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지난 21일 최태원 SK(주) 회장이 조사를 받기 위해 서울 지검에 출두하고 있다. | ||
이번 사건의 여파가 계속 번지고 있는 가운데 정·재계의 관심은 이번 사건이 터진 배경에 쏠리고 있다. 이와 관련해 현재 정·재계에서는 각종 루머와 억측들이 난무하고 있다.
공식적으로 알려진 이번 사건이 터진 배경은 SK증권과 JP모건의 이중거래.
이 같은 이중거래가 일어난 것은 1990년대 중반 SK증권이 JP모건을 끌여들여 동남아 투자에 나섰다가 손실을 입게 되면서 시작됐다. 나중에 JP모건이 SK를 상대로 손실보전을 요구했고, 소송 위기에 몰린 SK가 비공식적인 방법으로 보상해준 것이다.
이 내용은 외부에서 전혀 알지 못했다. SK와 JP모건 사이에 은밀하게 오간 일이었기 때문. 그러나 영원한 비밀은 없는 것일까.
둘 사이에 은밀하게 벌어진 이 일은 엉뚱한 곳에서 터졌다. 2002년 10월 중순 한 인터넷신문이 SK-JP모건의 이중거래 의혹을 입증하는 내부문건을 공개하면서 불거진 것이다.
당시 이 신문이 보도한 기사 내용은 “SK그룹이 지난 99년 JP모건과 체결한 주식옵션 계약서에 ‘이면거래’로 보이는 옵션계약 사실이 있어 혹시 ‘이중거래’가 아니겠느냐”는 것이었다.
이 신문은 특히 이 기사의 증거로 ‘내부문건’을 공개했다. 문건에는 “SK증권과의 투자손실 보상을 위해 JP모건이 매수한 SK그룹 계열사 주식을 계열사를 동원해 매입가보다 훨씬 비싼 가격으로 사준다”는 내용이 담겨 있었다.
나중에 드러난 사실이지만, 이 문건은 2002년 10월9일 OCMP(SK그룹 구조조정본부) 재무팀이 ‘JP모건 옵션 계약 대응’이라는 제목으로 작성한 네 장짜리의 내부 1급 기밀문서였다.
이 기사가 보도된 후 몇몇 신문에서 뒤늦게 내용파악에 나섰지만, 더이상 추적은 되지 않은 채 일시 잠잠해졌다. 사실 SK와 JP모건과의 사건도 2000년 초반에 일부 문제가 됐다가 그 후론 별 탈없이 세인들의 기억속에서 사라진 상태였다.
그러나 이 문건에 담긴 내용은 한달이나 더 지난 시점에 태풍의 눈으로 떠올랐다. 시민단체인 참여연대가 이 문건의 내용을 토대로 최태원 회장 등 SK그룹의 핵심 관계자들은 배임혐의로 고발했기 때문이었다.
참여연대의 고발은 3개월 뒤인 지난 2월17일 검찰의 전격적인 SK그룹 핵심 관계자와 부서에 대한 압수수색으로 이어졌고, 최태원 회장의 구속으로 사태가 확대됐던 것.
결국 SK그룹 사태는 한 인터넷신문이 폭로한 내부문건이 발단이었던 셈이다. 이번 사건의 핵은 바로 이 문건이라는 얘기. 사건을 걷잡을 수 없이 확대시킨 이 문건을 누가 만들었고, 누가 외부에 유출했느냐 하는 점이 SK그룹 사태의 전말을 밝혀주는 키인 것이다.
이 내부문건이 공개된 후 SK는 물론 업계 관계자들까지도 출처가 누구냐를 둘러싸고 갖가지 말들이 오갔다. 그도 그럴 것이 공개된 문건은 기업문건 중에서도 ‘1급 기밀’ 보고서인데다, 문건 열람 또는 보유 자격자도 극히 제한적이었기 때문.
다른 기업 관계자에 따르면 “그 정도의 극비사항이라면 임원급 중에서도 톱에 속하지 않으면 열람하기 조차 어려운 문건”이라는 것.
당연히 사건을 그룹총수의 구속으로까지 비화시킨 이 문건의 유출자가 이번 사건을 일으킨 핵심이라고 할 수 있는 것이다.
재계에서 오가는 이 문건의 유출자와 관련된 추측은 크게 두 가지. SK그룹 내부 직원이라는 설과 경쟁사 개입설이 그 것.
먼저 경쟁사 개입설은 SK그룹과 사이가 좋지 않은 것으로 알려져온 모그룹이 이 보고서를 극비리에 입수, 인터넷신문에 이를 제공한 것이 라는 얘기다. 그러나 정황상 이 같은 추측은 설득력이 없다는 게 재계 관계자들의 해석이다.
대다수 재계 관계자들은 유출자는 ‘내부인’이라는 데 의견이 일치하고 있다. 실제로 이 문건을 공개한 인터넷신문 기자는 “그룹 내부의 고위 관계자가 아니면 이 같은 문건을 접할 수는 없지 않겠느냐”고 말해 유출자의 신원을 간접 시사했다. 그는 또 “문건을 건네받은 이후 단 한 차례 제보자와 전화통화를 해 안부를 물었으나 별 일이 없다는 얘기를 들었다”고 말했다. 그러나 이 제보자는 당초 단순히 이중계약의 부당성을 알리고 싶었는데, 최 회장의 구속으로 이어져 매우 당황하고 있다고 이 기자는 전했다.
결국 여러 가지 상황을 종합해보면 유출자는 SK그룹 내 직원이 문건을 제공했다는 쪽으로 모아진다. 실제로 SK그룹은 문건 유출이 드러난 이후 내부 직원을 상대로 ‘색출작업’을 전개한 것으로 알려졌다. 문건 제공자는 퇴직한 임원이 아닌 현재까지 SK그룹에 몸담고 있는 임원일 것이라는 정도까지 유출자 범위가 축소된 것으로 전해졌다.
유출자 신원과 함께 관심의 초점은 ‘1급 극비문서’를 외부에 제공한 배경. 이 문건을 폭로했던 신문사 기자는 “(극비문건 제공자는) SK-JP 모건간의 거래가 뭔가 투명하지 못하고 비정상적이라고 생각하는 사람이었다”고 전했다. 문건을 제공한 사람은 단순히 회사의 부정한 거래에 대해 반대하는 ‘양심선언’ 차원에서 이 문건을 폭로했다는 것.
그러나 이 같은 설명도 폭로배경을 속시원하게 알기에는 부족한 부분이 있다. 당시 SK구조본에 의해 작성된 ‘SK-JP모건간의 이중계약 문건’은 구조본을 제외한 다른 계열사로는 전달되지 않았으며, 작성 이후 곧바로 그룹의 최고 수뇌부로 전달된 것이기 때문이었다.
또 다른 추측은 그룹의 조직에 강한 불만을 가진 사람이 유출했을 가능성이 높다는 것. 실제 SK그룹은 그동안 경영 내분설이 끊이지 않아왔다. 결국 이번 사건은 그룹의 ‘내분’이 발단이 돼 문서 유출이 있었고, 문서 유출이 언론과 시민단체에 의해 공개되면서 총수의 구속으로까지 사태가 비화됐다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