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호텔신라 직원들은 노조설립 신청을 한 이유에 대해 이건희 삼성 회장의 큰딸인 이부진 부장 의 전횡 때문이라고 주장했다. | ||
지난 3월25일 오후 4시45분 호텔신라 직원 임아무개씨 등 4명은 서울 중구청에 노조 설립 신고서를 제출했다. 이들은 신고서를 제출한 뒤 발표한 성명서에서 노조설립 이유에 대해 ‘이부진 부장의 전횡’ 때문이라고 주장했다.
이들에 따르면 호텔신라는 이부진 부장이 호텔신라에 입사한 후 20대 초반 여성으로 구성된 ‘정규직 드림팀’이라는 조직이 삼성 일가와 VIP 고객수행 등을 주업무로 하면서 다른 직원들보다 전폭적인 대우를 받고 있다고 주장했다.
물론 금전적인 문제도 있었다. 이들은 ‘낮은 임금(롯데호텔의 70% 정도)에 대한 불만’도 노조 설립을 추진하게 된 이유라고 주장했다.
이들은 노조 설립과 함께 ▲정규직 드림팀과 정규직, 비정규직간 차별 해소 ▲실질 임금 보상 ▲전횡을 일삼는 삼성 일가 간부 퇴진을 요구로 내걸었다. 다른 회사에 없는 ‘정규직 드림팀’이라는 특별한 신분 규정에 대해 직원들의 불만이 상당했음을 시사하는 대목. 이 드림팀이라는 ‘개혁 별동대’는 이 부장이 주도하는 조직이라는 게 직원들의 말.
게다가 직원들이 퇴진을 요구한 ‘삼성 일가 간부’의 대상은 이부진 부장 외에는 없다. 노조 설립을 극력 저지해온 삼성그룹의 정서상 노조 설립의 직접적인 이유로 이 부장의 이름이 언급돼 삼성으로선 뼈아픈 일이 아닐 수 없다.
이 부장이 임원급도 아닌데 왜 이번 사태를 몰고온 원인제공자로 지목된 것일까.
사실 이 부장은 지난해부터 호텔신라 경영개혁에 임원급 이상의 발언권을 가졌다는 사실이 화제가 됐었다. 그를 가리켜 ‘임원급 부장’이란 표현도 공공연히 오갔다는 게 내부 관계자들의 전언.
호텔신라의 개혁작업은 이부진 부장이 입사한 후 지난해 2월 말 이건희 회장의 신임이 두터운 것으로 알려진 허태학 전 에버랜드 사장(현 삼성석유화학 사장)이 호텔신라로 오면서 본격화됐다. 실제로 지난해 정기 주총을 계기로 호텔신라는 국내 이사진 전원을 교체하는 등 개혁 드라이브를 걸었다.
하지만 1년이 지난 지금, 이 부장의 경영수업을 담당할 것으로 예상됐던 허 사장은 삼성석유화학 사장으로 전보됐다. 또 경영개혁의 성과를 따지기에는 1년이란 시간이 짧은 듯 호텔신라의 지난해 실적은 기대에 못미치고 말았다.
호텔신라는 지난 2000년 1백53억원이던 당기순익이 2001년에는 1백억여원으로 줄어든데 이어 개혁이 본격 시동을 건 지난해에는 64억원대로 주저앉았다. 물론 매출도 소폭이긴 하지만 줄었다. 그래서인지 증권사 애널리스트들도 호텔신라에 대한 매수 의견을 유지하거나 하향 조정하는 등 경영개혁 실적에 대한 증권가의 평가도 좋지 않았다.
주가로 최고 경영자의 성과를 평가하고 있는 삼성그룹의 인사 관행에 비추어 볼 때 지난해 호텔신라의 주가는 뒷걸음질친 것과 허태학 사장이 1년 만에 퇴진한 것은 많은 뒷말을 낳았다.
호텔신라는 지난해 삼성그룹의 14개 상장 계열사 중 주가가 마이너스 성장한 3개 계열사 중의 하나. 지난해 초 9천원대로 떨어진 주가는 연말에 5천원대로 떨어졌고 허 사장 퇴임 뒤에는 한때 4천원대 밑으로 추락하는 등 하락곡선을 그었다.
당연히 허 사장의 퇴진에 대해 문책성 인사라는 주변의 평가도 뒤따랐다. 삼성석유화학이 그룹의 주력이 아니라는 점에서도 그의 이동은 예사롭지 않다. 그러나 이에 대해 “삼성은 허 사장의 이동은 호텔신라의 구조조정이 마무리됐고 석유화학 분야의 경쟁력 강화가 필요했기 때문”이라고 반박했다.
문제는 이런 매출 부진과 수익성 악화의 와중에 노조설립 파문까지 터졌다는 점. 삼성그룹의 경우 지금도 노조 설립에 대해 알레르기 반응을 보이고 있다. 특히 이번 호텔신라 노조 설립 추진세력쪽에선 노조설립에 나선 이유를 이부진 부장의 ‘전횡’이라고 규정하고 있어 그룹측을 난감하게 하고 있다.
노조설립신고서를 낼 때만 해도 이번 사태는 ‘유령노조’ 설립이라는 변수가 등장, 복잡한 양상으로 전개될 가능성이 높았었다.
민주노총과 함께 노조 설립에 나선 임아무개씨 등이 노조설립 신청서를 제출하기 전에 다른 직원들이 먼저 노조설립 신청서를 서울지방노동청에 제출한 것. 이 신청서는 임씨 등이 신청서를 내기 전인 지난 25일 오후 4시에 접수된 것으로 확인됐다.
이에 대해 민주노총측과 임씨 등은 “전형적인 ‘삼성식 유령노조’”라며 신청서 반려를 주장했다.
현행법상 1사1노조 원칙이 적용되기 때문에 1개 회사에서 복수의 노조설립신고서가 접수될 경우 선착순으로 허가를 내주도록 돼 있다.
따라서 나중에 신고서를 제출한 임씨 등의 설립신청서는 효력이 없는 셈. 이렇듯 복잡한 논쟁이 예상되던 이 문제는 엉뚱한 방향으로 흘렀다.
노조설립신고서를 제출했던 임씨 등 주도자 4명이 신고서 제출 이후 외부와 연락이 두절된 것. 지난 2월 부터 함께 노조설립을 준비했던 민주노총 관계자와도 일체 연락이 끊긴 이들은 다음날인 27일 오후 노조설립 신청을 스스로 취하한 것으로 확인됐다.
이에 대해 민주노총에선 “삼성쪽에서 임씨 등 노조 설립자들과의 접촉을 강제로 막은 채 노조 설립을 무산시키고 있다”고 주장하고 있다.
상황이 이렇게 전개되자 ‘노조 불가’를 외쳐온 삼성과 일전불사의 의지를 다져온 민주노총쪽에서 허탈해하고 있다.
내부의 노조 설립 세력이 사라져 버려 노조탄압이라고 말할 상황 자체가 성립이 안되는 것.
하지만 이번 파문을 불러 일으킨 삼성 오너 경영인에 대한 비판은 삼성에 고스란히 부담으로 남았다는 게 재계의 대체적인 시각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