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향기’ 석 자를 다시 돌아 보게 하는 129분의 마법…자폐 소녀가 바라 보는 진실을 좇는 변호사의 이야기
배우 정우성, 김향기와 이한 감독이 21일 오후 서울 광진구 건대입구 롯데시네마에서 열린 영화 ‘증인’ 언론시사회에 참석해 포토타임을 갖고 있다. 사진=박정훈 기자
21일 서울 광진구 자양동 롯데시네마 건대입구에서 영화 ‘증인’의 언론배급시사회가 열렸다. 이날 시사회에는 이한 감독과 배우 정우성 김향기가 참석했다.
이한 감독은 앞선 ‘완득이’ ‘우아한 거짓말’ 등 작품을 통해 우리 사회의 문제들을 따뜻한 시선과 섬세한 연출로 풀어낸다는 평가를 받아 왔다. 이번 작품 역시도 단순히 ‘속물조차 되지 못하는’ 변호사와 자폐아와의 교감 외에 각종 사회 이슈를 양념처럼 여기저기 뿌려놓은 것이 눈에 띈다.
이 감독은 “롯데 시나리오 공모전의 심사위원으로 참석했다가 이 시나리오를 보게 됐고, 주제와 캐릭터에 굉장히 마음이 움직였다”라며 “좀 더 상업적으로 각색이라고 했다기엔 뭐하지만, 현 시대를 살아가고 있는 사람들에게 보다 많은 공감대를 어떻게 하면 전달할 수 있을까 고민이 많았다”고 설명했다.
영화에서 자폐 스펙트럼 증후군을 앓고 있는 중학생 지우(김향기 분)는 반복해서 이렇게 묻는다. “아저씨는 좋은 사람입니까?” 분명 그의 질문이 향한 곳에는, 검찰 측 증인인 지우의 대척점에 있는 살인 용의자의 변호사 순호(정우성 분)가 있다. 그러나 반복되는 지우의 대사를 통해 감독 역시 관객들에게 같은 질문을 한다.
배우 김향기가 21일 오후 서울 광진구 건대입구 롯데시네마에서 열린 영화 ‘증인’ 언론시사회에 참석해 포토타임을 갖고 있다. 박정훈 기자
정우성 역시 이 대사를 “가장 무겁고 크게 와 닿았다”고 평했다. 그는 왕년에는 ‘민변계의 파이터’로 불렸으나 지금은 돈과 명예를 위해 본의 아니게 변절하게 된 대형 로펌 변호사 순호 역을 맡아 열연을 펼쳤다.
정우성은 “어찌 보면 다음 세대들을 대변하는 질문인 것 같다. 이후에 세상을 책임져야 할 다음 세대들이 어른들에게 ‘좋은 사람입니까?’ 하고 질문을 했을 때 우리는 정당한지. 스스로에게 던질 수 있는 그런 질문이라고 생각했다”고 말했다. 그는 이어 “지우의 뜬금없는 질문이 무섭고 무겁다고도 느꼈다. 그리고 마지막에 순호가 한 말이 지우의 질문에 대한 정답이 아닐까. 그 씬이 저에게 가장 좋았던 장면으로 남았다”고 덧붙였다.
정우성과 김향기의 인연은 17년 전으로 거슬러 올라가 김향기의 아역배우 활동 초창기부터 시작됐지만, 영화에서 호흡을 맞춘 것은 처음이었다. ‘세대차이가 있지 않았냐’는 질문에 정우성은 “소통에 전혀 무리가 없었던 것 같은데 저 혼자만의 착각일지도 모르겠다”며 너스레를 떨기도 했다. 여기에 더해 이 감독은 “현장에서 보면 나이가 오히려 거꾸로인 것 같다. 향기 씨가 40대 같고 우성 씨는…”이라며 뒷말을 차마 잊지 못하는 모습을 보여주기도 했다.
‘40대 같다’는 평가에 스태프들도 고개를 끄덕일 정도로 김향기의 이날 발언은 그의 성숙한 정신(?)을 그대로 보여줬다. 아무래도 실제로 고통을 받고 있는 사람들이 있는 만큼 연기와 행동에 고심이 이어질 수밖에 없었다는 게 그의 이야기다.
