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친문 급부상했지만 비토 기류 여전히 높아…총선 앞두고 물갈이론 떠오를 수도
여권의 86(80년대 학번·60년대 생)그룹이 진격할 채비를 하고 있다. 운동권 세력인 86그룹은 문재인 정부 들어 임종석 전 대통령 비서실장을 필두로 ‘신 친문(친문재인)’으로 부상했다. 이들은 문재인 정부 출범 이후 주요직을 꿰차면서 친문(친문재인) 직계를 위협하는 신주류로 떠올랐다. 오는 3월 초로 예정된 개각에서 86그룹 리더인 우상호 더불어민주당 의원 입각이 초읽기에 들어갔다. 박영선 의원도 마찬가지다. 다만 ‘포스트 문재인’에 오르기까지는 넘어야 할 산이 많다. 핵심은 ‘자기 정치’다. 자기 세력화에 실패할 땐 ‘물갈이론·하방론’이 튀어나올 수도 있다.
우상호 의원. 박은숙 기자
86그룹이 다시 시험대에 섰다. 자기 세력화의 골든타임 시점은 21대 총선과 20대 대선이다. 차기 총·대선은 오는 2020년과 2022년에 치러진다. 한고비 한고비마다 ‘정치적 생명연장이냐, 굿바이 86그룹이냐’의 갈림길이다. 제2차 북·미 정상회담 후 단행할 개각 폭은 중폭 이상이다. 통일부와 중소기업벤처부를 포함한 7개 부처의 장관을 교체한다.
이번 개각의 핵심은 우상호·박영선 의원의 포함 여부다. 우 의원 측 관계자는 “새 내각 대상에 포함된 것은 맞다”고 밝혔다. 여권 복수 관계자도 “최근 청와대가 두 의원에 대한 검증을 경찰에 의뢰했다”고 말했다. 최근 여의도 정치권에는 특정 의원이 ‘입각 시 21대 총선에 나가지 않겠다’는 뜻을 청와대에 전달했다는 말이 돌았다. 우상호·박영선 의원은 장관 후 서울시장 자리를 노릴 것으로 보인다. ‘운동권 발’ 여권 새판 짜기가 초읽기에 들어간 셈이다.
문재인 정부 출범 초기, 이들은 ‘진격의 86그룹’으로 통했다. 최전선에는 임 전 실장이 섰다. 그는 87년 체제 이후 대학생들의 결사체 역할을 한 전국대학생대표자협의회(전대협) 의장 출신이다. 이들의 등장은 여권 권력재편의 신호탄이었다. 지난 대선 때 문재인 캠프에 몸담았던 한 인사는 86그룹의 부상에 대해 “친노(친노무현)계의 일시적 퇴장, 신주류의 부상을 의미했다”고 밝혔다.
실제 그랬다. 86그룹 핵심뿐 아니라 맏형과 후배들도 당·정·청 포스트 자리를 차지했다. 특히 임 전 실장을 필두로 조국 민정수석과 김수현 정책실장, 윤건영 국정기획상황실장이 청와대에 입성했다. 김현미 국토교통부 장관은 문 대통령이 새정치민주연합(현 민주당) 당 대표 시절 비서실장을 맡기도 했다. 김영춘 해양수산부 장관도 86그룹에 속한다. 86그룹의 한 축인 유은혜 교육부 장관은 첫 사회부총리에 이름을 올렸다.
당에선 86그룹 맏형격인 우원식·김태년 의원이 문재인 정부 출범 당시 원내대표와 정책위의장을 지냈다. 현재 민주당 정책위의장도 86그룹에 속하는 조정식 의원이다. 서울대 총학생회장 출신인 김민석 전 의원은 민주연구원장을 맡고 있다. 정부 출범 직후 대통령 특사 자격으로 러시아에 다녀온 송영길 의원은 대통령 직속 북방경제협력위원장을 역임했다. 이인영 의원 등은 개각 때마다 통일부 장관 후보군에 이름을 올리고 있다. 20대 총선에서 당선된 운동권 세력은 30명가량에 달한다.
86그룹 입지는 집권 3년 차를 맞아 단행한 청와대 인사개편에서 ‘원조 친노’ 노영민 대통령 비서실장이 귀환하면서 다소 축소했다. 다만 강기정 정무수석이 청와대에 입성하면서 운동권 세력의 명맥을 이어갔다. 86그룹의 당·정·청 장악이 ‘세대교체를 위한 새로운 권력지도’로 평가받은 이유도 이와 무관치 않다. 문 대통령도 선거 기간 “구시대의 막차가 아닌 새 시대의 첫차가 되겠다”고 밝힌 바 있다. 민주당 한 보좌관은 “민주정부 3기 이후는 86그룹의 몫이라는 뜻”이라고 해석했다. 이에 자유한국당 한 의원은 “운동권 그룹 일색”이라며 “운동권이 ‘정치 승진’ 수단으로 전락한 것”이라고 비꼬았다.
반면 친문 직계인 ‘3철(양정철 전 청와대 홍보기획비서관·전해철 더불어민주당 의원·이호철 전 청와대 민정수석)’은 정부 출범과 동시에 한발 물러섰다. 이중 양 전 비서관은 신년에 단행한 청와대 참모진 개편에서 임 전 실장의 후임자로 거론됐지만, “청와대에 안 들어간다”며 선을 그었다. 그는 정부 출범 이후 오랜 기간 외국에 머물렀다.
