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JY’ ‘합병’ ‘VIP’ 단어 포함 문건 삭제 드러나…‘JY’ 겨눈 스모킹건
2017년 1월 구속영장 실질심사를 받기 위해 서울중앙지법에 들어선 이재용 삼성전자 부회장. 임준선 기자
하지만 지난해 11월 박용진 더불어민주당 의원이 삼성 내부문건들을 확보해 공개하면서 상황이 급박하게 돌아가기 시작했다. 박 의원이 공개한 문서에는 삼성바이오로직스 ‘바이오사업추진현황’, 삼성바이오로직스 ‘재경팀 주간 업무 현황’, 삼성바이오로직스 심 아무개 재경팀장과 삼성미래전략실 임 아무개 바이오담당 부장 간 대응방안 문건 발송 이메일, 바이오젠 콜옵션 평가이슈 등 회사 내부 사항이 담겨 있었다.
박 의원은 이 문건에 2015년 삼성물산과 제일모직 합병 과정에서 삼성바이오가 고의로 분식회계를 한 정황이 담겼다고 주장했다. 2015년 8월 5일 삼성 내부문서에 ‘자체평가액 3조 원과 시장평가액 평균 8조 원 이상의 괴리에 따른 시장 영향(합병비율의 적정성, 주가하락 등의 발생 예방)을 위해 안진회계법인과 인터뷰를 진행했다는 내용이 있다고 지적했다. 문서에는 또 삼성바이오 가치를 저평가하면 합병비율 이슈가 생기고, 합병비율 검토 보고서와 불일치해 사후 대응이 필요하다는 표현도 등장한다고 전했다.
박 의원은 “삼성 내부문서를 통해 드러난 것은 삼성물산과 삼성바이오로직스가 제일모직 주가의 적정성 확보를 위해 고의로 분식회계를 한 것”이라며 “이는 제일모직과 삼성물산 합병을 사후적으로 정당화하기 위한 것임을 확인하는 것”이라고 강조했다. 내부 문제로 봉합될 듯했던 삼성바이오 사태가 이재용 부회장의 경영권 승계 작업 이슈로 다시 옮겨 붙은 것이다.
이후 검찰 수사가 속도를 내기 시작했다. 서울중앙지검 특수2부(부장검사 송경호)는 삼성바이오 본사와 삼성바이오에피스, 회계법인, 한국거래소 등을 압수수색했다. 나아가 삼성물산과 삼성SDS, 삼성전자 사업지원TF까지 압수수색에 들어갔다. 관련자들에 대한 소환조사도 이어졌다.
이 과정에서 조직적인 증거 인멸의 정황이 속속 드러났다. 삼성바이오에피스의 팀장급 직원이 회사 공용서버를 빼돌려 자택에 숨겨놓고 있다가 발각됐다. 직원은 금융당국의 삼성바이오로직스 감리가 마무리된 지난해 5~6월쯤 회사 서버를 떼어내 자신의 집에 가져다놓은 것으로 전해진다. 이어 인천 송도 공장 마루 밑에서도 자료가 나왔다. 삼성바이오 측이 지난해 5~7월 송도 공장 바닥을 밑에 회사 서버와 노트북 등을 파묻은 것을 검찰이 발견했다.
삼성전자 사업지원TF의 백 아무개 상무 등이 검찰 수사에 대비해 삼성바이오에피스 사장을 비롯한 임직원들의 컴퓨터와 스마트폰 등을 뒤져 ‘JY(이재용)’, ‘합병’, ‘VIP(박근혜 전 대통령)’ 등의 단어가 들어간 문건과 보고서 등을 찾아내 삭제한 사실이 드러나기도 했다.
윗선 개입에 대한 증거와 진술들도 나오기 시작했다. 삼성바이오 외부감사를 맡은 삼정KPMG 소속 회계사들이 검찰 조사 과정에서 “콜옵션 계약서를 받은 적 없으며 삼성 쪽 요구로 거짓말을 했다”고 진술했다. 앞서 이들은 “콜옵션 계약서를 받았지만, 검토한 결과 회계장부에 반영할 필요가 없다고 봤다”며 삼성바이오 측 입장을 그대로 따른 바 있다. 앞서 백 상무도 구속 전까지는 ‘윗선’의 존재를 부인했지만, 구속 뒤 검찰에서 ‘윗선의 지시’를 인정하는 쪽으로 진술을 번복한 것으로 전해진다.
