련 기사 댓글은 폭발적이다. 평균 500개 이상 달린다. 아이돌 부럽지 않은 박보검의 팬덤의 힘이다. 그들의 지지는 절대적이다. 그런데 최근 이런 댓글이 하나둘 등장하기 시작했다. “미안해, 보검아. 이번에는 ‘황후의 품격’으로 갈아탔다.”
정통멜로를 표방하는 ‘남자친구’가 다소 밋밋하고 뻔한 전개를 보인 반면, ‘황후의 품격’은 어디로 튈지 모르는 파격 전개로 시청자들의 이목을 사로잡고 있기 때문이다. ‘남자친구’가 ‘건강한 맛’이라면 ‘황후의 품격’에서는 ‘MSG의 맛’이 느껴진다는 것이다. 작은 자극에도 반응하는 시청자들의 시청 행태를 고려했을 때, ‘남자친구’는 ‘황후의 품격’의 파상 공세를 버티기 힘들었다.
# 명불허전 김순옥
김순옥 작가가 쓴 ‘아내의 유혹’에는 얼굴에 점 하나 찍고 180도 달라지는 캐릭터가 등장한다. 시청자들은 허탈 웃음을 짓지만, 극 중 인물들은 점 하나 찍고 나타난 인물의 정체를 알아채지 못한다. ‘왔다 장보리’는 연민정이라는 희대의 캐릭터를 낳았다. 이 캐릭터를 연기한 배우 이유리는 처음에는 엄청난 욕을 먹었지만, 이 드라마가 끝난 후에는 스타들의 전유물이라 할 수 있는 미니시리즈 여주인공을 맡고, CF에 출연할 정도로 큰 인기를 누렸다. 시작은 ‘왔다 장보리’였지만 끝날 때는 ‘갔다 연민정’이라고 불린 것도 무리가 아니다.
사진=SBS ‘황후의 품격’ 홈페이지
대한민국이 입헌군주제라는 설정으로 시작된 ‘황후의 품격’은 이에 뒤지지 않는다. 극중 140kg 정도인 것으로 설정됐던 주인공 나왕식은 체중을 확 줄인 후 황제의 경호원인 천우빈으로 거듭났다. 이 과정에서 배우 태항호가 최진혁에게 바통을 넘겨줬다. 최진혁이 본격적으로 등장한 직후 시청자게시판에는 “어떻게 태항호가 살 뺀다고 최진혁이 되나?” “살 빼면 키도 커지는 것인가?” “‘아내의 유혹’의 점 찍는 것을 능가했다”는 등의 평이 쏟아졌다.
죽음도 불사한다. 이미 주인공 나왕식의 어머니가 황제 이혁(신성록 분) 등의 계략 아래 목숨을 잃었고, 나왕식의 정체를 밝히려던 악당도 처참한 최후를 맞았다. 최근 방송에서는 여주인공 오써니(장나라 분)의 누명을 벗기려던 황실 직원이 의문의 죽음을 피해가지 못했다. 이쯤 되니 ‘황후의 품격’이 ‘김순옥의 데스노트’라는 말도 나온다.
자극적 설정도 판을 친다. 이혁은 비서실장인 민유라(이엘리야 분)와 거침없이 외도한다. 심지어 황후가 곁에서 마사지를 받고 있는 상황에서도 민유라와 신체 접촉을 마다하지 않는다. 민유라를 눈엣가시처럼 여기는 태후 강씨(신은경 분)는 민유라를 시멘트로 묻어버리려 한다.
사진 출처 = SBS ‘황후의 품격’ 홈페이지
# 희극을 정극으로 만드는 호연
‘황후의 품격’을 보고 있노라면 헛웃음이 나올 때가 적잖다. 과도한 생략과 비약 때문에 드라마의 완성도가 떨어질 때가 많다. 그런 틈새를 메우는 접착제 역할을 하고 있는 이들은 주연 배우 장나라, 최진혁, 신은경 등이다.
장나라, 최진혁이 차기작으로 ‘황후의 품격’을 선택했다는 소식에 “왜 김순옥의 작품이냐?”는 질타도 적지 않았다. 그들은 제작발표회 등에서 한목소리로 “대본이 재미있었다”고 말했다. 그들의 선택은 틀리지 않았다. 이는 높은 시청률로 입증됐다.
고리타분하고 진부한 단어와 표현으로 점철된 대사가 두 사람을 거치며 생동감을 얻는다. 남다른 발음과 발성, 그리고 감정표현을 통해 각기 맡은 캐릭터에 당위성을 불어넣는다.
따지고 보면 미국 드라마 ‘위기의 주부들’과 ‘가십걸’ 등은 자극적 소재와 설정이 버무려진 막장이었다. 하지만 배우들의 호연과 짜임새 갖춘 이야기를 통해 ‘고급 막장’이라는 평을 받았다. ‘황후의 품격’ 역시 연기력이 출중한 배우들 덕에 이런 평가에 가까이 가고 있다. 그야말로 ‘막장의 품격’이라 할 만하다.
김소리 대중문화평론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