삼성·하이닉스, 중국에 “미국 협조시 보복” 경고 받아…눈치 보며 대처방안 강구
미국과 중국의 무역 갈등이 심화되는 가운데, 기업들이 두 강국 사이에서 ‘새우등 터지는’ 상황이 현실화 되고 있다. 사진은 지난 6월 11일 중국 상하이에서 개막한 IT·가전 박람회인 ‘CES 아시아 2019’의 화웨이 전시장 모습. 연합뉴스
미 행정부는 2012년 화웨이가 중국 정부의 스파이 활동에 사용됐다는 보고서가 발간된 것을 근거로 화웨이를 제재했다. 화웨이가 자사 통신장비에 백도어를 심어 스파이 행위를 할 수 있다는 것. 미국이 지난 5월 16일 화웨이와 68개 계열사들을 거래제한 기업 명단에 올린 후 구글과 인텔, 퀄컴 등 IT 기업들은 화웨이에 부품을 납품하지 않겠다고 밝혔다.
그러나 중국의 보복 경고를 받은 것으로 알려진 삼성전자와 SK하이닉스 등 국내 기업은 화웨이와 관련해 언급을 꺼리고 있다. 과거 사드 후폭풍으로 ‘한한령’ 사태를 지켜본 국내 기업들의 심경은 복잡하다. 더욱이 중국 국가시장감독관리총국은 지난해 5월부터 주요 D램 업체인 삼성전자, SK하이닉스, 마이크론 등의 중국 내 매출거래와 관련해 반독점법 위반 여부를 조사했으나 결과를 발표하지 않고 있다.
중국 상황을 잘 아는 한 재계 관계자는 “중국은 사드 사태 당시 경험한 바 있듯 뒤끝이 굉장히 세다”며 “한국은 부정도 긍정도 하지 않고 사태가 종료되길 기다릴 수밖에 없다”고 전했다. 한 대기업 IT 계열사 관계자는 “국내 기업 대부분 화웨이 장비를 사용하거나 화웨이에 매출 의존도가 높았던 만큼 눈치를 볼 수밖에 없는 상황”이라며 “각 기업이 대처 방안을 강구 중인 것으로 알고 있다”고 전했다.
현재 상황에서 입장이 가장 난처한 곳은 삼성전자다. 한국수출입은행 해외경제연구소는 지난 6일 발간한 ‘ICT산업 2019년 1분기 동향’에서 휴대폰 부문에 대해 “미국의 화웨이 거래제한 조치가 해소되지 않는다면 애플과 화웨이의 판매량 감소로 2019년에도 삼성전자가 1위를 유지할 전망”이라고 분석했다. 올해 안에 스마트폰 시장에서 삼성전자를 밀어내고 세계 1위에 오를 것이라던 화웨이의 자신감도 한풀 꺾였다. 화웨이는 지난 11일 중국 상하이에서 개최한 ‘CES 아시아 컨퍼런스’에서 “올해 4분기 세계 시장 1위를 기대했지만 예상치 못한 상황이 발생해 시간이 더 걸릴 것 같다”고 언급했다.
5G 통신장비 부문에서는 삼성전자의 반사이익이 이미 시작됐다는 이야기가 나온다. 국내 한 이동통신사 관계자는 “화웨이의 고전으로 삼성전자 네트워크 사업부는 이미 수혜를 보고 있다”고 전했다. 실제로 미국 이동통신장비 시장분석업체 델오로에 따르면 삼성전자는 5G 통신장비 매출 점유율 부문에서 지난해 4분기와 올해 1분기 합계 37%를 기록, 28%를 기록한 화웨이를 제쳤다.
