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시 드라마=황금거위’ 옛말…수백억 적자에 시간 변경 또는 예능 배치 돌파구 모색
하지만 시대가 바뀌었다. 더 이상 편성은 시청자와의 약속이 아니다. 시청률 추이와 파일럿 프로그램의 유무에 따라 언제든 유동적으로 바뀔 수 있다. 시청자들도 굳이 딴죽 걸지 않는다. 다채널 시대, 재미없으면 채널을 돌리면 그만이다. 오히려 “재미없으니 폐지하라”고 시청자 게시판에 글을 올린다. 이른바 ‘편성 파괴 시대’다.
# 지상파의 몰락
편성의 중요성이 줄어든 것은, 지상파의 영향력 약화와 직결된다. ‘9시 뉴스, 10시 드라마, 11시 예능’ 편성은 오랜 기간 이어진 하나의 전통과 같았다. KBS, MBC, SBS는 이 시간대에 각기 다른 드라마와 예능 등을 배치하며 맞불을 놓았다. 그 안에서 치고받으며 ‘그들만의 리그’를 펼쳤다.
하지만 케이블채널, 종합편성채널이 득세하며 지상파의 아성은 급속도로 무너졌다. 지상파의 시청률을 뛰어넘는 타 채널 콘텐츠가 속속 등장했다. “지상파는 볼 게 없다”는 뼈아픈 질책도 이어졌다.
MBC 월화드라마 ‘검범남녀 시즌2’는 시즌제 드라마의 성공 모델을 제시하고 있다. 사진 출처 = ‘검법남녀 시즌2’ 홈페이지
플랫폼이 다양해지면서 굳이 본방송을 챙겨볼 필요도 없어졌다. IPTV를 활용해 언제든 보고 싶은 방송을 찾아볼 수 있고, 스마트폰을 기반으로 한 VOD(주문형비디오) 시장도 활성화됐다. 굳이 TV 앞에 앉아 있을 이유가 없어진 것이다. 시청률의 하향평준화 역시 당연한 수순이었다.
지상파에는 장수 예능도 즐비하다. 드라마는 통상 3∼6개월 단위로 바뀌지만, 인기 예능은 5∼10년도 거뜬하다. 웬만해서는 프로그램을 폐지하거나 편성을 바꾸지 않는다. ‘MBC=11번’, ‘KBS=7번’처럼 시청자들이 부지불식간 인지하고 있는 시청 패턴에 변화를 주는 것을 부정적으로 봤기 때문이다.
하지만 시즌제 콘텐츠가 시장을 주도하며 상황은 달라졌다. 대중은 더욱 빠르게 변하는 트렌드에 맞춰 쉽게 마음을 바꾸기 시작했다. 조금만 지루해도 채널은 금세 돌아간다. 그들에게 채널의 인지도는 그리 중요치 않다. 그저 “재미있나”에만 초점을 맞춘다. 전통적인 패턴을 고수하던 지상파가 시즌제 드라마나 예능도 들춰보며 편성에 손댈 수밖에 없는 이유다.
# 드라마 지상주의의 민낯
지상파의 가장 큰 수익원 중 하나는 드라마였다. 100억 원에 육박하는 제작비가 들지만, 스타들이 출연하는 드라마에는 굵직한 광고가 붙고 제작지원 역시 활발했다. 여기에 한류 바람을 타고 전세계 각지로 수출되며 ‘황금알을 낳는 거위’가 됐다. 하지만 케이블, 종편채널도 드라마를 만들고 웹 드라마 시장까지 커지며 뻔한 소재를 다룬 지상파 드라마는 점차 외면받기 시작했다. 게다가 웃돈을 얹어주는 타 채널로 스타들이 넘어가며 지상파가 무너지는 속도가 빨라졌다.
결국 SBS는 지난 1일부터 수십년 동안 이어오던 월화극을 중단시키고 예능 ‘동상이몽’을 전진 배치했다. SBS는 “여름 시즌 월화 오후 10시 시간대에 드라마 대신 예능을 편성한다”며 “선진 방송시장인 미국도 여름 시즌엔 드라마보다 다양한 장르를 편성하는 추세”라는 입장을 내놨다.
MBC 역시 월∼목 오후 10시 방송되던 드라마를 30여 년 만에 9시로 한 시간 당겼다. 게다가 향후 월화극 제작 잠정 중단을 검토하고 있다. 대신 금토극 신설을 논의 중이다. 금토극은 지상파의 위세를 피하기 위해 tvN이 시도했다가 케이블 드라마 최초로 20% 고지를 밟은 ‘도깨비’ 이후 포기한 시간대다. 지상파가 굳이 이 시간대로 자리를 옮기는 것은 경쟁을 최소화하며 새로운 돌파구를 모색하기 위함이다. 앞서 SBS가 선보인 금토극 ‘열혈사제’가 20% 넘는 시청률을 거두며 성공에 방점을 찍은 것도 하나의 요인이 됐다.
SBS는 지난 1일부터 수십년 동안 이어오던 월화극을 중단시키고 예능 ‘동상이몽’을 전진 배치했다. 사진=SBS ‘동상이몽’ 방송 화면 캡처
한 방송사 관계자는 “지상파가 자존심을 내세우는 것을 거둬들이는 수준을 넘어 이제는 사활을 걸고 새로운 캐시플로를 창출해야 하는 지경에 이르렀다”며 “지상파 대부분이 드라마 제작으로 수백억 원의 적자를 보고 있기 때문에 향후 드라마 제작편수는 더욱 줄어들 것으로 예상된다”고 말했다.
# 꼼수 편성
방송사들이 편성에 민감한 이유는 간단하다. 시청률에 직접적 영향을 줄 수 있기 때문이다. 타사 드라마보다 5분만 먼저 시작해도 선점 효과 덕분에 시청률 우위를 점할 수 있다. 이런 폐단을 방지하기 위해 각 방송사 간부들은 한데 모여 프로그램 시작 시간뿐만 아니라 러닝타임까지 맞추는 합의를 보기도 했다. 괜한 출혈 경쟁을 피하자는 취지다.
하지만 지상파의 라이벌이 지상파가 아닌 타 채널이 되면서 무한경쟁시대에 돌입했다. 지상파끼리 입을 맞춘다고 해서 시장을 좌우할 수 있는 환경이 아니기 때문이다. 그런 이유로 SBS는 ‘동상이몽’을 타사 드라마와 맞붙게 하는 승부를 띄웠고, 편성 변경 첫 주 10% 시청률을 돌파하며 전략을 성공시켰다.
이에 앞서 SBS는 간판 예능프로그램인 ‘미운 우리 새끼’를 3부작으로 쪼개는 ‘꼼수’를 부렸다. 지상파는 중간광고가 허용되지 않기 때문에 최근 지상파들은 인기 프로그램을 아예 2부작으로 나눠서 방송하는 ‘유사 중간광고’를 통해 수익을 높이고 있다. 이런 상황 속에서 SBS는 시청률 20% 안팎을 기록하는 ‘미운 우리 새끼’를 3부작으로 나눠 방송하며 한 차례 더 유사 중간광고를 넣을 기반을 마련했다.
또 다른 방송 관계자는 “타 방송사뿐 아니라 언론의 질투도 심했지만 결과적으로 SBS는 이를 정착시켜 수익을 창출하는 데 성공했다”며 “결국 이런 사례는 향후 각 방송사들이 또 다른 수익을 내기 위해 언제든 꼼수 편성을 할 수 있는 문을 열어준 셈”이라고 꼬집었다.
김소리 대중문화평론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