재벌들이 이렇게 많은 현찰을 보유하게 된 가장 큰 이유는 금리가 낮은데다, 지난 2000년부터 일부 사업의 호조로 막대한 영업이익이 발생한 때문이다. 여기에 주식시장 호조를 틈타 마구잡이로 단행한 유상증자로 현찰이 쏟아져 들어온 것도 또다른 이유. 특히 일부 재벌 금융계열사의 투자수익이 눈덩이처럼 불어난 것도 한몫을 단단히 하고 있다.
문제는 이들 재벌들이 현찰을 어디에 써야 할지 고민하고 있다는 것. 돈은 많은데 마땅히 쓸 곳이 없어 일부 재벌들은 평소 눈여겨보아둔 기업을 사들이거나 먼 앞날을 내다보고 부동산을 사는 데 투자할 정도다.
재계에 따르면 지난 6월 말 기준으로 삼성전자는 5조5천억원의 현금을 손에 쥐고 있다. 삼성전기, 삼성생명, 삼성카드, 삼성증권 등 다른 주력계열사도 평균 1~2조원대의 현찰을 가진 것으로 알려져 삼성그룹 전체가 보유한 현찰은 최소한 10조원을 넘을 것으로 금융계는 보고 있다. LG그룹, 현대차그룹, SK그룹도 3조원대의 현금을 갖고 있고, 롯데그룹도 2조원대의 현금을 들고 있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LG그룹은 LG전자, LG텔레콤, LG화학 등 주력사의 영업호조세가 이어지면서 현금이 눈덩이처럼 불고 있다. 특히 LG는 구조조정 차원에서 상당수 계열사를 분리해 상장하면서 엄청난 상장평가익을 본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여기에 수년 동안 재무구조 개선을 위해 단행한 유상증자로 들어온 현찰 역시 5조원대를 넘는 것으로 파악되고 있다.
현대차의 경우 지난해 하반기부터 호조를 띤 자동차 국내외 판매열풍으로 쏟아진 현금을 주체하기 힘들 정도다. 지난해의 경우 순익이 사상 최대인 2조원대에 이른데다, 올 들어서도 매월 수천억원의 현찰이 유입되고 있다는 것.
SK도 현찰장사를 하는 SK텔레콤이 그동안의 투자과정에서 회수기간에 본격 들어가면서 연일 수백억원의 현찰이 들락거리고 있다. KT인수에 과감히 1조5천억원의 베팅을 한 것도 이같은 현찰에 대한 자신감 때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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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그래픽=장영석 기자 zzang@ilyo.co.kr | ||
내로라 하는 국내 재벌들이 이렇게 돈을 뭉텅이로 들고 있다보니 재벌들 위주로 기업인수 합병 붐이 일고 있다. ‘돈의 힘’으로 재벌간 세력판도 재편이 이뤄지고 있는 것.
돈지갑을 들고 기업 쇼핑에 나서고 있는 대표적인 기업은 SK그룹. SK는 지난 봄 2조원 정도를 들여 KT의 지분 11.34% 정도를 사들여 최대 주주가 됐다. 이어 유·무선 통합시장에 대비한다는 명분으로 두루넷 전용회선망을 4천억원에 사들였고, 라이코스코리아 인수(4백46억원), 한국디지털미디어센터 지분40% 인수(4백억원), 일본 위성방송사업자인 MBCO 지분14.2% 인수(3백억원) 등 숨가쁜 쇼핑을 해냈다.
SK는 전북은행 카드사업부문을 별도 회사로 분리한 뒤 인수해 카드사업에도 진출이 확정됐다. 또 발전자회사나 가스공사 민영화에도 참여한다는 계획을 세워놓고 있어 KT인수에 버금가는 큰 금액의 쇼핑리스트가 아직도 남아 있다.
IMF 시절에도 마르지 않는 현금 동원능력을 과시했던 롯데그룹도 기업 인수전에 발벗고 나섰다. 지난 5월 외식업체인 TGI 프라이데이를 5백억원에 인수한 롯데는 7월 초 미도파백화점을 5천4백20억원에 인수했다. 롯데의 쇼핑 리스트에는 아멕스카드와 대한통운도 등장하고 있다. 이중 아멕스카드 인수 가능성이 높은 것으로 알려졌다. 대한통운 역시 SK와 경합을 벌이고 있다는 얘기가 끊임없이 이어지고 있다.
현대자동차그룹은 지난해부터 계열사 설립에 박차를 가해 한국로지텍 등을 세운데 이어 올해는 외국회사와 합작해 자동차 운송선 전담회사를 세웠다. 이외에도 현대차그룹은 최근 잇달아 위장계열사 시비에 휘말리는 등 현대그룹에서 현대차로 독립한 뒤 가장 급속히 몸집 불리기에 성공한 그룹으로 분류되고 있다.
문제는 삼성. 삼성그룹의 간판인 삼성전자는 올해 초 현금보유고가 2조8천억원이던 것이 6월 말 5조5천억원으로 뛰었다. 반 년도 안돼 두배 정도 현금보유고를 늘린 것. 삼성이 꾸준히 현금보유고를 늘리자 다른 기업들도 새삼스럽게 현금 보유고에 집착하는 등 국내 대기업이 현금쟁이기에 나서는 계기가 됐다. 하지만 삼성은 전자를 대신할 만한 신수종 사업 발굴에 성공한 것으로 보이진 않는다. 신규투자는 별로 보이지 않고 현금 보유고를 늘리는 보수적인 재무 관리로 ‘단군이래 최고의 현찰 보유’라는 칭호를 얻는 정도였다.
재계에선 삼성이 현금 보유액을 늘리는 데 대해 여러 가지 해석이 나오고 있다. 첫째는 올 하반기 경제성장 둔화 등에 따른 위험부담을 피하기 위해 현금 쟁이기에 나섰다는 얘기다. 둘째는 신규사업 진출용 자금이란 것. KT지분 인수건은 SK그룹에 덜미를 잡혀 수포로 돌아갔지만, 르노삼성차를 통한 사업재개설이 끊이지 않고 나오는 것도 같은 맥락으로 볼 수 있다.
삼성은 지난 YS정권 말기 승용차 시장 진출이란 대규모 투자 사업을 끝으로 더 이상의 대규모 신규 투자가 없었다. DJ정부 시절 내내 현금 확보 위주의 보수적인 경영으로 돌아선 것. IMF를 겪으면서 삼성 재무팀이 추진한 ‘현찰왕’의 혜안은 빛났지만 요즘 이건희 회장은 “5년, 10년 뒤 먹고 살게 걱정된다”고 공개적으로 말하고 다니고 있다.
금융 전문가들은 최근 재벌의 현찰보유고 증가에 대해 “유동성 위기에 대한 대응력 강화라는 긍정적 차원도 있지만 자칫 경제력 집중을 심화시키는 요인이 된다”고 지적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