반면 삼성전자 반도체 부문은 타격을 받을 것으로 보인다. 가뜩이나 메모리반도체 가격 인하가 계속되는 상황에서 삼성전자의 주요 매출처인 화웨이의 수요마저 줄어들 경우 피해가 불가피하다. 화웨이는 삼성전자 반도체 부문 전체 매출의 약 3%를 차지하는 것으로 평가된다. 삼성전자는 지난 4월 사업보고서를 통해 화웨이를 비롯해 애플, 버라이즌, 도이치텔레콤, 베스트바이 등을 전체 매출액의 14%를 차지하는 5대 매출처라고 밝힌 바 있다.
SK하이닉스의 실적 우려는 더 크다. SK그룹의 실적을 이끌고 있는 SK하이닉스가 부진할 경우 그룹에 악영향을 미칠 수 있다. 지난해 SK하이닉스의 영업이익은 20조 5790억 원으로 SK그룹 전체 영업이익(29조 4456억 원)의 69.8%를 차지했다.
SK하이닉스는 올해 1분기 1조 3665억 원의 영업이익을 기록했다. 전년 동기 대비 68.7% 줄어든 결과다. 지난 4월 25일 열린 1분기 실적 컨퍼런스 콜에서는 “하반기부터 D램 수급불균형이 회복될 것으로 보인다”고 전망했으나 미·중 갈등이 장기전으로 들어서며 D램 등 반도체 수요 회복에 어려움을 겪을 것으로 보인다. 더욱이 SK하이닉스의 경우 대중 수출 비중이 높고 화웨이가 차지하는 매출 비중이 10%를 넘어서는 것으로 분석된다. 또 전체 D램 생산량의 절반 가까이 차지하는 주요 생산시설이 중국 동부 우시에 위치해 있다. SK하이닉스는 지난해 9500억 원을 들여 해당 공장을 증설한 바 있다.
SK하이닉스 관계자는 “화웨이는 주요 고객 중 하나”라며 “섣불리 예상할 수 있는 상황이 아니어서 전반적인 수요와 시장회복 상황을 지켜보고 있다”고 전했다. 중국 현지 생산시설 운영 방안에 대해서는 “현재 전체 D램 생산량의 40% 정도를 중국 공장에서 생산 중”이라며 “지난해 캐파로스를 보완하기 위해 확장팩 투자를 했고, 실제 중국 고객 비중이 높은 만큼 당장 공장 운영에 대해 다른 방안을 모색하고 있지는 않다”고 밝혔다.
미국이 화웨이에 보안 문제를 제기하면서 구설에 가장 많이 오르는 곳은 LG유플러스다. LG유플러스는 2013년 LTE 통신망을 구축할 때부터 국내 최초로 화웨이 장비를 도입했고, 최근 5G 통신망 구축에도 LTE와 호환성을 이유로 서울과 수도권, 강원도 등 지역에서 화웨이 장비로 5G 기지국을 구축하고 있다.
일각에서는 이상철 전 LG유플러스 부회장의 거취와 LG유플러스의 화웨이 장비 도입의 연관성을 지적하기도 한다. 이 전 부회장은 재직 당시 투자비 절감을 강조하며 LTE 통신망 구축 시 화웨이 장비 도입에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 그러나 이 전 부회장은 2017년 퇴임 이후 화웨이로 자리를 옮겨 총괄고문을 맡았다가 1년 만에 물러난 것으로 전해진다.
한 통신업계 관계자는 “다른 통신사들도 기존 유선 장비에는 화웨이를 사용했지만 5G에서는 사용하지 않았다”며 “화웨이가 다른 제조사보다 기술력이 좋고 가격도 훨씬 저렴하다는 평가는 있지만, LTE 통신망 때부터 문제가 제기됐는데 굳이 5G 통신망 장비에도 화웨이 제품을 고수하다 악재를 맞은 것 같다”고 전했다. LG유플러스 관계자는 “통신사업자들 모두 보안 문제에 노출돼 있는데, 화웨이에만 보안 문제를 거론할 수 없다”며 “지금까지 문제가 발생한 적이 없었고, 보안과 관련해서는 철저하게 준비해왔다”고 전했다.
여다정 기자 yrosadj@ilyo.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