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야구부 없는’ 초중고 출신, 군복무 이후 한일 독립야구 도전…“1군에 오래 머물겠다”
‘비선수출신’ 최초 KBO 리거가 된 한선태. 지난 25일 1군 무대에 데뷔했다. 연합뉴스
[일요신문] 2019년 6월 25일. KBO 리그에 새로운 역사 하나가 쓰였다. 고교 때까지 야구부에서 뛰어본 적이 없는 ‘비(非) 선수 출신’이 잠실구장 마운드에서 프로야구 선수로 첫 발을 내디뎠다. 그 주인공은 LG 투수 한선태(25). 사회인 야구에서 처음 공을 쥔 뒤 마침내 ‘프로’라는 꿈의 무대를 밟게 된 입지전적 인물이다.
한선태는 지난해 9월 이미 한 차례 큰 관심을 받았다. 2019년 신인 2차드래프트에서 10라운드 전체 95순위로 LG에 지명된 직후였다. 고교 때까지 아마추어 등록 선수로 뛰어본 적 없는 사회인 야구 출신 투수를 LG가 역대 최초로 호명하자 장내는 크게 술렁였다.
물론 그때만 해도 비관적인 전망이 우세했다. 하지만 LG에 육성 선수 신분으로 입단한 한선태는 2군에서 차근차근 수업을 받으며 기량을 키웠다. 그리고 새 시즌 개막 3개월 만에 마침내 꿈같은 하루가 찾아왔다. 정식 선수 계약→1군 엔트리 등록→1군 경기 출전이라는 세 가지 목표가 하루 사이에 일사천리로 이뤄졌다. 잠실구장 마운드에 오른 한선태가 공을 하나씩 던질 때마다 전국의 야구팬이 감동으로 들썩였고, 그 여운은 좀처럼 사그라지지 않았다.
#사회인 야구 선수가 1군에 등록되기까지
가시밭길이었다. 한선태는 부천 양지초등학교-부천동중-부천공고를 졸업했다. 모두 야구부가 없는 학교였다. 당연히 고교 시절까지 선수 생활을 한 적이 없었다. 야구 선수가 아닌, 그냥 야구를 좋아하는 일반 고교생이었다. 성인이 된 뒤에야 사회인 리그에서 야구를 시작했다. 현역으로 군 복무도 했다. 하지만 한 번 야구를 알고 나니 ‘프로 선수가 되고 싶다’는 열정을 버리기 어려웠다. 모두가 허황된 일이라 믿고 꿈조차 꾸지 않을 때, 그는 무모하고 기약 없는 도전을 택했다. 전역 후 2017년 독립야구단 파주 챌린저스에 입단했다.
경제적 부담도 컸다. 그는 “독립야구단은 한 달에 90만 원씩 회비를 내야 운영이 된다. 다들 KBO 리그에서 뛰는 건 불가능할거라고 하니 도중에 그만 해야겠다는 생각을 했다”며 “안 될 걸 뻔히 알면서 무작정 돈을 펑펑 쓰기엔 부모님께 너무 죄송했다”고 했다. 미래를 알 수 없었기에 고민이 더 깊을 수밖에 없던 시절이다. 이때 함께 야구하던 동료들이 그를 붙잡았다. “지금 이렇게 포기했다가 나중에 후회가 돼 다시 도전한다면, 그땐 지금보다 더 큰 돈이 들 것”이라며 “지금 후회 없이 해봐라. 나중에 프로에서 벌 돈을 생각하면 아무 것도 아니다”라고 설득했다.
포기하지 않은 건 옳은 선택이었다. 파주 챌린저스에서 기본을 다진 한선태는 지난해 일본 독립리그 도치기 골든브레이브스에서 뛰면서 기량이 급성장했다. 처음으로 많은 팬의 박수도 받아봤다. 그는 “일본에서 내 등장곡으로 ‘핸드 클랩(Hand Clap)’을 썼다. 팬들이 ‘한선태’라는 이름도 외쳐줬다”고 떠올렸다. 물론 그땐 그 장면이 1년 뒤 잠실구장에서 재연되리라고는 상상도 하지 못했다.
