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 통치이념 민본 담아 건립…2045년까지 완전 복원 추진
경복궁(景福宮)은 조선의 법궁(法宮)이다. 왕조가 큰 복을 누려 번영하길 바랐던 염원이 담겼다. 사진은 경복궁 근정전(勤政殿). (사진제공=문화재청)
[일요신문] 서울은 새로운 왕조의 만년대계를 위해 설계된 철저한 계획도시였다. 백성의 안녕을 바라는 민본 과 공맹의 가르침을 현실 세상에서 구현하기 위한 왕도 정치의 이상이 도시 전체에 심어졌다.
어짊이 넘쳐나길 바랐던 ‘흥인문(興仁門. 동대문)’, 의로움을 위한 노력의 의지를 담은 ‘돈의문(敦義門. 서대문)’, 예를 숭상한 ‘숭례문(崇禮門. 남대문)’, 맑고 깨끗한 선비의 삶을 공경한 ‘숙정문(肅淸門)’. 나라의 나아갈 방향을 천명한 4대문 안에 역대 왕들이 신위를 모신 종묘와 토신과 곡신의 영험함을 빌어 백성을 배불리 먹이고자 했던 애민의 마음을 담은 사직단을 중심으로 나라와 임금이 강건하고 평안하길 바라는 뜻을 담은 궁을 세웠다.
#“조선왕조의 법궁, 왕도정치의 이상을 담다”
경복궁(景福宮)은 사적 117호로 서울특별시 종로구 세종로 1-56번지에 위치해 있다. 1395년(조선 태조 4년) 창건된 경복궁은 조선왕조의 법궁으로서 500년간 왕도정치의 중심이었다. 조선왕조 창업 이래 지난 600여 년간 한양(서울)은 이 나라의 수도로서 국가의 중심이었다. 오랜 세월 서울이 한 나라의 수도로 번창할 수 있었던 것은 처음부터 철저하게 계획된 도시이기 때문이다. 경복궁은 한양 도시계획의 중심으로, 북으로 북악산을 기대어 자리 잡았고 정문인 광화문 앞으로는 넓은 육조거리(지금의 세종로)가 펼쳐진다.
“새 왕조가 큰 복을 누려 번영하라”는 축원의 의미를 담은 경복궁의 명칭은 사서삼경 중 하나인 시경(時經) 주아(周雅)의 한 구절인 “기취이주 기포이덕 군자만년 개이경복(旣醉以酒 旣飽以德 君子萬年 介爾景福)-임 술에 취하고 이미 덕에 배부르니 군자만년 그대의 큰 복을 도우리라)”는 데에서 따 왔다.
조선왕조의 기본 통치 이념인 민본을 담아 건립한 경복궁은 1592년(선조 25년) 임진왜란으로 때에 불탄다. 그러나, 그것을 불태운 이들은 왜적이 아닌 바로 조선의 백성이었다.
누란의 위기에서 백성, 그리고 종묘와 사직을 버리고 도망한 무능한 왕에 대한 분노의 표출이었다. 이후 불타버린 조선의 제일 법궁 ‘경복궁’은 “군주민수(君舟民水)-임금은 배이고, 백성은 물이다”의 대표적 상징이 된다. 그 후 1867년(고종 5년) 중건될 때까지 불타버린 경복궁은 조선왕실에 아픈 가시였다.
특히 일제강점기에는 왜적들이 경복궁 앞에 침략 지배를 위한 도적의 소굴(조선총독부)을 지어 대한독립의 의지를 꺾고자 했다.
1990년부터 시작해 오는 2045년까지 완전 복원을 추진 중이며, 총독부 건물은 철거되어 민족정기를 되살리는 계기를 마련했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경복궁 바깥을 두른 담장의 길이는 2404m, 평균높이 5m, 두께는 2m 정도에 달한다.
전면 좌우 끝에 가루(角樓)인 동십자각과 서십자각을 세워 조선 5대 궁궐 가운데 유일하게 궐문형식을 갖추고 있다.
경복궁(景福宮)에는 백성인 평안한 나라, 민본과 왕도정치의 유교적 이상 국가를 향한 꿈이 담겼다. 사진은 경복궁 경회루(慶會樓). (사진제공=문화재청)
#“밝고 맑은 하늘 아래 애민과 풍류가 공존하다”
경복궁에 들어서기 위해서는 정문인 광화문을 먼저 지나야 한다. 광화문을 지나 왕이 신하들의 조하(朝賀. 조회의식)를 받거나 공식적인 대례 또는 사진을 맞이하던 근정전(국보 제223호)를 마주하면 민본을 제일 가치로 사았던 조선의 애민정신과 만난다. 근정전을 지나면 왕이 신하들과 정사를 논하고 집무를 보던 사정전과 마주한다. 사정전은 “생각하고 정치하라”는 의미의 담고 있다.
사정전을 뒤돌아 오복을 누린다는 의미의 향오문을 지나면 왕의 침전인 강녕전과 왕비의 침전영역인 교태전, 대비의 침전인 자경전(보물 제809호)이 나온다. 다음 대의 왕통을 이을 왕세자의 공간인 동궁(세자궁)은 자선당과 비현각이 주 전각이다.
경복궁에 가면 꼭 빼놓지 말고 보아야 할 것이 경회루(국보 제224호)와 향원정(보물 제1761호)이다. 경사로운 일이 함께하길 기원하면 조성된 경회루는 그 위풍이 가히 천하를 품고도 남음이 있다.
향원정은 경복궁이 중건되고 5년이 지난 1873년(고종 10년) 왕과 왕비가 한가롭게 휴식을 취하면서 거처할 목적으로 지어진 건청궁 앞 향원지 연못 한가운데 지어진 정자로 “향기가 멀리 퍼져 나간다”는 의미다. 향원지를 건너는 다리는 취향교로 “향기에 취한다”는 뜻이다.
경복궁은 새로운 나라 조선이 지향했던 유교적 이상이 무엇인가를 보여준다. 처음 이성계와 정도전이 손잡고 함께 만들고자 했던 나라, 이후 500년간 비록 제대로 실천되진 않았지만 조선이 이루고자 했던 유교적 이상향이 무엇인지를 말하고 있다.
백성이 평안한 나라, 왕이 백성을 두려워하는 나라, 위정자들이 백성을 섬기는 나라. 조선왕조 500년은 이 이상향을 실현하기 위한 장대한 여정이었다. 경복궁은 그 출발점이었다.
손시권 기자 ilyo11@ilyo.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