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렬함 그 이상의 스토리…감히 눈을 돌릴 곳이 없다
영화 ‘기생충’ 포스터. 사진=CJ엔터테인먼트 제공
삶은 멀리서 보면 희극, 가까이서 보면 비극이라고 했다. 영화 ‘기생충’은 거대한 스크린을 통해서는 알기 힘든 아주 사적이고 내밀한 부분까지 끈질기다 싶을 정도로 따라 붙는다.
이로써 익살스러운 대사와 배우들의 다소 과장된 연기는 카메라 렌즈를 통해 낱낱이 해부된다. 극이 끝나고 나서까지 한참동안 극장에 앉을 수밖에 없는 것은 아마 그 해부의 후유증때문일 것이다.
28일 오후 서울 용산 CGV에서 열린 영화 ‘기생충’의 시사회에서 봉준호 감독은 “이 영화는 사회적, 경제적으로 부자와 가난한 자들을 학술적으로 분석하는 영화는 아니다”라면서도 “풍부한 희로애락을 가진 배우들이 투영한 인간의 모습을 뿜어내는 것, 부와 가난 그 자체보다도 서로에 대한 예의와 인간의 존엄을 건드리고 있는 이야기롤 보여주고 싶었다”고 설명했다.
28일 오후 서울 용산 CGV에서 영화 ‘기생충’ 언론배급시사회가 열렸다. 좌측부터 최우식, 박소담, 장혜진, 조여정, 이선균, 송강호. 사진=박정훈 기자
영화 제목인 ‘기생충’도 봉준호 감독의 그러한 목적에서 기인했다. 인간의 존엄, 인간에 대한 예의를 어느 정도까지 지킬 수 있느냐. 그 차이를 통해 영화 속 기택(송강호 분) 가족의 삶이 기생이 될 지, 공생이나 상생이 될 지를 결정짓는다는 것이다.
‘기생’을 하면서 상생과 공생이라고 자위하는 기택의 가족과 그들의 숙주가 되는 박 사장(이선균 분)의 가족은 섞일 듯하면서도 철저하게 분리된다. 선을 넘을 듯하다가도 다시 각자의 ‘본분’과 ‘신분’을 깨닫게 되기 때문이다. 그것은 자의로도, 타의로도 동시에 이뤄진다.
봉준호 감독은 ‘가족’이라는 소재에 대해 “소재를 선택했다라기 보다는 태초의 출발점”이라고 설명했다. 그는 “한강에 괴물이 있었고, 열차가 눈 속을 달리듯이 이 이야기의 출발점은 가족이었다”라며 “가족은 우리 삶을 이루는 가장 기본적인 단위인데도 모두 다르지 않나. 2013년 ‘설국열차’처럼 부자와 가난한 자의 이야기지만 좀 더 내 주변의 일상과 우리 현실에 가까우면서 사회 기본 단위인 가족을 중심으로 펼쳐보면 어떨까 생각해서 이야기를 발전시켰다”고 설명했다.
영화 ‘기생충’ 기자간담회에서 봉준호 감독이 기자들의 질문에 답변하고 있다. 사진=박정훈 기자
기택 역의 송강호는 “‘기생충’은 장르 영화의 어떤 틀을 갖추고 있으면서도 다양한 장르가 혼합돼 있다”라며 “그런 변주된 느낌들이 모두에게 아마 처음처럼 느껴졌기 때문에 낯설음이나 두려움 같은 게 있었다”라고 말했다.
그러면서 “그런 것을 어떻게 관객들에게 설득력 있게, 현실감 있게 전달할 것인가 라는 측면을 많이 고민했다”라며 “이를 통해 두려움을 많이 상쇄하고 배우들끼리 가족 단위로, 가족과의 앙상블이나 이런 것을 통해 아주 자연스럽게 체득하면서 연기할 수 있었던 것 같다”고 덧붙였다.
영화 ‘기생충’ 기자간담회에서 배우 송강호가 기자들의 질문에 답변하고 있다. 사진=박정훈 기자
기택의 처이자 ‘전원 백수’ 가족의 어머니 충숙 역의 장혜진은 이날 연기 이야기를 하던 중 벅찬 감정을 주체하지 못해 눈물을 보이기도 했다.
장혜진은 “사실 이렇게 큰 작품에, 큰 역할을 한 게 처음이라 과연 제가 이 긴 호흡을 끌고 갈 수 있을까 많이 걱정을 했었다”면서도 “감독님과 함께한 배우들이 마음을 추스를 수 있게 좋은 말씀을 많이 해주셔서 한 장면, 한 장면이 소중하지 않고 신나지 않은 장면이 없었다”며 눈물을 훔쳤다. 카메라 플래시 세례가 이어지자 곧바로 “저는 절대 울지 않을 거다, 안 울었다. 절대 우는 장면을 찍으시면 안 된다”고 말해 취재진은 물론 함께 한 배우들의 웃음을 자아내기도 했다.
영화 ‘기생충’ 기자간담회에서 배우 박소담과 장혜진이 기자들의 질문에 답변하고 있다. 사진=박정훈 기자
기생을 위한 ‘전초기지’를 만들어낸 아들 기우 역의 최우식과 딸 기정 역의 박소담은 극중에서 결코 선배 배우들의 빛에 가려지거나 밀리지 않는다. 특히 ‘기생충’과 ‘숙주’ 사이의 가교가 되는 기우는 기택 이상의 존재감을 자랑한다.
