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수 부상에도 ‘막말 논란’이 화제…한국식 불문율 된 ‘사구 후 사과’ 문화 명암
벤치클리어링까지 촉발 시킨 김태형 두산 감독의 ‘욕설 논란’은 KBO로부터 벌금 200만 원 징계를 받았다. 연합뉴스
[일요신문] KBO 리그에 사상 초유의 벤치클리어링이 일어나 야구계를 뜨겁게 달궜다. 양 팀 더그아웃의 선수들이 모두 그라운드로 쏟아져 나와 몸싸움을 벌이는 벤치클리어링은 일년에도 수 차례 벌어지는 장면이다. 주로 위협구 성격이 짙은 몸에 맞는 볼이 벤치클리어링의 발단이 된다. 공을 몸에 맞힌 투수와 몸에 맞은 타자가 감정적으로 대치하다 선수단 전체의 신경전으로 이어지기 마련이다.
하지만 이번엔 몸에 맞는 공으로 인한 갈등이 양 팀 사령탑 사이의 설전으로 번져 논란이 더 뜨거웠다. 4월 28일 잠실구장에서 열린 두산-롯데전. 두산이 9-2로 크게 앞선 8회말 2사 1, 2루서 롯데 오른손 투수 구승민의 공이 두산 타자 정수빈의 허리를 강타한 뒤였다. 안그래도 시즌 초반 골반 통증으로 고생했던 정수빈이 그대로 그라운드에 쓰러져 고통을 호소하자 선수를 걱정한 김태형 두산 감독이 직접 걸어 나왔다.
그 다음이 문제였다. 김 감독이 정수빈의 상태를 보러 달려온 공필성 롯데 수석코치와 투수 구승민을 향해 불만을 표시하는 장면이 TV 중계 화면에 잡혔다. 이 모습을 본 양상문 롯데 감독이 더그아웃을 박차고 나와 김 감독에게 향했고, 더그아웃으로 돌아가던 김 감독도 다시 방향을 바꿔 양 감독에게 맞섰다. 놀란 양 팀 선수들이 모두 홈플레이트 근처로 몰려나오면서 그라운드가 어수선해졌다.
#두 감독이 감정 싸움을 벌인 이유
다행히 코치들의 만류로 두 감독의 물리적 충돌은 벌어지지 않았다. 하지만 진짜 공방전은 경기가 끝난 뒤에 시작됐다. 김태형 감독은 구단을 통해 “7회 정병곤에 이어 8회 정수빈까지 상대 투수 공에 맞았던 상황이다. 선수를 보호하기 위해 공필성 코치에게 항의했다”고 했다. 양상문 감독은 “몸에 맞는 공은 경기 중에 일어날 수 있는 일이고, 구승민이 의도한 것도 아니다”며 “김태형 감독이 우리 코치와 선수에게 항의하기에 나도 ‘왜 우리 코치와 선수에게 불만을 표현하는가’라고 항의한 것이다. 아무리 화가 나도 감독이 다른 팀 선수에게 욕을 하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라며 불쾌한 감정을 드러냈다.
이 과정에서 롯데 홍보팀 관계자를 통해 “김태형 감독이 구승민에게 욕설 섞인 막말을 했다”는 얘기가 언론에 흘러 나왔다. 절반으로 나뉘어 설전을 펼치던 야구팬들은 삽시간에 김 감독에게 비난의 화살을 퍼붓기 시작했고, 여론은 롯데 편으로 돌아섰다.
하지만 김 감독은 “정수빈이 다치는 모습을 보고 감정이 격해져서 평소 친분이 있던 공필성 코치와 옆에 있던 주형광 롯데 투수코치에게는 심한 말을 했다. 감정 조절을 하지 못한 내 잘못”이라고 인정하면서도 “선수에게 직접 욕설을 하지는 않았다”고 부인했다. 이어 “경기 후 공 코치에게 전화해 ‘내가 말이 심했다. 선수가 부상을 당해서 흥분한 것 같다’고 사과했다”며 “양 감독님께도 전화를 드렸지만 받지 않으셔서, 일단 공 코치에게 ‘죄송하다고 전해달라’는 얘기만 해놓았다”고 했다. 양 감독은 이에 대해서도 “선수는 물론이고 상대 팀 수석코치에게도 욕은 하면 안 되는 것”이라며 “야구를 하면서 지켜야 할 도리가 있다”고 힘주어 말했다.