김태한 삼성바이오로직스 대표이사. 연합뉴스
이재용 부회장의 최측근으로 알려진 정현호 삼성전자 사업지원TF 사장에 대한 검찰 소환도 임박했다는 말이 나오고 있다. 정 사장까지 검찰 조사를 받는다면 남은 ‘윗선’은 이재용 부회장밖에 없다.
박용진 의원은 지난 7일 국회 기자회견에서 “모든 범죄행위들이 가리키는 것은 단 하나, 이재용 부회장의 경영권 승계 작업”이라며 “대한민국 사법 정의가 바로 서려면 이재용 부회장에 대한 대법원 전원합의체 판결을 서둘러서는 안 된다. 적어도 삼바의 회계사기 사건의 수사 결과 발표 이후에 판결을 내려야 할 것”이라고 강조했다.
재계 관계자는 “삼성바이오 분식회계 논란이 처음 불거졌을 때는 어려운 용어도 많고, 사건이 복잡해 대중의 관심이 덜했지만 검찰 수사 과정에서 이재용 부회장 승계 작업과 증거 인멸 혐의가 강조되면서 사건이 국민들의 주목도 끌고 명확해졌다”며 “스모킹건이 될 수 있는 증거와 증언들이 너무 많이 발견됐으며 모든 것이 윗선을 가리키고 있는 것 같다. 이재용 부회장에겐 최순실-박근혜 국정농단 사건 이후 또 한 번 고비가 될 것”이라고 말했다.
민웅기 기자 minwg08@ilyo.co.kr
이건희에 이학수 있듯 이재용에 정현호 있다 아버지 이건희 삼성전자 회장에게는 이학수 전 부회장, 최지성 전 부회장 등 측근이 여러 명 있었다. 이들은 이건희 회장을 보좌하며 과거 편법증여, 삼성 X파일 사건 등과 관련해 검찰 조사를 함께 받기도 했다. 정현호 삼성전자 사업지원TF 사장(왼쪽)과 이상훈 삼성전자 이사회 의장. 연합뉴스, 임준선 기자 아들 이재용 삼성전자 부회장에게는 정현호 삼성전자 사업지원TF 사장이 있다. 정 사장은 1983년 삼성전자에 입사해 1988~1993년 삼성그룹 비서실, 2003~2007년 전략기획실, 2011~2014년 미래전략실 등을 거치며, 주로 그룹 컨트롤타워에서 근무했으며 ‘이재용의 복심’이라고 알려져 있다. 정 사장과 이재용 부회장의 인연은 20년이 넘었다. 1990년대 중반 정 사장은 삼성전자를 다니다 미국 하버드대로 유학을 떠나 MBA 과정을 밟는다. 이어 이재용 부회장도 1995년 게이오기주쿠대 경영대학원을 졸업하고, 하버드대 경영대학원으로 가 MBA 과정에 들어갔다. 함께 공부한 이 때부터 두 사람은 가까워진 것으로 알려졌으며 정 사장은 이재용 부회장 체제의 삼성에서 핵심역할을 할 인물로 거론됐다. 현재 정 사장의 검찰 소환 조사 가능성이 높게 점쳐지고 있다. 삼성바이오 분식회계 의혹을 수사 중인 서울중앙지검 특수2부(부장검사 송경호)의 칼날이 윗선을 향하고 있는데, 정 사장이 수사선상에 오른 것. 정 사장까지 검찰 조사를 받는다면 그 다음은 이재용 부회장밖에 없다. 정 사장과 함께 이재용 부회장의 측근으로 거론되는 인물은 이상훈 삼성전자 이사회 의장이다. 이 의장 역시 비서실과 구조조정본부, 전략기획실, 미래전략실 등을 거쳤다. 이 의장은 이미 검찰에 출석한 바 있다. 지난해 삼성전자서비스 노조와해 공작 논란이 불거졌을 때 보고를 받고 지시를 내린 혐의로 검찰의 소환 조사를 받았다. 검찰은 이 의장에 대해 구속영장을 신청했으나 법원은 이를 기각했다. 민웅기 기자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