하지만 꿈은 점점 커졌다. 그는 지난해 8월 수원 KT위즈파크에서 진행된 KBO 트라이아웃에 참가했다. 이대은(KT) 하재훈(SK) 이학주(삼성) 등 쟁쟁한 해외 유턴파 선수들 사이에서 씩씩하게 공을 던졌다. LG는 사이드암이면서 시속 140km 중반대 직구를 던지는 한선태를 눈여겨 봤다. 그리고 신인 2차드래트프 마지막 순번에 결국 한선태 영입을 결심했다. 심지어 그를 눈여겨 본 구단은 LG만이 아니었다. 염경엽 SK 감독은 “다음 순번이 우리 차례였다. 우리도 관심을 두고 지켜보던 선수”라며 “LG가 뽑지 않았다면 우리가 불렀을 것”이라고 했다.
그 순간부터 한선태가 지나간 자리에는 늘 새로운 길이 생겼다. 그는 올 시즌 2군 19경기에 출전해 25이닝을 던지면서 1세이브 2홀드 평균자책점 0.36이라는 좋은 성적을 냈다. 특히 6월 들어 출전한 6경기에서 8이닝 동안 3피안타 3볼넷 8탈삼진 무실점을 기록하며 승승장구했다. 시즌 초만 해도 “좀 더 투수로 수업을 쌓게 한 뒤 9월 확대 엔트리 때쯤 1군 승격을 고려해보겠다”던 LG도 ‘비선출’이라는 꼬리표와 편견을 떼고 한선태를 바라보기 시작했다. 류중일 LG 감독 역시 “2군이라 해도 평균자책점이 그 정도로 좋기는 쉽지 않다”며 한선태를 높이 평가했다. 그렇게 한선태의 1군행이 전격 성사됐다.
KBO 규약 개정으로 비선수 출신에게도 프로 입단 문이 열렸다. 한선태는 2019 신인 드래프트에서 LG에 지명됐다. 사진=일요신문DB
#역사적인 첫 등판, 위기를 벗어나다
한 번 결정이 내려지자 모든 게 빠른 속도로 진행됐다. 한선태는 1군 엔트리 등록 당일인 6월 25일 잠실 SK전에서 생각보다 더 빨리 잠실구장 마운드에 오르는 꿈을 이뤘다. 바로 이날 팀이 3-7로 뒤진 8회초 LG 세 번째 투수로 마운드에 올랐다. KBO 리그 38년 역사상 처음으로 비 선수 출신이 프로야구 경기에 출전하는 순간이었다.
한선태는 “경기 중반부터 형들이 ‘만약 점수 차가 더 벌어지면 나갈 수 있으니 마음의 준비를 하라’고 하셨다. 그러다 정말로 ‘몸을 풀라’는 지시를 받았다”며 “가장 먼저 든 생각은 ‘어떻게 풀어야 하지?’였다. 얼마나 빨리 풀어야 하는지 몰라 2군에서의 루틴대로 했다”고 고백했다.
그렇게 고민하는 사이 LG의 7회말 공격이 끝났다. 1루 쪽 불펜 문이 열렸고, 유니폼 뒤에 40번을 새긴 한선태가 빠르게 마운드로 달려갔다. 동시에 LG 관중석에서 응원과 호기심을 함께 담은 박수와 환호가 터졌다. 한선태는 “팬들이 내 이름을 부르며 ‘파이팅!’이라고 외치는 소리가 들렸다. 하지만 이내 긴장해서 아무 소리도 안 들리게 됐다”며 “일본에서 경기에 나올 때의 기억이 나서 ‘잘 던져보자’ 했는데, 그렇게 다짐하는 순간 딱 끝난 것 같다”고 웃어 보였다.
야심차게 던진 한선태의 프로 생활 초구는 포수 뒤로 빠지는 폭투가 됐다. 프로 첫 상대 타자 이재원은 한선태의 3구째 직구를 받아 쳐 우전 안타를 만들어 냈다. 무사 1루서 SK 안상현과 맞섰지만, 볼 3개를 연거푸 던져 스리볼에 몰렸다. 야구장을 뒤덮었던 기대감은 서서히 실망감으로 식어 내렸다.
바로 그때 한선태는 모자를 벗어 챙 안쪽을 들여다봤다. 일본어로 직접 적어 넣은 ‘하면 된다(やればできる)‘라는 글귀를 보기 위해서였다. 일본 독립리그에서 프로 선수의 꿈을 키워가던 시절, 긴장할 때마다 수십 번은 더 봐왔던 문장이다. 한선태는 “당시 코치님께서 나처럼 제구가 잘 안 되는 선수들에게 ’모자에 마음을 안정시킬 수 있는 문구, 가장 좋아하는 문구를 써 놓아라‘는 조언을 해주셨다”며 “일본에 있을 때라 일본어로 그 문장을 써 놓았는데, 한국에 온 지금도 그때 잘 된 기억을 이어가려고 똑같이 적었다”고 귀띔했다.
