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도 바둑’ 매주 일요일 오프라인 모임…“고수가 멘토 돼 복기하며 웃고 즐기는 사이 자연스럽게 실력 늘어”
시중에 기원도 드물지만, 문을 연 기원에서 젊은이 찾기는 더 어렵다. 가끔 기웃거리는 이상한(?) 청년이 있어도 70대 할아버지들만 난로 옆에 앉아 있는 모습을 보고 뻘쭘하게 발걸음을 돌리기 일쑤다. 어린이에겐 바둑교실이 있고, 대학생들은 기우회라도 있지만, 20대 후반에서 30대에 이르는 직장인 바둑 마니아들은 마땅히 바둑을 둘 장소가 없다. ‘꽃보다 바둑센터’, ‘바둑의 품격’같이 프로기사가 운영하는 성인바둑 강습소는 주머니 사정이 얇은 사회 초년병에겐 아직 문턱이 높다.
2030 바둑카페 ‘오늘도 바둑’ 이승엽 모임장.
―이 모임을 만든 이유는?
“20대가 많이 사용하는 ‘소모임’이란 모바일 앱이 시작이었다. 취미를 통한 다양한 모임이 이 앱에 있었는데 ‘바둑’만 없어 이상했다. ‘젊은이들은 왜 바둑을 두지 않을까’라는 의문을 가졌고, 결론은 ‘이들은 바둑을 배우거나 접할 장소가 없다’였다. 그래서 2017년 10월 무렵에 가벼운 생각으로 앱 모임방을 개설했는데 뜻밖에 많은 이들이 호응했다. 매주 번개모임을 가지며 변화를 거듭하는 사이 몇 개월 만에 가입자가 100명이 넘었다. 이후 ‘카카오톡 플러스 친구’를 거쳐 ‘네이버 밴드’를 통해 만나다가 올해 네이버에 카페를 개설했다. 참가회원 대부분은 어렸을 때 바둑학원에 다닌 기억이 있고, 한동안 바둑을 잊고 지냈던 20대와 30대들이다. 이들도 나름 ‘이창호 키드’다. 이런 젊은 바둑인들이 만나 즐길 수 있는 장을 만들고 싶었다.”
―모임 운영방식과 특징이 있다면?
“매주 만나지 않으면 친해지기 어렵다고 생각한다. 대개 인터넷 사교모임에선 정모가 한 달에 한 번 정도지만, 우리는 매주 일요일 1시 정도 만나 저녁 7시까지 바둑을 두고 뒤풀이를 한다. 요즘은 평균 20명 정도가 참석한다. 모이는 장소는 매주 달라지는데 강남, 신촌, 종로가 주 무대다. 모임 장소는 미리 공지하고 댓글로 신청자를 받고 있다. 참가비는 기료 등 시설 이용료 수준이다. 봄, 가을엔 MT도 간다.”
―기력체계가 독특하다고 들었다.
“바둑모임에서 가장 큰 애로점이 기력 불균형이다. 실력에 따른 객관적인 치수 조정이 어렵고, 사실 대부분 사람이 깔고 두는 걸 안 좋아한다. 우리 모임 대국에선 접바둑이 없고, 모두 돌을 가려 흑백을 잡는다. 최상위 그룹이 S클래스(세미프로·연구생 출신), 그 밑으로 A클래스(인터넷 8~9단), B클래스(인터넷 6~7단)…I클래스(인터넷 18급~4급)까지 총 10그룹으로 기력을 묶었다. 대국 승패에 따라 승강급도 이뤄진다. 치수가 없는 대신 클래스 차이에 따라 1클래스 차이는 10집(백이면 16집), 2클래스 차이는 40집(백이면 46집) 등으로 역덤을 준다. 매주 대국 결과를 집계해 자체랭킹 시스템으로 승강급이 이뤄진다.”
종로기원에 모인 젊은 기객들.
―‘오늘도 바둑’ 네이버 카페는 1981년~2000년 출생자만 가입할 수 있다. 40대 이상은 회원으로 받지 않는가?
“아무래도 20년 이상 나이 차이가 나면 스스럼없이 농담하며 바둑을 즐기기가 부담스럽다. 내가 지금 29살인데 친구처럼 편하게 바둑을 가르치기 위해서도 나이 제한은 필요하다. 회원들 평균 나이에 따라 노는 장소와 모임 성격이 달라진다. 기본 틀을 20~30대로 잡았기에 이 규정은 철저히 지킬 생각이다.”
―이곳에서 바둑을 어떻게 가르치나?
“매주 입문반 강의를 2시간씩 한다. 바둑 고수들이 멘토가 돼 자연스럽게 복기도 해준다. 자체 스터디를 할 때도 있다. 예를 들어 어떤 모양의 행마에 대해서 자신이 생각하는 정답을 이야기하면 다른 친구가 의문을 제기하고, 멘토가 다시 방향을 잡아주는 방식이다. 자유롭게 대화하며 웃고 즐기는 사이에 판을 보는 눈이 달라진다. 실제로 꾸준히 참석한 친구들은 대부분 두 단계 이상 실력이 늘었다. 인터넷 바둑은 승패가 나면 끝이지만, 이 모임에선 바둑을 두고 난 후가 진짜 시작이다. 사람과 사람을 잇는 매개체로 바둑 같은 소통 창구는 없다고 생각한다. 바둑에 여러 매력을 맛볼 수 있는 게 오프라인의 힘이다. 그래서 만남 자체가 즐거운 모임이 되도록 노력한다.”
‘서봉수와 같이 짜장면만 먹어도 두 점은 늘 수 있다’는 속설이 있다. 고수와 이야기하다보면 자연스럽게 그 수준에 이를 수 있다는 뜻이다. 이 모임 멘토들은 대부분 현직 바둑강사들인데 모두 회원 중 20대는 대학생 또는 대학원생이 주축을 이루고, 30대 초반은 대부분 직장인이나 전문직 종사자들이다. 매주 주말 모임을 하기에 아무래도 미혼이 많다. 청춘남녀가 모여 바둑을 두다 보면 ‘눈(손)이 맞아’ 사랑이 싹트는 경우도 있다. 이승엽 모임장은 “모임 내 이성 교제는 자유인데 다만 문제가 생기거나 다른 회원에게 피해를 주면 제재한다”고 설명했다.
이 모임을 찾은 날도 20대 초반 여성 세 명을 만났다. 이미 6개월째 입문반 수업 중인 고참은 “사람들과 만나는 자체가 재미있다”고 말했고, 처음 나왔다는 신입회원 두 명은 “디자인 쪽 일을 하는데 바둑이란 새로운 취미를 가지고 싶었다”, “아빠가 바둑을 좋아하시는데 같이 두고 싶어 배우러 왔다”라고 말한다.
90년대 초 노래방이 처음 나왔을 때 500원짜리 동전을 플라스틱 바구니에 받아서 썼다. 최근엔 다시 코인노래방이 유행이란다. 과거 건물 2층을 점령했던 다방은 대부분 프랜차이즈 커피숍으로 바뀌었다. ‘노래를 부른다’ 또는 ‘커피를 마신다’라는 가치는 세월이 흘러도 변하지 않지만, 시대에 따라 즐기는 장소와 방식은 바뀐다. ‘바둑을 둔다’라는 가치는 미래에 어떤 방식으로 부활할까?
박주성 객원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