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약용 문화제’ 내달 20~21일 유적지·팔당유원지 등지서 개최
열수 정약용
1777년 정약용은 자신의 학문 형성에 큰 영향을 끼친 스승 성호 이익을 만난다. 정약용이 두 살 되던 해 성호가 세상을 떠나 직접 가르침을 받은 것은 아니지만 정약용은 성호의 글을 접하고 학문을 굳힌다. 1783년에는 진사시험에 합격해 성균관에 들어간 후 여러 시험을 통해 뛰어난 재능과 학문으로 정조의 총애를 받았다.
1789년엔 문과에 급제해 벼슬살이를 시작했다. 첫 벼슬인 희릉직장을 비롯해 사간원 정언, 사헌부 지평을 거쳤으며 이즈음 ‘성설’과 ‘기중도설’을 지어 수원성을 쌓는데 유형거와 거중기를 만들어 사용할 것을 건의, 많은 경비를 절약했다. 경기도 암행어사 시절엔 가난하고 핍박받는 백성들의 고통을 목격하고 연천 현감 김양직과 상양 군수 강명길의 폭정을 고발해 처벌했다. 이를 통해 정약용은 관리의 책임과 의무를 절실하게 깨달았다.
정조가 서거하고 순조가 즉위하면서 정약용은 생애 최대의 전환기를 맞는다. 노론과 남인 사이의 당쟁이 1801년 신유사옥이라는 천주교 탄압사건으로 비화하면서 정약용은 천주교인으로 지목받아 유배형을 받게 된다. 이때 본인은 포항 장기로, 둘째 형 약전은 신지도로 유배됐고 셋째 형 약종은 옥사했다. 9개월이 지난 후 황사영 백서사건이 발생하자 다시 서울로 불려와 조사를 받고 약전은 흑산도로 정약용은 강진으로 유배지를 옮긴다. 김훈의 소설 ‘흑산’은 이 시기 천주교 박해를 묘사한 소설이다. 강진에서의 유배 기간은 정약용에게 고통의 세월이었지만 학문적으로는 매우 알찬 결실을 얻은 수확기이기도 했다. 이 시기에 경세학과 경학에 대한 집중적인 연구가 이뤄졌으며 500여 권에 달하는 그의 저서 대부분이 유배지에서 저술됐다. 유배지에서도 정약용은 제자들을 모아 교육했고 제자들 또한 저술에 참여하기도 했다.
57세 되던 해 가을, 유배에서 풀려 고향으로 돌아온 정약용은 저술을 수정하고 보완하는 데 힘쓰며 자신의 학문과 생애를 정리했다. 미완으로 남아있던 목민심서를 완성했고 ‘흠흠신서’, ‘아언각비’ 등의 저작을 내놨다. 회갑을 맞이해서는 ‘자찬묘지명’을 지어 자신의 생애를 정리하고 북한강을 유람하며 여유있는 생활을 보내기도 했다. 이 시기는 유배지에서 쇠약해진 심신을 추스르며 자신의 생애와 학문을 정리한 기간이라고 할 수 있다.
정약용은 순탄하지 않은 생애 속에서도 나라와 백성이 편안한 이상적 사회로 재편되기를 바랐다. 그의 저작 목민심서는 조선 후기 백성들의 생활상을 생생하게 표현하며 병들고 죽어가는 백성들을 긴급히 구호한다는 취지로 쓰여 졌다.
정약용 생가
정약용의 고향 남양주시는 정약용이 강조한 목민관의 자세를 시정에 적용하고, 남양주를 정약용의 도시로 마케팅하려는 노력을 기울이고 있다. 남양주시립합창단은 최근 ‘뮤지컬 정약용’을 창작해 공연하기도 했다. 뮤지컬 정약용은 정약용의 일대기를 통해 목민관의 자세와 청렴, 백성을 사랑한 정약용 선생의 발자취를 담은 남양주시 창작 뮤지컬이다.
남양주시는 오는 4월 20~21일에는 팔당유원지, 정약용유적지, 유기농테마파크 등지에서 ‘정약용 문화제’를 개최한다. 지난해까지 ‘다산 문화제’였던 것을 올해부터 정약용 문화제로 이름을 바꾼 것이다. 그동안 정약용 선생의 호는 다산으로 알려져 왔지만 다산이란, 유배생활을 보낸 강진 지역 산의 지명으로, 정약용 선생은 ‘자찬묘지명’에서 자신을 열수라고 표현했다.
이번 ‘정약용 문화제’는 정약용 사색의 길 따라 걷기, 아트 커넬웨이 전시∙공연, 여유당음악회, 플리마켓, 정약용 토론대회 등의 프로그램이 준비됐다. 팔당유원지에서 정약용 생가까지 7km를 걷는 사색의 길 걷기는 정약용 선생의 발자취를 직접 느껴볼 수 있는 기회다.
김장수 기자 ilyo22@ilyo.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