한선태가 그 마음을 되새기며 마인드 컨트롤을 하는 사이, 포수 유강남이 큰 소리로 ‘파이팅’을 외쳤다. 어렵게 잡은 기회를 신기루처럼 날려 버릴 위기 앞에서 한선태는 ‘일단 한가운데만 보고 던지자’는 생각으로 회심의 공 하나를 던졌다. 그 공은 스트라이크. 볼카운트 3-1이 됐다. 한선태는 다시 ‘스트라이크를 던진 바로 이 밸런스로 또 던져 보겠다’고 마음 먹었다. 이번엔 파울로 풀카운트. 바로 이때 흐름을 뒤바꾸는 반전이 일어났다. 안상현이 때린 6구째 직구는 2루수-유격수-1루수로 이어지는 병살타로 이어졌다.
한선태는 다음 타자 김성현에게 몸에 맞는 공을 던져 다시 출루를 허용했다. 하지만 SK 리드오프 고종욱을 5구 만에 1루수 땅볼로 유도하면서 세 번째 아웃카운트를 잡았다. 1이닝 1피안타 1사구 무실점. KBO 리그에 그렇게 새롭고 의미 있는 발자취 하나가 새겨졌다. LG 외국인 타자 토미 조셉은 직접 잡아낸 그 공을 고이 챙겨 한선태에게 건넸다. 데뷔전 기념구를 손에 꼭 쥔 그는 감격의 눈물 대신 환한 미소로 꿈을 이룬 자의 환희를 표현했다. “마운드를 내려오니 최일언 투수코치님이 ‘잘 이겨냈다’고 말해 주셨다. 변화구를 던질 때 확실히 티가 나는 부분을 수정해 보자는 조언도 하셨다”며 “1이닝만 던져서 아쉬웠지만, 코치님이 ‘다음에 더 던지자’고 하셔서 감사했다. 비록 짧은 시간이지만 정말 많이 배웠다”고 기뻐했다.
#폭발적 관심 속에서 연투 테스트까지 합격
한선태의 감격적 데뷔는 야구계 전체에 큰 파장을 일으켰다. 순식간에 그의 이름이 주요 포털사이트 실시간 검색어 1위를 점령했고, 첫 투구를 재구성한 영상도 다른 KBO 리그 하이라이트 영상보다 훨씬 높은 조회수를 기록했다. TV 중계 화면에는 한선태의 공 하나 하나에 열광하는 중년 남성과 여성의 모습이 끊임없이 잡혔는데, 모두가 그들을 한선태의 부모로 오해하는 바람에 해당 여성팬이 인터넷 커뮤니티에 글을 올려 해명하는 해프닝까지 벌어졌다.
이뿐 아니다. ‘비선출’ 선수의 새 신화를 쓴 한선태에게는 하룻밤 사이 200개가 넘는 축하 메시지가 쏟아졌다. 그는 “원래 친했던 분들은 물론이고, 함께 야구했던 형들의 지인부터 초등학교 시절 연락이 끊겼던 친구까지 수많은 사람에게 연락이 왔다”며 “하나도 빼놓지 않고 일일이 답장을 다 했다”며 기분 좋게 웃었다.
류중일 감독도 한선태의 데뷔전을 누구보다 흐뭇해했다. 다음 날인 6월 26일 잠실 SK전에 앞서 “첫 경기라 얼마나 벌벌 떨었겠느냐”고 반문하면서 “제구에 신경을 쓰다 생각보다 스피드가 나오지 않은 것 같다. 불펜 피칭 때 더 묵직한 공을 던지는 투수인데 긴장을 많이 해서 그런 것 같다”고 호평했다. 또 “원래는 더 좋은 공을 던지는 투수다. 앞으로 자주 올라가서 경험을 쌓고 자신감을 얻는다면 본래 모습을 보여주지 않을까 싶다”며 “중간 계투는 연투도 가능해야 하니 경기 중 상황이 된다면 이틀 연속 내보내 보겠다”고 기대했다.
