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웃 상인들 재산 들고 잠적한 계주…하루 아침에 깨진 11년 우정
정 씨는 믿음직한 계주였다. 동시에 수익성 좋은 투자 상품을 소개하는 브로커이기도 했다. 정 씨에게 돈을 맡기면 높은 이자를 받을 수 있었다. 100만 원을 투자하면 매달 5만 원의 이자가 돌아왔다. 정 씨는 토박이는 아니었지만 한 동네에서 10년 넘게 장사를 해온 덕에 상인들로부터 믿을 만한 사람이라는 평가를 받고 있었다.
28일 정 씨의 가게는 닫혀 있었다. 사진 = 최희주 기자
돈독했던 신뢰 관계는 하루 아침에 깨졌다. 몇 차례나 곗돈과 이자 지급을 미루던 정 씨가 5월 24일 돌연 자취를 감춘 것. 곗돈은 이미 지난해부터 제 때 나오지 않았던 상황이었다. 이튿날 정 씨의 도주 소식을 들은 상인들이 그의 옷 가게 앞에 구름처럼 모여들었지만 가게 문은 이미 굳게 닫혀 있었다.
‘일요신문’은 5월 28일 피해자들을 직접 만났다. 피해자들은 황당함을 감추지 못했다. 한 동네에서 동고동락하던 사이였기에 배신감은 더욱 컸다. 피해자 대표로 나선 A 씨는 “나도 시장에서 장사를 하는 부모님의 권유로 2015년 정 씨를 처음 알게 됐다. 피해자 대부분이 시장 상인이거나 상인들의 가족”이라고 말했다. A 씨가 주장하는 피해금액은 4억 원, 그의 부모님도 2억 원에 가까운 돈을 잃었다고 했다. 피해 금액은 최소 4000만 원부터 최대 15억 원까지 다양했다.
어떻게 이렇게 많은 돈을 받아낼 수 있었을까. 수법은 간단했다. 신뢰감을 주는 것. B 씨에 따르면 정 씨는 최근 1년을 제외하고는 지난 10년간 돈으로 큰 문제를 일으킨 적이 없었다. 곗돈이 몇 차례 밀린 적은 있어도 시장 상인들이 돌아 설 만큼의 문제는 없었다. 시장 내 정 씨의 평판은 좋은 편이었다.
정 씨는 여러 개의 계를 동시에 열거나 계원을 많이 모으는 방법으로 신용을 높였다. 피해자들은 동시에 5~6개의 계주 역할을 해내는 정 씨를 믿었다. 피해자들의 증언을 종합해보면 정 씨가 도주 직전까지 진행한 계만 6개였다. 대부분 2000만~3000만 원짜리였던 점을 감안하면 매달 정 씨가 만지는 돈은 억 단위였던 셈이다.
정 씨가 피해자들에게 나눠 준 계표에는 가짜 계원이 끼어 있었다. 사진=최희주 기자
그런데 ‘일요신문’이 계표를 입수해 확인해본 결과 정 씨가 작성한 계표는 가짜였다. 계를 열기 위해 가상의 인물을 계표에 올렸다. 익명 처리된 계원도 다수였다. 계원들이 이에 대해 물으면 정 씨는 “계를 들었다는 사실을 알리고 싶어 하지 않은 계원이 있다”고 답했다. 그러나 사건이 터진 현재까지도 익명의 계원들은 나타나지 않고 있다.
정 씨는 계에 들지 않은 사람을 계원으로 올리기도 했다. 2018년 11월에 시작해 2020년 7월 끝나는 계표에는 A 씨의 이름이 적혀있었다. 그러나 A 씨는 그 계에 든 적이 없었다. 그는 “엉뚱한 계표에 내 이름이 올라가 있더라. 전혀 몰랐던 사실이다. 모든 계표가 이런 식으로 쓰였을 가능성이 크다”고 말했다.
판이 커지다 보니 곗돈 지급도 점점 밀렸다. 그럴 때마다 정 씨는 “한꺼번에 돈을 줄 테니 조금만 기다려 달라” “가장 마지막 순번의 사람은 받아가는 돈이 크다. 다음 계를 열면 마지막 순번을 주겠다”는 등의 말로 계원들을 안심시켰다.
더 큰 문제는 피해자 가운데 다수가 노인이라는 점이다. 이들에게 정 씨는 노후 자금 마련의 통로였다. 또 다른 피해자 B 씨는 “큰 돈을 잃은 사람은 대개 시장 어르신들이다”라며 “은행은 멀고 사람은 가까웠다. 노인들은 적금 같은 것은 잘 모른다. 말년에 자식에게 기대지 않으려던 결과가 이렇게 됐다. 혹시 자식에게 알려질까 신고도 못 하는 노인들도 많다”고 말했다.
일부 피해자들은 5월 27일 정 씨를 경찰에 신고했다. 이들은 정 씨에게 입은 피해 금액이 100억 원에 달할 것이라고 주장했다. 피해자 대표 A 씨는 “25일 정 씨 도주 이후 대책회의를 열었다. 계원이 25명인 계가 최소 6개다. 가짜 계원을 제외하면 약 100명의 피해자가 있을 것으로 예상한다. 여기에 각종 투자금과 빌려간 돈까지 합치면 피해 금액은 100억 원에 달한다”고 말했다.
그러나 정확한 피해 금액을 추산하는 것은 다소 어려울 것으로 보인다. 정 씨가 주로 현금을 받아온 까닭이다. 이에 신고를 하고도 경찰에 거래 내역서를 제출하지 못한 피해자도 여럿이다. 정 씨와 현금 거래를 해 왔다는 한 피해자는 “거동이 불편한 상황이라 정 씨가 직접 돈을 받으러 왔고 대부분 현금을 줬다. 반면에 곗돈이나 이자는 계좌로 들어왔다. 경찰서에서 거래 내역을 제출하라고 해서 보니 서류상으로는 되레 내가 받은 돈이 더 많아 황당했다”고 말했다.
한편 세종경찰서는 피해자들의 신고 내용을 바탕으로 해당 사건을 조사 중이다.
최희주 기자 hjoo@ilyo.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