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긴장감 역력’ 재벌그룹 총수 간담회 이모저모...주요 그룹 대미 추가 투자 나설까?
트럼프 대통령은 6월 30일 오전 10시 서울 하얏트호텔에서 국내 18개 재벌그룹 총수들과 만나 40분 간 회동했다. 트럼프 대통령이 한국 정부 관계자 없이 국내 기업인들과 단체 간담회 성격의 만남을 가진 건 이번이 처음이다. 지난 2017년 첫 방한 당시 국빈 만찬에서 기업인과 만난 적은 있지만 따로 회동하지는 않았다.
이번 간담회는 한국 정부와의 조율이나 협력 없이 트럼프 대통령 주도로 기획됐다. 참석 기업 명단은 주한 미국대사관이 작성하고, 트럼프 대통령과 백악관 참모들이 선택해 통보한 것으로 전해진다. 1일 산업통상자원부 등의 설명을 종합하면, 정부는 미국 측의 간담회 준비 절차를 사전에 알지 못했고 명단도 건네받지 못했다. 한 10대 그룹 관계자도 “주한미국대사관으로부터 직접 연락을 받았다”고 말했다.
지난 6월 30일 서울 그랜드하얏트 호텔에서 국내 주요 그룹 총수들과 만난 트럼프 대통령. 사진=연합뉴스
# 간담회 앞두고 긴장감 역력
갑작스러운 초청을 받은 기업들은 긴장감이 역력했다. 겉모습은 한미 경제협력 방안을 논의하는 자리였지만, 사실상 미국 대통령이 한국 재계 총수를 한 자리에 모아 ‘원하는 바’를 전달할 것이란 관측이 지배적이었기 때문이다. 실제 트럼프 대통령은 앞서 일본이나 영국 등을 방문했을 때도 현지 기업인과 만나 직접적으로 “미국에 대한 투자를 강화해 달라”고 압박한 바 있다.
여기에 초청된 기업들은 5대 그룹 총수 외에도 CJ·롯데·신세계·SPC·농심·동원 등 재계 순위와 관계없이 다양한 업계가 대거 포함된 점도 눈길을 끌었다. 한 재계 관계자는 “일반적으로 재계와 방한하는 정상간 간담회는 재계 순위로 참석자가 정해진다”며 “이번에는 미국이 어떤 기준으로 초청했는지는 알려지지 않았다. 다만 대미 투자를 진행했거나 예정인 기업들, 미국 기업을 인수한 그룹 등이 공통적으로 초청된 만큼 간담회 성격을 어느 정도 예상할 수 있었다”고 말했다.
이 때문에 일부 기업들 사이에선 간담회를 앞두고 투자 약속 등 ‘선물 보따리’를 준비해야 하는지 눈치를 살피는 모습도 보였다. 트럼프 대통령은 취임 이후 ‘아메리카 퍼스트’ 정책을 추진하면서 해외 국가를 상대로 지속적으로 미국에 공장을 세울 것을 압박해왔기 때문이다. 특히 한국에는 무역 불균형 문제를 끊임없이 제기하면서 한국산 수입품에 대한 관세 및 긴급수입제한 등을 압박 카드로 앞세웠고, 이후엔 투자 확대 ‘청구서’를 여러 차례 발동했다.
실제 한국은행에 따르면, 지난해 우리나라의 대미 직접투자는 940억 달러를 기록하며 역대 최고치를 경신했다. 그밖에 간담회 직전까지 미-중 무역 분쟁이 격화됐었던 만큼 이와 관련해 ‘전선 동참’ 요구가 나올 가능성도 거론돼 이에 대한 대응 방안 마련에도 고민이 깊었던 것으로 전해졌다.
미국에서 대규모 사업을 추진 중인 일부 유통, 식품업계가 투자 카드를 준비할 것으로 알려졌지만, 정작 만반의 대비를 한 대표적인 기업은 LG로 꼽힌다. 이번 간담회에선 구광모 회장 대신 권영수 (주)LG 부회장이 대리 참석했는데, 이날 대리 참석한 기업은 LG와 한진이 유일했다. 다만 한진은 해외 출장 중인 조원태 회장을 대신해 우기홍 대한항공 부사장이 자리했다.
이를 두고 재계에선 이동통신사업에서 화웨이 장비를 쓰고 있는 LG가 트럼프 대통령에게 화웨이와의 사업 관계를 설명하기 위해 전략적으로 준비한 것으로 분석하고 있다. 대리 참석한 권 부회장은 지난해 7월 (주)LG로 옮기기 전까지 LG유플러스 최고경영자를 맡았다. 간담회 직후엔 LG유플러스가 지난주 용산 미군기지 밖 부근 이동통신 기지국 10여 곳에서 중국 화웨이 장비를 다른 회사 장비로 교체했던 사실도 알려졌다. LG유플러스 측은 “장비 교체는 민감한 내용이라 구체적으로 확인해줄 수 없다”는 입장이지만, 트럼프 대통령 방한을 의식했던 게 아니냐는 관측이 나오고 있다.