양상문 감독은 김 감독의 욕설 논란에 대해 “야구를 하면서 지켜야 할 도리가 있다”고 지적했다. 연합뉴스
KBO 리그 벌칙 내규 7조에는 ‘감독, 코치 또는 선수가 심판 판정 불복, 폭행, 폭언, 빈볼, 기타의 언행으로 구장 질서를 문란케 하면 유소년 야구 봉사활동, 제재금 300만 원 이하, 출장정지 30경기 이하 등으로 징계할 수 있다’고 명시돼 있다. 다만 경기 후 진실공방을 불러 일으켰던 김 감독의 욕설 부분과 관련해서는 “심판에게 문의한 결과 김 감독이 구승민을 향해 욕설을 한 것인지는 확인할 수 없다는 답변을 들었다”며 “TV 중계 화면만으로 김 감독이 구승민에게 정확하게 어떤 말을 했는지 파악하기란 불가능했다”고 덧붙였다.
#빈볼 논란의 희생자가 된 정수빈
김 감독과 양 감독의 설전에 가려졌을 뿐, 이번 사태에서 가장 큰 상처를 입은 사람은 바로 사구를 맞은 정수빈이다. 두산은 “정수빈이 경기 다음날 정형외과에서 전산화단층(CT) 촬영과 자기공명영상(MRI) 촬영을 거친 결과, 오른쪽 갈비뼈에 타박에 의한 골절이 확인됐다. 또 폐에 멍이 들고 혈액이 고이는 증상이 추가로 확인됐다”고 밝혔다. 또 “일주일 정도 절대 안정이 필요한 상황이다. 2주 뒤 재검진을 해 재활 기간과 복귀 시점을 확정할 수 있을 것 같다”고 덧붙였다. 부상 전까지 공수에서 맹활약하던 정수빈이 한 달 이상 결장해야 하는 상황에 놓였다. 김 감독의 욕설 논란에 비난을 쏟아내던 야구팬들의 화살은 다시 정수빈을 부상으로 몰아넣은 구승민에게 향했다.
구승민은 경기 직후 정수빈에게 연락해 “진심으로 미안하다”고 사과했다. 정수빈도 “경기 중 일어날 수 있는 일이니 신경 쓰지 말라”는 답변을 했다. 하지만 논란은 사그라지지 않았다. 일부에서 “오른손 투수인 구승민이 왼손 타자인 정수빈의 등쪽을 맞혔다는 점에서 고의성이 느껴진다”며 빈볼을 의심했기 때문이다.
롯데 마운드가 두산과의 주말 3연전에서 뭇매를 맞고 싹쓸이 패배를 눈앞에 둔 상황이었던 데다 정수빈의 검진 결과까지 공개되자 비난의 목소리는 더 커졌다. 양 감독이 “빈볼 의혹은 100% 오해다. 구승민이 그저 실투를 한 것뿐”이라며 “선수 본인도 고의성이 없었고, 나도 그런 지시를 한 적이 없다”고 해명했지만 소용 없었다. 결국 구승민은 그 다음 경기가 끝난 뒤 취재진의 관련 질문을 받자 “공 한 개가 얼마나 중요한지 새삼 깨닫게 된 계기가 됐다”며 “정말 일부러 한 게 아니다. 수빈이에게 너무 미안하다”고 울먹이기도 했다.
#한국식 불문율이 된 ‘사구 후 사과’
사실 몸에 맞는 볼은 야구에 몸쪽 승부가 존재하는 이상 그 누구도 막을 수 없는 요소다. 다만 공에 맞은 선수가 심한 부상을 당했을 때는 몸과 마음에 엄청난 상흔이 남게 된다. 대부분은 큰 부상으로 이어지지 않는다 해도, 프로 투수의 빠른 공에 맞은 타자의 육체적 고통은 일반인이 상상하기 어려운 수준이다. 따라서 최근 KBO 리그에선 ‘사구 후 사과’가 새로운 ‘한국식 불문율’로 자리잡고 있는 추세다. 실제로 지난해 말 10개 구단 감독자 회의에서 이와 관련한 논의가 진행되기도 했다. 한 감독은 “고의성이 없는 사구는 문제될 게 없지만, 서로 문제를 일으키지 않고 부상을 당하지 않는 게 가장 좋은 일 아니냐”며 “서로 (사구 이후) 최소한의 예의는 지키자는 데 감독들이 합의했다”고 귀띔했다.
