두 번의 맞대결서 이완구가 승리…교통정리 안되면 다시 한번 ‘충돌’
충남 홍성·예산을 둘러싼 이완구 전 총리와 홍문표 자유한국당 의원의 관계에 정치권 이목이 쏠리고 있다. 사진은 지난달 29일 충남 천안 ‘완사모’ 창립 10주년 기념 행사에 참석한 이완구 전 총리와 자유한국당 당권 도전자들. 연합뉴스
이 전 총리는 ‘성완종 리스트’ 의혹으로 국무총리직을 사퇴한 뒤 공식 행보를 자제해 왔다. 그러나 2017년 12월 대법원에서 무죄 판결을 받고, 1년이 지난 시점에서 정치 행보를 재개했다. 4년 만의 첫 정치 행보는 바로 지난달 29일 충남 천안에서 열린 이 전 총리의 팬클럽 ‘완사모(이완구를 사랑하는 사람들의 모임)’의 10주년 기념 신년회였다.
이 행사에는 다수의 현역 의원들이 참석해 자리를 빛냈다. 당시 전당대회 출마를 선언한 후보자들과 충청권에 지역구를 둔 의원, 그리고 친박(친박근혜)계로 불리는 이들이 대거 참석했다. 현역 의원만 18명이 참석했다.
홍 의원도 9일 자신의 지역구인 충남 예산에서 의정보고회를 열고 자신의 세를 과시했다. 참석 인원은 약 1400명이었다. 마련된 장소에는 약 800개의 의자가 준비돼 있었는데, 이 좌석들이 모두 꽉 찼고 미처 자리에 앉지 못한 사람들은 의자 뒤편에 빼곡하게 서서 행사에 참석했다. 그마저도 자리를 잡지 못한 사람들은 마땅한 자리를 찾지 못하고 행사장 로비에 서성였다. 통상 몇백 명만 모이는 의정보고회와는 달랐다. 이 광경을 보고 참석자들 가운데 한 사람은 “홍문표 아직 안 죽었네”라고 말했다.
이날 자리에는 나경원 원내대표가 참석해 홍 의원에게 힘을 실어줬다. 나 원내대표는 “제가 전국 각지 의정보고회 참석 요청을 많이 받아왔는데, 직접 온 곳은 여기가 유일하다”라고 말했다. 이외에도 한국당 전당대회 출마를 선언한 인물들이 한둘씩 들어왔다. 최고위원으로 출마하는 조경태 의원과 정미경 전 의원, 그리고 당시 당 대표 출마를 선언한 안상수 의원도 참석했다. 더불어민주당을 탈당해 한국당으로 당적을 옮긴 조 의원은 “민주당도 이상한데, 한국당도 참 이상하더라. 어떻게 홍 의원을 당협위원장직에서 박탈시킬 수가 있냐”라고 성토했다.
지난 9일 충남 예산에서 열린 홍문표 자유한국당 의원의 의정보고회에 약 1400명의 인원이 몰렸다. 사진은 참석자들로 꽉찬 회의장 모습. 이수진 기자
이 전 총리는 ‘성완종 리스트’에 발목 잡혀 4년 동안 두문불출했고, 홍 의원은 홍성·예산 당협위원장직 박탈로 입지가 좁아진 듯 보였다. 그런 과정에서 열린 이 두 행사는 마치 세 과시용처럼 비쳤다. 21대 총선을 앞두고 자신들의 존재감을 드러내며 정치권을 향해 메시지를 보내는 모습이었다. 무엇보다 두 사람의 관계도를 미뤄봤을 때 이번 행사들은 마치 서로를 의식하며 영향력을 표출해낸 것 아니냐는 말들도 나왔다. 두 사람은 충청권에서 홍성·예산을 둘러싼 정치적 경쟁자다.
두 사람의 악연은 1996년 15대 총선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이 전 총리는 15대 총선에서 두각을 나타냈다. 당시 자민련이 대전과 충남을 ‘싹쓸이’했는데, 한나라당으로 출마한 이 전 총리가 당시 유일하게 홍성·청양에 깃발을 꽂았다. 이때 통합민주당 소속으로 출마한 홍 의원은 낙선했다. 16대 총선에서도 홍성·청양을 둘러싸고 두 사람은 대치했다. 홍 의원은 한나라당, 이 전 총리는 자민련 후보로 출마했고 이번에도 이 전 총리가 홍 의원을 누르고 당선됐다.
17대 총선에서는 선거구가 조정되며 이 전 총리의 지역구가 사라졌다. 홍성은 예산으로 붙어 홍성·예산이 됐고 청양은 부여에 붙어 청양·부여가 됐다. 홍성·예산에는 이미 홍 의원이 당협위원장으로 있었다. 결국, 이 전 총리는 총선보다는 지방선거를 준비했다. 그리고 17대 총선에서는 홍 의원이 홍성·예산 지역구를 차지했다. 4수 끝에 당선이었다. 당시 노무현 전 대통령 탄핵과 함께 열린우리당이 17대 총선에서 압승했는데, 한나라당은 충남·충북·대전에서 홍 의원 한 사람을 당선시켜 이목을 끌었다.