전 의원은 개각 때마다 법무부 장관 물망에 올랐지만, 지난해 6·13 지방선거 당시 경기도지사 당내 경선에서 참패했다. 이 전 수석은 문 대통령이 취임한 날 출국했다. 민주당 한 관계자는 “‘노무현 시즌 2’라는 정치적 부담을 주지 않기 위한 3철의 고심 깊은 행보”라고 귀띔했다. 문재인 정부 집권 초기 경제사단을 주도한 ‘변양균 사단’과 비교할 수 없는 ‘운동권 사단’이 부상한 셈이다.
관전 포인트는 향후 정치상황과 86그룹의 ‘함수 관계’다. 86그룹 중 일부는 제2차 북·미 정상회담 전후 단행할 개각 후보군에 이름을 올렸다. 그러나 86그룹이 ‘포스트 문재인’ 자리에 오를지는 미지수다. 민주당 중진 의원은 “86그룹의 위상이 커졌지만, 친문 직계 입장에선 여전히 비주류”라고 잘라 말했다. 임기 중·후반으로 갈수록 인재풀이 ‘자기 사람 키우기’ 내지 ‘관료 출신’으로 축소한다는 점도 변수다. 전자는 차기 총·대선용이다. 후자는 임기 말 레임덕(권력누수 현상)의 속도를 늦추는 완충장치 역할을 한다.
이보다 더 큰 문제는 86그룹이 안고 있는 ‘태생적 한계’다. 이들은 2000년 전후 이른바 ‘젊은 피 수혈론’을 앞세워 정치권에 입문했다. 등장은 화려했다. 2004년 17대 총선에선 12명이 입성했다. 이들은 총선 직전 당 주류와 전략적 관계를 맺으면서 공천권에 사실상 편승했다. 민주당 한 보좌관은 “이들이 지난 20여 년간 자기 브랜드를 만들지 못했다는 지적에 동의한다”며 “당 내부에선 86그룹이 보일 때는 (지도부를 선출하는) 전당대회뿐”이라고 평가 절하했다.
86그룹의 ‘숙주정치 논란’은 현재진행형이다. 신년 들어 송영길·우상호 의원은 정부의 ‘탈원전 정책’과 이용호·손금주 무소속 의원의 ‘입당 불허’를 놓고 당·청과 각을 세웠다. 송 의원은 탈원전 재검토 발언은 ‘송영길의 난’으로까지 불렸다. 우 의원은 “이용호·손금주 의원의 입당을 불허한 근거가 순혈주의 때문인지 우려된다”고 꼬집었다. 친문계가 두 의원의 입당을 반대한다는 소문이 돈 직후라 파장은 컸다. 같은 당 박영선 의원도 “순혈주의를 고수해야 할 것인지 개방과 포용을 해야 할 것인지 겸손하게 진지한 고민이 필요하다”고 가세했다.
우 의원은 4·3 재보선에서 고 노회찬 전 의원 지역구인 경남 창원·성산 지역구를 정의당에 양보하자고 제안했다가 당원들로부터 뭇매를 맞았다. 우 의원은 결국 “개인 의견”이라며 “문 대통령의 성공과 당의 승리를 위해 다 함께하자”고 사과했다. 송 의원은 탈원전 재검토 주장을 굽히지 않았지만, 이슈를 더 끌고 가는 데는 실패했다. 청와대 내부에서 불쾌한 기색이 흘러나오면서는 이슈 선점을 위한 발언도 줄어들었다. 우 의원도 당 내부 반발에 후퇴했다. 청와대 일부 관계자들은 이들의 소위 ‘튀는 행보’에 대해 우려한 것으로 알려졌다. 자의 반 타의 반 입각 대상자인 이들의 포지션도 86그룹의 입지를 축소하는 데 한몫했다. 익명을 요구한 정치권 한 관계자는 “판을 흔드는 똘똘한 한방이 없는 것”이라고 평가 절하했다.
86그룹이 자기 세력화를 주도하지 못할 경우 20대 총선 전 86그룹에 직격탄을 안겼던 ‘숙주정치·하방론’이 부상할 수도 있다. 2015년 새정치민주연합 김상곤 혁신위원회 체제에서 이동학 전 혁신위원은 이인영 의원을 향해 “험지에 도전해야 한다”며 하방론을 폈다. 1987년도 이화여대 총학생회장 출신인 임미애 전 혁신위원도 “86세대가 또 다른 권력이 된 것은 아닌지 걱정”이라며 “86그룹 정치인들이 뭘 고민하고 사회에 어떤 공헌을 했는지 의심스럽다”고 직격탄을 날렸다.
이들의 반기 이후 86그룹은 한동안 ‘물갈이론’에 시달렸다. 21대 총선 과정에서도 86그룹은 또 한 번 ‘운동권 물갈이론’을 정면 돌파해야 하는 운명에 처할 것으로 보인다. 첫 번째 고비는 3월 개각이다. 이를 시작으로 4·3 재보선과 5월 당 원내대표 선거 등도 86그룹 세력화의 분수령이다. 이 국면에서 ‘헛방’을 날린다면, 기다리는 것은 혁신의 주체가 아닌 ‘혁신의 대상’으로 전락하는 일이다. 이들의 최종 종착지가 ‘낙천’일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다는 얘기다. ‘승자냐, 패자냐’ 벼랑 끝 승부의 방아쇠는 당겨졌다.
윤지상 언론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