# ‘사업가 화법’ 트럼프 투자 확대 요구에 재계는 고민
트럼프 대통령은 재계 총수들을 ‘한국의 경영 천재(business genius)’라고 표현하면서 간담회 내내 그동안의 대미 투자에 대한 감사 인사를 전했다. 앞서 재계를 긴장케 했던 ‘폭탄급 청구서’는 나오지 않았지만 재계에선 “강도만 달랐을 뿐 사실상 투자 요구가 핵심”이라고 보고 있다. 다른 재계 관계자는 “상대방을 칭찬하고 이후 원하는 것을 우회적으로 요구하는 건 ‘사업가 트럼프’의 전형적인 화법으로 이미 잘 알려져 있다”며 “재계 총수들을 향한 찬사 뒤에는 사실상 직접적인 요구가 있었다”고 말했다.
실제 트럼프 대통령은 간담회에서 바로 앞 테이블에 앉은 이재용 삼성전자 부회장과 정의선 현대차그룹 수석부회장, 최태원 SK그룹 회장, 손경식 CJ그룹 회장을 자리에서 일어서게 한 뒤 “훌륭한 기업인들”이라며 직접 감사의 뜻을 전했다. 특히 지난 5월 백악관에서 단독으로 만났던 신동빈 롯데 회장을 살뜰히 챙기는 모습도 보였다. 다른 총수들과는 악수를 나눴지만, 신 회장과는 손을 맞잡고 들어 올리며 친근감을 보였고 기념 사진 촬영 때는 자신의 옆자리에 서게 했다. 최근 롯데는 한국 기업 가운데 대미투자에 가장 적극적인 곳으로 꼽히고 있다.
간담회에 참석했던 기업들은 이후 대미 추가 투자를 고민하고 있는 것으로 전해진다. 신동빈 회장은 간담회에 참석하면서 “(투자를) 몇 가지 고민하고 있다”고 말했고, 이후 롯데그룹 측은 “로스앤젤레스와 샌프란시스코에 호텔 사업을 추진하고 있다”고 공식화했다. 손경식 CJ그룹 회장 역시 “식품·물류 중심으로 최대 10억 달러를 추가 투자할 것”이라고 밝혔지만 간담회 직후 CJ 측은 “구체적인 규모와 계획은 조금 더 검토해 봐야 한다”고 전했다.
재계에선 간담회 전후로 직접적인 투자 계획을 밝히지 않은 그룹들도 조만간 다른 움직임을 보일 수 있다는 관측을 내놓고 있다. 특히 미-중 무역 분쟁에 직간접적으로 연결된 삼성전자와 SK그룹, LG그룹, 미국의 수입 자동차 관세 이슈를 가진 현대차그룹 등이 거론된다. 다른 재계 관계자는 “트럼프 대통령이 시진핑 중국 국가 주석과 만남을 가진 뒤 ‘휴전’ 선언을 했지만 근본적인 문제가 해결된 건 아니다”라며 “기업들의 투자는 손익에 따라 이뤄지지만 미국과의 ‘관계’를 전혀 신경 쓰지 않을 순 없다”고 말했다.
현재 삼성전자는 미국 사우스캐롤라이나주에 가전 공장을 건설하고 가동을 준비하고 있다. 내년까지 텍사스 오스틴 반도체 공장에 15억 달러를 투자해 생산 설비를 확충한다는 계획이다. SK그룹은 미국 서부, 텍사스, 동부 등에 진출해 있다. 최근에는 조지아주에 전기차 배터리 공장을 짓는다. 장기적으로는 총 50억 달러가 투입된다.
LG전자는 지난 5월 미국 남부 테네시주 클락스빌에서 세탁기공장을 준공했다. 현대차는 앨라배마에 2005년부터 생산 공장을 가동해 왔는데, 추가 투자가 이뤄질 가능성도 거론되고 있다. 앞서의 재계 관계자는 “현재 미국 시장 상황을 보면 주요 해외 국가들 가운데에서도 사업하기 좋은 곳으로 꼽힌다”면서도 “다만 국내 여건도 고려해야 하기 때문에 국내 주요 그룹들의 대미 투자 확대는 신중하게 추진될 것”이라고 전망했다.
문상현 기자 moon@ilyo.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