4월 4일 인천 SK-롯데전에서 벌어진 롯데 민병헌의 사구 상황은 달라진 문화를 보여주는 대표적 사례다. 당시 맹활약하던 민병헌이 SK 투수 박민호의 직구에 손가락을 맞아 골절상을 입자 SK는 이례적으로 관련 보도자료를 내고 구단 차원의 유감 표명을 했다. “민병헌 선수가 박민호 선수의 몸쪽 공에 맞아 부상을 당한 점에 대해 유감의 뜻을 전한다. 조속한 시일 내에 부상이 완치되기 바란다”고 강조했다. 또 “박민호 선수가 경기 후 민병헌 선수에게 ‘몸에 맞는 공으로 심한 부상을 당하게 해 죄송하다. 빨리 완쾌해서 건강하게 복귀하기를 바란다’는 내용의 문자 메시지를 보냈다”며 “손차훈 단장과 염경엽 감독도 경기 후 이윤원 롯데 단장과 양상문 감독에게 각각 구단 핵심전력의 손실에 대한 유감과 빠른 쾌유를 바라는 뜻을 전했다”는 상황 설명까지 덧붙였다.
반대로 4월 14일 잠실구장에서 열린 ‘한 지붕 라이벌’ LG-두산전에서는 LG 투수 배재준이 두산 외국인 타자 호세 페르난데스의 팔꿈치 보호대를 맞히고도 사과를 하지 않았다가 비난 세례를 받았다. 공을 맞은 페르난데스가 베이스로 향하면서 한동안 마운드를 응시하자 배재준도 불쾌한 기색을 드러내며 맞섰기 때문이다. 일부 두산 선수들이 더그아웃 바로 앞까지 달려 나왔을 정도로 일촉즉발의 상황이었다. 경기 후 성난 두산팬들이 배재준의 개인 SNS를 찾아 항의 메시지를 쏟아냈고, 그는 “잘못을 했으니 비난받아 마땅하다 생각한다. 이런 일이 다시는 없도록 성숙해지겠다”는 사과문까지 남겨야 했다.
이뿐 아니다. 한국식 ‘인사’ 문화에 익숙하지 않은 외국인 투수들까지 이 문화에 동참하는 모양새다. 삼성 덱맥과이어는 4월 27일 대구 LG전에서 상대 타자 유강남의 왼팔 보호대를 공으로 맞힌 뒤 모자를 벗고 두 손을 모은 다음 허리를 숙여 인사했다. LG팬들은 “한국 문화를 잘 받아들이는, 기특한 용병”이라고 찬사를 보냈다. 하지만 이후 정작 야구 관계자들 사이에선 설왕설래가 오갔다. “고의성도 없고 타자가 다친 것도 아닌데, 과도한 사과는 오히려 불필요한 것 같다”는 목소리가 나오기 시작한 것이다.
투수 출신인 한 감독은 “내가 현역 시절에는 타자를 맞추고 그런 사과를 해본 적이 없다.그라운드에서는 서로가 경쟁자 아닌가. (평범한) 사구는 경기 중 일어날 수 있는 일”이라며 “기본적인 예의는 지키면 좋겠지만, 90도 인사까지 하는 건 바람직하지 않다고 본다. 경기장 밖에서 따뜻하게 대하면 된다”는 의견을 냈다. 타자 출신인 또 다른 감독도 “인사를 하는 게 나쁜 문화는 아니지만, 인사를 안 하는 선수에게 ‘나쁜 선수’라고 낙인을 찍는 건 바람직하지 않다”며 “특히 이런 문화에 익숙하지 않은 외국인 선수에게까지 ‘폴더 인사’를 강요하는 것은 무리라고 본다”고 했다.
실제로 많은 외국인 선수들이 “메이저리그에선 사구가 경기의 일부로 여겨질 뿐이다. 모자를 벗고 사과하는 문화는 없다”고 입을 모은다. 하지만 “경기 중 사과의 뜻을 전하는 것도 한국식 문화이고 표현 방식의 하나이니 그냥 우리도 그렇게 하면 된다”는 의견 역시 공통적이다. KBO 리그에서 뛰면서 굳이 특유의 문화를 배척할 의사는 없다는 뜻이다. 오히려 선배 타자에게는 고개 숙여 사과를 하고 후배 타자에게는 손만 들어 건성으로 의사 표시를 하는 둥 마는 둥 하는 일부 투수들이 더 문제라는 지적도 나온다. ‘찬물도 위아래가 있는’시대는 이미 지났다. 사구의 고통과 그라운드 위 예의범절에는 위아래가 없다.
배영은 일간스포츠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