재판 기피 신청하고 검찰 증거 전면 부인… 판사 내부 “왜 한 명도 책임지지 않나” 비판도
사법행정권 남용 의혹으로 구속 기소된 양승태 전 대법원장과 임종헌 전 법원행정처 차장의 재판 전략을 놓고, 법원 내 의견이 분분하다. 두 거물 법조인 측은 “검찰이 (공소장에) 소설을 썼다”며 검찰 수사 및 재판 진행에 반발하고 있다. 그러다보니 자연스레 재판은 지연되고 있고, 구속 만기도 다가오면서 형집행정지(석방)를 노렸다는 분석이 나온다.
남은 증인 심문 규모가 100여 명이 훌쩍 넘는 탓에, 구속 만기 전에 재판을 다 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자연스레 ‘석방’ 후 천천히 재판을 진행하고 1심 결론은 내년 총선 전후로 날 가능성이 거론된다. 무리한 검찰 수사에 대한 반발은 여전히 법원 내에 남아 있지만, 이렇게 재판 거부 전략을 택한 두 거물 법조인을 향한 불편한 시각도 확대되고 있다. 특히 “아무도 잘못을 인정하지 않는다”는 것에 대해서는 많은 법조인이 “실망스럽다”고 얘기하고 있다.
임종헌 전 법원행정처 차장. 박정훈 기자
# 임종헌 재판 6개월 진행률 15% 내외
핵심 피고인인 임종헌 전 행정처 차장의 재판이 시작된 것은 6개월 전인 지난해 12월 10일. 하지만 아직 재판 진행률이 15%도 채 안 된다. 임 전 차장이 검찰 조사 내용을 모조리 부인했기 때문에 어쩔 수 없이 검찰이 조사한 증인 200여 명을 다시 다 법정으로 불러 확인해야 하는데, 200여 명의 증인 중 지금까지 법정에 나온 것은 29명뿐이다.
재판이 시작된 지 반년이 지났지만 강제 징용 재판에 개입한 혐의 말고는 진행된 내용이 없을 정도. 지난 1월에는 불만을 제기하면서 변호인 11명이 한꺼번에 그만둬 재판이 잠시 멈췄고, 최근에는 ‘재판장이 공정하지 않다’며 재판 기피 신청 카드까지 꺼내들었다.
지난 5일 임 전 차장이 제출한 A4용지 106페이지 분량의 재판부 기피 사유서에는 “재판장이 어떻게든 피고인을 범죄인으로 만들어 처단하고야 말겠다는 굳은 신념 내지 투철한 사명감에 가까운 강한 예단을 가지고 극히 부당한 재판진행을 하고 있다”는 내용이 담겼다.
검찰 측은 “재판을 지연하려는 목적이 명백하다”며 반발했고, 법원 내에서는 재판 기피 신청이 받아들여질 가능성은 낮다고 보고 있다. 그렇다고 해도, 언제까지나 임 전 차장을 구속시켜 놓을 수도 없다. 법원도 지난달 6개월 구속 만기를 채운 임 전 차장에 대해 구속 기간을 2개월 연장했는데, 심급마다 2개월씩 3번, 총 6개월간 구속 연장이 가능하다. 올해 10월 말에는 석방해줘야 한다는 얘기다. 때문에 임 전 차장 측의 전략이 ‘시간 끌기’라는 분석이 나온다. 구속 만기 시점까지 재판을 미뤄 석방된 뒤 비판 여론이 조금이라도 잦아들었을 때 선고를 받는 게 유리할 수 있다.
법원 고위 관계자는 “임 전 차장의 재판 속도와 지금 전략을 감안할 때, 올해 안에 선고가 날 것으로 기대하기는 힘들다. 아직 증인 신문이 170~180여 명 이상 진행해야 하고 그 중 일부 예민한 증인들은 하루를 통째로 쓰기도 할 것”이라며 “결국 올해는커녕 내년 총선(4월) 전후에 날 확률이 높고, 정치적인 맥락에서 기소된 만큼 총선 결과를 보고 재판 결과에 어느 정도 반영하는 방식으로 전략을 짤 확률이 높다”고 분석했다.
# 검찰과 여전히 신경전 벌이는 양승태 전 대법원장
양승태 전 대법원장은 검찰과 신경전을 벌이며, 재판 지연 전략을 펼치고 있다. 첫 재판이 열린 것은 5월 29일인데, 재판에 넘겨진 지 4달여가 지났지만 여전히 절차를 놓고 검찰과 변호인이 신경전을 벌이고 있다.