18대 총선에는 이회창 전 총리가 자유선진당으로 출마해 한나라당이던 홍 의원을 꺾고 당선됐다. 홍 의원은 이 공백기에 한국농어촌공사 사장을 지냈다. 건강상의 문제로 잠시 정치계에서 멀어졌던 이 전 총리는 2013년 재보궐선거에서 당선(충남 부여·청양)돼 다시 19대 국회로 돌아왔다. 그러나 이 전 총리는 ‘성완종 리스트’ 재판으로 20대 총선에 나오지 못했다.
이처럼 15대 총선 때부터 부딪혀온 두 사람의 운명이 지금까지 이어지고 있는 것 아니냐는 말도 나온다. 지난해 3월, 한국당 지도부는 6월 지방선거와 함께 치러진 재보궐 선거를 앞두고 천안갑 당협위원장에 길환영 전 KBS 사장을 임명했다. 전략공천이었다. 당 안팎에선 이 전 총리가 당협위원장으로 임명될 것으로 예상했으나, 뜻밖의 인물이 임명되자 의외라는 반응이 나왔다. 충남의 한 관계자는 “이 전 총리 입장에선 서운했을 수도 있겠더라. 그날 오전까지만 해도 이 전 총리가 임명될 거라고 하더니, 오후에 길 전 사장을 임명했더라”며 “19대 국회 때 이 전 총리가 홍 의원 예결위원장 시켜주려고 힘을 많이 썼다더라. 그래서 이 사건으로 이 전 총리는 홍 의원에 대해 서운함이 있을 것”이라고 밝혔다. 당시 지도부는 홍준표 대표와 홍문표 사무총장이었다.
홍성·예산(홍 의원 지역구)은 이 전 총리의 고향이며 대전 서을(박범계 더불어민주당 의원)은 이 전 총리가 충남경찰청장을 지내며 지역 기반을 다져온 곳이다. 그리고 천안갑은 이 전 총리의 부친이 사업을 해온 곳으로 인연이 깊다. 또한, 길환영 당협위원장이 위원장직을 사퇴해 현재 공석이 된 상태다. 세종(이해찬 민주당 대표)은 선거구가 분구돼 증설될 예정이다. 동시에 이 대표가 21대 총선 불출마를 선언하며 이 전 총리가 당선을 기대해볼 수 있는 곳이다.
이 전 총리는 21대 총선을 앞두고 네 곳을 고민 중이다. 이 전 총리는 기자와의 전화통화에서 “네 곳 모두 저와 인연이 있는 곳이다. 제가 홍성·예산으로 출마하지 않겠느냐는 말들이 꽤 나오는 것 같은데, 아무래도 제 고향이라 그런 말이 나오는 것 같다”며 “지역민들의 뜻에 따라 출마지를 선택할 것”이라고 밝혔다. 만약 홍성·예산으로 출마할 경우 이 전 총리와 홍 의원의 피할 수 없는 ‘리턴매치’가 이뤄질 것으로 보인다.
홍 의원 관계자는 “이전에야 경쟁자였지, 지금은 서로 나쁜 사이는 절대 아니다”라고 밝혔다. ‘당 지도부가 이 전 총리를 천안갑 당협위원장으로 임명하지 않은 것’에 대해선 “만약 두 사람이 경쟁자라면, 홍 의원은 자신의 지역구인 홍성·예산을 지키기 위해 오히려 이 전 총리를 천안갑 당협위원장에 임명하지 않겠느냐”라며 “홍 의원이 어떤 저의로 이 전 총리를 천안갑에 임명하지 않았다는 것은 말이 안 된다”라고 설명했다. 또한, “2013년 재보궐선거 때 홍 의원은 이 전 총리를 적극적으로 도와줬다. 당에서 이 전 총리의 건강상의 문제를 걱정했는데, 홍 의원이 직접 당 사무총장을 만나 ‘건강은 내가 보장한다’고 말하며 도와준 바 있다”고 했다.
홍 의원은 기자에게 “이 전 총리랑 사이가 나쁠 게 있나. 그건 다 옛날 이야기다. 지금은 사이 좋고 괜찮다. 그 분은 부여에서 자리를 잡았고, 저는 죽으나 사나 홍성·예산 떠나지 말고 여기서 죽어야지 않겠느냐”라고 밝혔다. ‘이 전 총리의 홍성·예산 출마 가능성’을 묻자 “그럴 리가 있겠냐. 상상도 못할 이야기”라고 답했다. 충남의 한 관계자는 “겉으로만 서로 사이 좋다고 하지, 속으로는 계속 의식하는 것 같더라”라고 밝혔다.
이수진 기자 sj109@ilyo.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