그리고 류 감독은 실제로 바로 그 날 한선태에게 다시 한 번 기회를 줬다. LG가 4-7로 뒤진 9회 마지막 투수로 한선태를 올렸다. 그리고 한선태는 첫 날보다 훨씬 안정적인 피칭으로 그 기대에 보답했다. SK 선두 타자 김재현을 6구 만에 헛스윙 삼진으로 돌려세워 데뷔 첫 탈삼진을 만들어 낸 게 백미였다. 기세를 올린 한선태는 다음 타자 이재원도 3루수 땅볼로 솎아냈다. 세 번째 타자인 베테랑 김강민에게는 좌중간 안타를 맞아 2사 1루가 됐지만, 마지막 타자 안상현을 다시 우익수 플라이로 아웃시키면서 이틀 연속 무실점으로 임무를 마쳤다.
“언젠가 1군에서 던져 보겠다는 꿈을 이뤘으니, 이제는 1군에 최대한 오래 머물겠다는 꿈을 꾸게 됐다”는 한선태가 또 한 번 목표를 향해 한 걸음 다가가는 순간이었다.
배영은 일간스포츠 기자
류중일·김인식·봉중근 등 야구인들이 바라본 투수 한선태 KBO 리그 역대 최초 ‘비선출’ 선수인 한선태(25·LG)의 등장은 오랫동안 KBO 리그 현장을 지킨 야구인들에게도 신선한 충격을 안겼다. 시속 140km 중반대 직구를 뿌리는 사이드암 투수는 어느 구단에나 값진 자원이다. 류중일 LG 감독은 두 번의 등판을 마친 한선태를 향해 “확실히 두 번째 등판은 첫 번째보다 훨씬 낫고 여유도 있었다”며 “마운드에 한 번 올라가는 게 얼마나 중요한지 보여줬다”고 흐뭇해하기도 했다. 프로야구 감독으로 잔뼈가 굵은 ‘백전노장’ 김인식 전 국가대표 감독은 “야구를 본격적으로 시작한 지 3~4년 밖에 안 되지 않았나. 굉장히 짧은 경력을 감안하면 괜찮은 모습이고 놀랍기도 하다”며 “몸을 이용해 던지는 폼이 부드럽고, 사이드암 특유의 무브먼트도 엿보인다. 직구가 괜찮다”고 호평했다. 사이드암 투수였던 김현욱 LG 트레이닝 코치도 “그동안 혼자 운동하기 힘들었을 텐데 1군 첫 등판을 보고 존경스러웠다”며 “많이 떨렸을 텐데 자신 있게 던지는 모습을 보고 대견했다. 아직 완성 단계가 아니지만, 직구는 기존 선수들에 전혀 뒤처지지 않을 만큼 힘이 있고 좋더라”고 했다. 전 메이저리거이자 LG 출신인 봉중근 KBS N스포츠 해설위원은 “투구폼이나 밸런스에 대해 내가 감히 얘기하기는 조심스럽지만, 최고 시속이 144km까지 나왔고 승부를 할 줄 아는 투수인 것 같다”며 “스리쿼터, 사이드암 유형이라 상당히 가치가 있다고 본다”는 평가를 내놨다. 다만 변화구 구사 능력과 프로 생활을 버틸 체력에 대해선 물음표가 붙었다. 김 전 감독은 “변화구는 아직 다소 엉성하다. 직구 다음으로 던질 변화구가 갖춰져야 한다”고 지적했고, 김 코치는 “변화구가 아직 부족해서 경기를 직구 위주로 끌고 간 것 같은데, 변화구 제구만 좀 더 열심히 보완하면 좋을 것 같다”고 조언했다. 김 코치는 또 “몸 상태 역시 기존 선수들과 비교해 아직은 조금 부족하고, 체력도 꼭 필요한 부분”이라고 덧붙였다. 어쨌든 한선태가 ‘프로야구 선수’라는 꿈과 가치에 대해 새로운 가능성을 열어준 것만은 분명하다. 김 전 감독은 “야구를 좋아하지만 학교에 야구부가 없어 엄두를 내지 못하는 어린 선수들에게 좋은 본보기가 된 것 같다”고 강조했다. 또 김 코치는 “한선태는 굉장히 야구를 즐거워하고 긍정적인 성격이라 항상 웃는다. 코치 입장에서도 뭔가 하나라도 더 알려주고 싶어지는 선수”라며 “비 선수 출신들에게 꿈과 희망을 줬다는 점에서 대단하다”고 박수를 보냈다. 봉 위원도 “팬들에게 좋은 메시지가 전달되고 한국 야구가 보다 발전할 수 있는 계기가 되지 않았을까 싶다”며 “비선수 출신이 꿈과 희망을 갖고 이뤄온 과정이 중요하다. LG 후배들도 한선태를 보고 배울 부분이 있다면 배웠으면 좋겠다”고 했다. 배영은 일간스포츠 기자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