특히 양승태 전 대법원장은 검찰 수사를 문제 삼고 재판에 응하지 않는 모양새다. 양 전 대법원장은 첫 공판준비기일에서 재판부를 향해 25분에 걸쳐 ‘검찰 비난 메시지’를 전달했다. 그는 “무려 80명이 넘는 검사가 동원돼 8개월이 넘는 수사를 한 끝에 300페이지가 넘는 공소장을 창작했다”며 “법률가가 쓴 법률 문서라기보다는 소설가가 미숙한 법률자문을 받아서 쓴 한 편의 소설”이라고 비난했다. 함께 재판받는 박병대 전 대법관 측도 주 3~4회 재판을 하는 집중심리를 강하게 반대했다. 주 3~4회 재판을 하면, 제대로 된 심리를 할 수 없기에 더 천천히 해야 한다는 지적이다.
양승태 전 대법원장. 사진공동취재단
서울중앙지검 수사팀 측은 “법집행 기관인 검찰뿐 아니라 구속영장을 발부하고 보석을 불허해 구속 상태를 유지한 재판부들이 미숙한 법률자문을 받아 쓴 소설을 근거로 구속한 것이라고 모욕하는 것”이라며 항변했는데, 검찰 측은 물론, 판사조차도 법을 잘 아는 판사들이 의도적으로 지연 전략을 쓴다고 입을 모아 얘기한다.
구속 만기 시점이 8월 10일인 양승태 전 대법원장이 시간을 끌면서 불구속 재판을 받으려고 한다는 것. 실제 양 전 대법원장은 재판에 넘겨지고 120일이 지났는데도 정식 재판이 세 차례밖에 열리지 못했다. 제대로 된 증인 신문은 시작하지도 않았다.
양 전 대법원장도 검찰 증거에 대부분 동의하지 않아 검찰이 증거 조사를 위해 신청한 증인은 211명에 달한다. 증인신문에 소요되는 시간을 고려하면 사실상 구속기간 내 선고는 불가능하다는 얘기다. 추가 기소로 구속 기한을 연장한다고 하더라도, 1심 재판 중에 양 전 대법원장 역시 임종헌 전 차장처럼 풀려날 가능성이 너무 크다.
사건을 잘 아는 고위직 출신 판사는 “지나치게 정치적인 의도로 접근했다는 판단에서, 억울함을 최대한 어필하고 동시에 재판소송법 측면에서 문제가 될 소지가 있는 것을 어떻게든 찾아내려는 것 같다”며 “최대한 시간을 끌어 최대한 문재인 정부 지지율이 떨어졌을 때 선고를 받으려는 것 같다. 그 사이 석방이 되려는 것은 덤”이라고 풀이했다.
# 내부 여론 보니 “한 명도 책임지지 않아 실망”
그렇다면 판사들의 반응은 어떨까. 수사 초반만 해도 “검찰이 너무 하는 것 같다”던 판사들이 적지 않았다면, 지금은 “실망스럽다”며 돌아선 분위기다. 독립된 사법부를 이끌던 수장과 핵심 고위 관계자들 중 그 누구도 책임지는 모습을 보이지 않는다는 지적이다.
앞선 고위직 출신 판사는 “양 전 대법원장은 밑에서 다 했다고 하고, 임종헌 전 차장도 다 밑에서 알아서 한 것이라고 하면서 다들 ‘나는 억울하다’는 얘기만 하고 있다”며 “정치적으로 다소 억울할 수 있지만 그래도 법원 조직을 이끌었던 장이라면 억울한 것도 좀 안고 가면서 책임을 지는 모습을 보여야 존경을 더 할 수 있지 않겠냐”고 귀띔했다.
한때 양 전 대법원장 밑에 함께 했던 핵심 판사들 사이도 멀어진 지 오래라는 후문이다. 또 다른 판사는 “수사 초반만 해도 서로 정보를 좀 공유하면서 함께 대응하려 했다면, 지금은 ‘나 혼자 살겠다’며 책임을 다 떠넘기고 검찰에 가서 적극적으로 협조하고 하면서 서로가 서로한테 상처를 받고 비난하고 있다”며 “임 전 차장과 양 전 대법원장 입장을 대변하는 판사들 사이의 의견 차이도 적지 않다”고 덧붙였다.
서환한 객원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