그 덕에 최우식은 본의 아니게 자신의 비중을 어필했다가 지난 ‘기생충’ 제작발표회에 이은 또 한 번의 ‘최우식 몰기’에 당하기도 했다. 이날 기자간담회에서 최우식은 “제작발표회 때 제가 말실수를, 분량 자랑을 해 버렸다”라며 “사실 저희 첫 촬영 현장은 제게도 큰 부담이 될 수 있었다. 아버지는 송강호 배우님이고 봉준호 감독님도 계신데 제가 비중이…(컸다)”고 언급했다가 봉준호 감독과 송강호 배우를 폭소하게 했다. 이날 봉준호 감독은 최우식이 당황할 때마다 스마트폰을 꺼내 직접 촬영에 나서 감독은 배우를 찍고, 취재진은 그런 감독을 찍는 진풍경(?)을 연출하기도 했다.
영화 ‘기생충’ 기자간담회에서 배우 최우식이 기자들의 질문에 답변하고 있다. 사진=박정훈 기자
이들에게 기생당하는 ‘숙주 가족’ 박 사장 역의 이선균과 그의 부인 연교 역의 조여정은 “아직도 떨리는 마음이다”라며 영화 촬영과 칸 영화제의 여운을 즐기는 모습을 보였다.
이선균은 “제가 극중에서 굉장한 부자로 나와서 부담이 됐다”라면서도 “제가 너무나도 존경하는 감독님과 선배님과 연기하던 첫날, 신인으로 돌아갔다는 생각이 들 만큼 기분 좋은 떨림이 있었다”고 말했다. 그는 칸 영화제 당시 라이브 방송으로 수상을 확인했다고 했다. 아침까지 잠들지 못하고 혼자 맥주 두 캔을 마시며 자축했다는 말도 덧붙였다.
영화 ‘기생충’ 기자간담회 현장. 배우 송강호와 이선균. 사진=박정훈 기자
영화 ‘기생충’의 특징은 극중 배경이 단 두 곳으로 한정돼 있다는 점이다. 기택의 집과 박 사장의 집이다. 그 가운데서도 대부분의 사건은 박 사장의 집에서 벌어진다. 봉 감독은 “제 영화 중에서 공간의 숫자가 제일 적은 작품”이라고 ‘기생충’을 소개했다.
그러면서 그는 “그 공간 안에서 미시적이고 세밀하면서도 다채롭게 보여야 했다. 특히 부잣집에서 가장 많은 사건이 벌어지다 보니 인물들의 동선이 아주 교묘하게 엮여 있어야 했다. 이런 부분을 시나리오 단계에서 이미 다 구상해 미술팀에 넘겼다”라고 설명했다.
재미있는 것은 극중 공간이 모두 완벽하게 만들어진 세트장이라는 점이다. 봉 감독은 “세트장이라는 사실을 (칸 영화제) 심사위원들도 전혀 눈치 채지 못했다. 심사위원장은 제게 ‘집 어디서 찾았나, 잘 골랐다’고 묻기도 했다”며 “세트장인 걸 모르고 다들 질문해 주셔서 짜릿한 쾌감까지 느껴졌다”고 말했다. 실제로 흥분을 감추지 못한 봉 감독은 이 대답을 하다가 스포일러를 하는 바람에 당황하는 모습을 보이기도 했다.
영화 ‘기생충’ 기자간담회에서 배우 조여정이 기자들의 질문에 답변하고 있다. 사진=박정훈 기자
한국 영화 최초로 칸 영화제 황금종려상을 수상한 ‘기생충’에는 당분간 스포트라이트가 계속해서 쏟아질 수밖에 없다. 어깨가 무거울 수도, 콧대가 높아질 수도 있는 일이다.
그러나 봉 감독은 이에 대해 “칸은 벌써 과거가 됐다. 이제는 한국 관객들을 만나는 때”라며 “사실 한 분, 한 분의 생생한 소감이나 영화와의 만남이 너무나 궁금하다. 틈이 나면 관객 분들이 영화를 즐기는 그 틈바구니에 몰래 가벼운 분장을 하고 들어가서 그분들이 영화 이야기를 하시는지, 어떤 느낌으로 보시는지 느껴보고 싶다”는 소박한 소망을 밝혀 부담감에 대한 우려를 불식시켰다.
“잘 찍혔구만” 송강호와 최우식을 찍고 흐뭇하게 확인하고 있는 봉준호 감독. 사진=박정훈 기자
한편, 영화 ‘기생충’은 전원백수로 살고 있는 기택(송강호 분)의 가족이 장남 기우(최우식 분)의 부잣집 고액 과외자리를 통해 박 사장(이선균 분), 연교(조여정 분) 가족과 관계를 맺으면서 벌어지는 ‘가족희비극’을 그렸다. 중반부부터 몰아치는 ‘봉준호 표’의 강렬한 스토리 전개는 단 한 순간도 눈을 뗄 수 없게 한다.
봉 감독은 “별다른 메타포를 촘촘히 숨기려는 노력을 하지 않았다”고 하지만 모든 씬의 모든 장치들은 여러 가지 해석을 가능하게 한다. 마지막 스태프 롤에서 울리는 최우식의 노래를 포함해서 말이다. 131분, 15세 이상 관람가. 30일 개봉
김태원 기자 deja@ilyo.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