후율당, 조헌 선생 묘소, 표충사 ~ 군북 이지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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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남면 도농리에 취치한 중봉 표충사 전경
[대전=일요신문] 육심무 = 호국보훈의 달 테마여행으로 의병장 조헌 선생의 발자취를 따라 고즈넉한 전원의 경치를 즐겨보면 어떨까.
임진왜란 때 붓 대신 칼을 들고 의병을 일으킨 선비 중봉 조헌 선생의 고장 충북 옥천은 그가 구국일념의 의지를 세운 곳이며 전사 한 후에 뼈가 묻힌 땅이다.
옥천군 안내면 도이리 ‘옥천 후율당’과 안남면 도농리 ‘중봉 조헌묘소와 표충사, 신도비’ 및 군북면 이백리 ‘옥천 이지당’ 등에서 그의 흔적을 찾아볼 수 있다.
후율당은 조헌의 발자취를 볼 수 있는 첫 번째 유적이다. 선조17년(1584) 그는 보은 현감에서 파직 당한 후 옥천 안읍(安邑) 밤티(栗峙)로 거처를 옮겼다.
그곳에서 그는 후율정사(後栗精舍, 현 후휼당)를 짓고 학덕 있는 선비들과 지내면서 문하생을 두었으며 학문을 닦고 연구하는 데 힘썼다.
10만 양병설을 주장했던 율곡 이이의 제자였던 조헌 선생은 스스로 자신의 호를 후율(後栗이)라 하고 당(堂)의 이름도 후율이라 했다.
현재 후율당은 안내면 도이리에 위치한다.
선생이 돌아가신 후 퇴락되어 가던 중 철종5년(1854) 후손들이 옥천군 백운동으로 이건했다.
그 후 고종 원년(1864) 현 위치로 옮겼으며 1977년 중건하여 선생의 위패를 모시고 있는 사당으로 삼고 있으며 경내에는 아들 완기의 효자각이 있다.
1592년 4월 왜군이 침입하자 다음 달 청주에서 처음 격문을 띄워 의병을 모집했던 조헌 선생은 보은, 공주 등에서 승병과 함께 적을 무찔렀다.
그해 8월 1600여 명의 의병을 모아 청주성을 탈환하고 잔여 의병을 이끌고 충남 금산 전투에 나선 조헌 선생은 7백 의사와 함께 순절했다.
제자들이 7백 의사들의 유해를 한곳에 합장하고 선생의 유해는 별도로 옥천군 도리동에 안장했으나 인조14년(1636) 현재 위치로 이장했다.
그곳은 후율당에서 10㎞정도 떨어진 안남면 도농리로 그의 영정과 위패를 모시는 표충사와 그 넘어 언덕 위로 난 돌계단을 오르면 묘소가 보인다.
300여 그루의 소나무가 묘소를 둘러쌓고 있어 그 느낌이 온화하고 발 아래로 표충사와 잔디광장을 바라보면 조헌 선생의 기백에 취할 수 있는 곳이다.
현재 묘역에는 묘비 2기가 있는데 그 중 하나는 이곳으로 이장할 당시 우암 송시열 선생이 그의 공적을 기록한 것이다.
묘역을 나와 우측 길로 나서면 전통 건축양식의 비각이 설치된 것을 볼 수 있다.
그 안에는 조헌 선생의 신도비가 있다. 인조27년(1649)에 세운 비로 그곳에는 선생의 파란만장한 생애가 기록되어 있으며 특히 최후의 격전지였던 금산싸움에 대해 자세히 적혀 있다.
조헌 선생의 흔적은 군북면 이백리에서도 찾아볼 수 있다. 바로 이지당(二止堂)이다.
현재의 이지당은 송시열 선생이 주도하여 세운 건물이지만 원래 이 장소는 당시 안읍에 살던 조헌 선생이 왕래하며 학문을 닦고 연구하던 곳이라고 한다.
이지당은 충청북도 유형문화재 제42호다. 원래 각신마을 앞에 있어서 각신서당이라고 했으나, 후에 이지당(二止堂)이라 불리고 있다.
이지당은 정면에서 보면 6칸, 측면은 1칸으로 되어 있는 목조 기와집이다.
몸체는 서쪽부터 2칸의 방, 3칸의 대청마루, 1칸의 방을 두고 있다. 그 양쪽에는 익랑(건축물의 좌우 면에 이어 만든 부속 건물)이 있다.
특히 서쪽 익랑은 2층 누각으로 꾸며져 있어 서당의 형식을 넘어서는 옛 조상들의 건축관을 살펴볼 수 있는 귀중한 자료로 여겨지고 있다.
이곳의 매력은 각도에 따라 새롭게 느껴지는 풍경이라 할 수 있다.
분명 하나의 연결된 목조 기와집인데 어디서 찍느냐에 따라 색다른 분위기가 연출된다.
경부고속도로 옥천 나들목에서 조선 선생 묘소 등에 이르는 길에 현대시의 시성 정지용 시인의 문학관과 생가 등을 둘러볼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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죽향초등학교 구교사
먼저 만나는 곳이 죽향초등학교 구교사로 이곳은 정 시인의 어린 시절 아스라한 추억과 꿈이 살아 숨 쉬던 학교다.
이 학교의 또 다른 매력은 향수(鄕愁)의 정지용 시인(1902~1950)과 육영수 여사(1925~1974) 등 많은 저명인사를 배출했다는 점이다.
정 시인은 1910년 이 학교(당시 옥천공립보통학교)에 입학하여 1914년 졸업했다. 육 여사는 역사관으로 활용되고 있는 바로 이 건물에서 친구들과 함께 공부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건립 당시의 모습이 비교적 그대로 남아 있어 근대 학교 건축양식을 잘 보여주고 있다.
3칸의 교실 중 첫 번째 칸에는 오래된 녹색칠판과 나무로 만든 책상과 걸상 등 옛 모습을 그대로 연출해 놨다. 정 시인은 1910년 이 학교(당시 옥천공립보통학교)에 입학해 1914년 졸업했다.
이후 가볼 곳은 실개천이 옆으로 흐르는 지용생가와 문학관이다. 생가는 고향의 정경을 느낄 수 있는 곳이다.
1996년 원형대로 복원됐으며 초가와 사립문, 우물, 물레방아 등이 향수(鄕愁)를 물씬 풍긴다.
사립문을 열고 나가면 바로 문학관이다. 문학관에 들어서면 언제나 반갑게 맞아주는 정 시인의 밀랍인형이 긴 의자에 앉아 있다.
이 학교에서 얼마 떨어지지 않은 곳에는 육영수 여사의 생가가 있다. 옥천을 찾는 관광객이 빠뜨리지 않고 찾는 곳이다.
충청북도 기념물 제123호인 ‘육영수 생가’는 옥천군이 2004년 안채 복원공사를 시작으로 수차례의 발굴과 자문회의 등 고증을 거쳐 2010년 안채, 사랑채, 위채, 사당 등 건물 13동의 복원공사를 완료했다.
지용생가에서 가는 길에는 대청호반이 한눈에 내려다보이는 장계관광지도 있다.
자연경관과 조화롭게 어우러져 있는 이곳의 산책로를 거닐다 보면 자연스레 시상이 떠오를 수도 있다. 옥천에는 ‘향수100리길’이라는 자전거 타기 좋고 드라이브하기도 멋진 도로가 있다.
정지용생가에서 시작되는 이 길은 장계관광지를 거쳐 금강줄기가 흐르는 안남면 둔주봉과 동이면 금강유원지로 이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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