김향기는 “아무래도 지우와 같은 친구들, 부모님, 지인들이 보셨을 때 불편함을 느끼거나 안 좋은 감정이 드신다면 서로에게 상처가 될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라며 “어떻게 표현해야 할 지 부담이나 이것저것 생각이 있었지만 하나의 상황마다 지우의 모습을 있는 그대로 표현하려 애썼다. 그렇게 하다 보니 촬영에 들어갈 땐 심적 부담감이나 저도 몰랐던 긴장된 떨림들, 그런 게 덜해졌던 것 같다”고 설명했다.
기자들의 질문에 답변하고 있는 정우성, 김향기. 사진=박정훈 기자
앞선 ‘신과 함께’의 메가 히트로 ‘김향기’라는 배우의 이름에 어느 정도 티켓 파워가 생겼다는 이야기도 나왔다. 이에 대해서 그는 “티켓 파워나 그런 건 제가 찍어서 흥행이 잘 되고 이런 게 아니라 작품에서의 장점들이 저와 잘 맞고 어우러져서 관객 분들이 저까지 많은 사랑을 해주시고 좋은 성장 단계를 밟고 있는 것 같다”라며 “연기를 하는 것을 좋아하고, 진심으로 노력을 하고 있다는 부분에 있어서는 배우로서 저의 좋은 장점이 아닐까 그렇게 생각한다”고 대답했다. 이 말에 정우성과 이 감독 역시 “이렇게 대답할 수 있다는 게 (배우로서) 가장 큰 장점”이라며 김향기를 앞 다퉈 치켜세우는 모습을 보여 웃음을 자아내기도 했다.
극 중에서는 자폐 스펙트럼 증후군을 앓고 있는 지우가 보는 세상이 스크린을 통해 관객들에게도 그대로 전달된다. 주변 행인들의 시선, 손목시계의 초침 소리, 기침 소리와 구두 소리까지도 지우에게는 날카로운 흉기처럼 느껴진다. 불안하게 떨리는 시야와 제멋대로인 원근감은 관객들에게도 멀미를 일으킬 만큼 사실적이다.
이 감독은 이에 대해 “칼리라는 미국의 자폐 스펙트럼 증후군 환자가 묘사를 한 그들의 시각을 그대로 묘사해 촬영한 영상을 참고했는데 이 장면은 향기 씨가 직접 머리에 카메라가 설치된 헤드셋을 끼고 촬영한 영상이다. 자신이 보이는 대로 지우의 감정을 표현해 낸 것”이라며 “어려울 줄 알았는데 생각보다 금방 끝내더라. 그래서 (향기 씨가) 촬영팀으로 와야 한다는 이야기도 들었다”며 웃음을 터뜨렸다.
지우가 자신의 생각과 감정을 그대로 표현하는 것처럼 순호 또한 그의 감정을 조금씩 쏟아낸다. 집 안에서, 지우와 함께 하는 하교길에서, 그리고 마지막엔 법정에 이르기까지 그의 감정 스펙트럼은 조금씩 넓어진다.
정우성은 “지우를 만났을 때나 아버지와의 관계 안에서 순호의 순수함이 바탕이 되기 때문에 그만큼 절제 없이 더 순수하고 자연스러운 리액션을 할 수 있었던 것 같다”라며 “이전에는 극중에서 상대와 대화를 주고받을 때도 내 감정을 들키지 않기 위해 계속해서 만들어진 리액션을 해야 하는 것이 많았는데 순호는 전혀 그럴 필요가 없는 캐릭터였다. 원 없이, 자유롭게 연기할 수 있었다”고 설명했다. 그는 순호에 대해 “이제까지 맡았던 캐릭터 중에 가장 절제 안 하고 감정의 표현을 한 캐릭터”라고 평가하기도 했다.
한편, 영화 ‘증인’은 살인 사건의 유력 용의자의 무죄를 증명해야만 하는 대형 로펌의 변호사 순호(정우성 분)와 유일한 목격자인 자폐 소녀 지우(김향기 분)의 소통과 연결, 그리고 이해를 그렸다. 눈빛과 표정, 몸짓 하나하나 캐릭터 속으로 녹아든 김향기의 연기 변신이 특히 눈에 띈다. 129분. 12세 이상 관람가 2월 13일 개봉.
김태원 기자 deja@ilyo.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