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권 화폐란 1993년 8월 금융실명제가 실시되기 이전에 발행된, 은색 점선이 없는 1만원권 지폐를 말한다. 과거 정권이 사용하다가 남은 통치자금이라는 의미로 쓰이기도 한다. ‘시중에 떠도는 무더기 구권은 없다’는 것은 이제 상식이다.
그런데 김대중 대통령 시절 청와대가 구권에 상당한 관심을 가졌었다면 믿어질까. 설마 하는 사람도 있겠지만 이것은 분명한 사실이다. ‘청와대의 구권 프로젝트’ 중심에는 김대중 대통령의 측근 인사였던 L씨가 있었다.
김씨는 L씨를 찾아왔을 때 국가에 도움이 될 수 있는 사람들이라며 몇몇 인사를 소개했다. 구권 화폐가 정말로 존재한다고 생각했던 김씨는 잘하면 나라에 도움이 되겠다는 순수한 생각에서 평소 친분이 두터우며 정권 핵심부와 연결되어 있던 L씨를 찾아온 것이다.
하지만 김씨가 소개한 이들은 사실 구권 화폐 사기단이었다. 그러나 L씨는 다른 사람도 아닌 김씨가 소개한 사람들이었던 만큼 이들을 철석같이 믿었다.
이처럼 구권 화폐 사기단은 진짜 사기꾼은 뒤에 숨고 중간책을 내세우는 경우가 많다. 구권 화폐 사기 사건 피해자들 가운데는 이들 ‘믿을 만한’ 중간책을 보고 돈을 내주거나 사건에 연루되는 경우가 드물지 않다. 이들 중간책 가운데는 사기꾼도 있지만 김씨처럼 실제로 구권이 있다고 믿는 사람도 많다.
김씨라는 믿을 만한 중간책에 더해 구권 화폐 사기단이 보여준 능란한 처신도 L씨의 마음을 사로잡았다. 자신들의 주민등록등본과 인감증명서를 보여주며 신분에 문제가 없다고 주장했다. 항상 깨끗한 정장 차림에 최고급 승용차를 타고 다녔고, 예절 또한 정중해 믿음을 주었다. 매번 올 때마다 보안 때문이라며 사람이 바뀌었다.
이들은 자신들이 실제로 구권을 갖고 있다는 것을 보여주기 위해 스포츠 신문 최신호를 돈더미 앞에 붙여놓고 찍은 사진을 가져와 보여주기도 했다. 혹 합성 사진이 아닌가 하는 생각에 L씨가 확인을 해보았지만 합성된 사진은 아니었다고 한다. 이런 과정에서 L씨도 점점 구권 화폐가 실제로 존재한다는 생각을 갖게 되었다.
이들이 내세운 논리도 L씨의 귀를 솔깃하게 했다.
“한나라당 이회창 총재가 정권을 잡으면 법대로 할 것이다. 구권 화폐를 양성화할 수가 없다. 그렇기 때문에 반드시 김대중 정권에서 양성화해야 한다. 양성화해준다면 반은 국가에 세금으로 내겠다. 그래도 엄청난 금액이 남는다. 이 돈 또한 개인적으로 쓰지 않고 사회간접자본 시설을 만들거나 어려운 상황에 있는 중소기업들을 돕는 데 쓰겠다. 우리 조직이 보기보다 막강하다. 구권의 양성화를 도와준다면 정권을 재창출할 수 있도록 우리가 열심히 돕겠다.”
이들은 L씨에게 수십조원에 달하는 구권의 주인은 3공화국 때부터 정권을 주물러온 실세들이라고 설명했다.
이들이 구권을 가져오겠다며 구체적인 움직임을 보인 일은 L씨로 하여금 이들을 더욱 신뢰하게 했다. 구권을 가져온다고 해 L씨가 늦은 밤에 한 은행 지점에 은행 부행장 한 명과 지점장 등을 대기시킨 적이 있는데 그 지점 차장이 ‘부정한 돈은 절대 받을 수 없다’며 강력하게 버티는 바람에 입금이 좌절되었던 것. 사기꾼들은 돈을 싣고 오다가 소식을 듣고 차를 돌렸다며 L씨를 압박했다. 물론 다 거짓말이었다.
그러나 이런 일들을 겪으며 구권이 있다고 확신하게 된 L씨는 청와대 최고위층에 이를 보고했다. 청와대도 관심을 보였다. 이 과정에서 청와대측 인사는 구권 화폐 사기단에게 확인서까지 써주었다. ‘실제로 구권이 있다는 것이 확인되면 양성화를 돕겠다’는 내용이었다.
이후 L씨는 눈으로 구권을 확인하기 위해 자신이 갖고 다니는 가방에 항상 검은색 눈가리개를 넣어 가지고 다녔다. 구권 화폐 사기단이 허락한다면 언제라도 ‘현장’에 출동하기 위해서였다. 현장에 도착할 때까지 눈가리개를 해도 좋으니 구권을 눈으로 확인하게만 해달라는 것이었다. 하지만 이들은 이런 저런 핑계를 대며 현장을 보여주지 않았다.
청와대 최고위층까지 큰 관심을 보였던 구권은 결국 세상에 나타나지 않았다. 아니 나타날 수가 없었다. 애초부터 없었기 때문이다. L씨가 구권 화폐 사기단 인사를 마지막으로 만난 것은 2003년 초였다. 그들은 ‘당분간 산사에 갈 일이 생겼다’는 말만 남기고 사라졌다. 이때까지도 L씨는 구권의 존재를 확신했다. “잠겨있는 돈이 확실히 있으며 그들은 언젠가 다시 나타난다”는 것이다.
그러나 구권 화폐 사기단이 사라진 시기는 서울지검에서 대대적으로 구권 화폐 사기 사건과 관련되어 있는 조직원들을 검거하던 시점과 맞아떨어진다. 청와대측에서 써준 확인서를 갖고 있던 인사도 구권 화폐 사기 사건에 연루되어 구속되었다. 얼마 뒤 L씨 또한 한 사건에 연루되어 활동이 부자유스런 신세가 되었다. 이러면서 ‘청와대의 구권 프로젝트’는 영원히 산산조각 났다.
‘DJ 청와대’가 구권 화폐의 양성화라는 상식적으로 납득이 안가는 일에 관심을 보였던 이유는 무엇일까.
일각에서는 ‘대박 심리’라는 말로 표현한다. 엄청난 노다지가 묻혀 있다는 생각에서 진도 앞바다 보물 발굴 작업을 정권 실세들이 지원했던 것과 같은 맥락이라는 것이다. “보물이 나오면 통일비용으로 상당액을 내놓겠다”던 ‘보물 사기꾼들’에게 속았던 것처럼 구권 화폐를 양성화하면 국가 경제에 상당한 기여를 할 수 있다는 구권 화폐 사기단의 논리에 정권 핵심 인사들이 현혹되었다는 것이다.
한마디로 해프닝이라고 표현할 수 있는 ‘청와대의 구권 프로젝트’는 DJ 정권 일부 핵심 인사들의 ‘한탕심리’를 보여주는 전형적인 사건이라고 볼 수 있다.
민영서 언론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