故 전미선 배우의 유작…“스크린 속 대장부로 기억되기를”
영화 ‘나랏말싸미’ 스틸컷. 사진=메가박스중앙㈜플러스엠 제공
개봉까지 다사다난했던 영화 ‘나랏말싸미’의 언론시사회가 15일 오후 서울 메가박스 코엑스에서 열렸다. 오랜 기간 고생 끝에 만들어 낸 이야기가 대중들의 앞에 첫 선을 보이는 만큼 떨리고 설레는 자리가 됐어야 했다. 그러나 이날 시사회와 기자간담회는 영화가 다루는 역사 그 이상으로 무거운 분위기에서 진행됐다. 함께 출연했던 배우의 빈자리 탓이었다. 이날 기자간담회에 함께 한 배우들은 모두 검은 넥타이를 매고 자리했다.
간담회 전에는 영화사 두둥의 오승현 대표가 무대에 올라 지난달 세상을 떠난 고 전미선 배우를 추모하는 시간을 가졌다. 오 대표는 “최근 얼마 전까지만 해도 저희와 함께 했던 전미선 님의 비보를 접하고 큰 충격에 빠졌다. 영화가 잘되고 안 되고를 떠나 고인을 애도하는 게 예의라고 생각했다”고 말문을 열었다.
이어 “개봉을 연기해야 한다는 이야기도 나와서 유족과 상의했다. 그러나 고인의 마지막 모습이 담긴 이 영화를 많은 분들이 보시고 최고의 배우로 기억하는 것이 맞다고 생각했다”며 “다만 개봉을 하되 홍보 일정을 최소화하기로 결정했다. 저희들의 진심이 왜곡될까 우려도 했지만 여러분들이 함께 해주시리라 믿는다”고 조심스럽게 덧붙였다.
배우 송강호가 15일 오후 서울 강남구 삼성동 메가박스 코엑스점에서 열린 ‘나랏말싸미’(조철현 감독) 언론시사회에 참석해 취재진의 질문에 답하고 있다. 사진=최준필 기자
극중 세종대왕 역을 맡은 배우 송강호는 “영화를 보면서 이루 말할 수 없는 착잡함을 느꼈다. 이 영화가 슬픔을 딛고, 아름다운 이야기로 남았으면 한다”고 말했다. 송강호는 전미선과 함께 세종대왕과 소헌왕후로 극중에서 부부의 연을 맺어 더욱 각별할 수밖에 없었다.
이날 간담회에서 송강호는 “너무나도 안타깝고 슬프다. 감독, 모든 스태프와 배우들이 슬픔 속에서 시간을 보내고 있다”며 전미선을 그렸다. 그는 또 “영화 속 소헌왕후의 천도제 장면을 찍을 때는 하필이면 저희 아버님이 돌아가신 날이었다. 촬영을 끝내고 서울로 올라온 기억이 있는데, 영화 속과 지금의 상황도 그러니 착잡한 마음이 있다”고 씁쓸한 표정을 지었다.
극중 세종을 도와 훈민정음 창제의 한 축을 마련한 신미 스님 역의 박해일도 “전미선 선배님의 마지막 작품을 해서 영광이다”라며 “촬영할 때의 기억이 생생하다. 그게 얼마 되지 않았는데… 선배님께서 이 자리에 함께 하지 못한 것이 안타깝다”고 말했다.
이날 기자간담회에 참석한 조철현 감독은 “이 영화의 기본 콘셉트는 한 명의 대장부와 두 명의 졸장부라고 생각했다. 물론 대장부는 소헌왕후”라며 “극중 전미선 배우가 대사를 첨가하기도 했다. 신미와 세종이 헤어졌을 때 ‘백성들은 더 이상 당신을 기다려주지 않습니다’라는 말은 전미선 배우가 직접 만든 대사다. 세상의 모든 지도자들에게 ‘여성’이 할 수 있는 말이 아닌가 싶다”고 고인을 그렸다. 조 감독은 그를 떠올리며 끝내 말을 잇지 못하는 모습을 보여 객석을 안타깝게 만들기도 했다.
조철현 감독이 15일 오후 서울 강남구 삼성동 메가박스 코엑스점에서 열린 ‘나랏말싸미’(조철현 감독) 언론시사회에 참석해 취재진의 질문에 답하고 있다. 사진=최준필 기자
‘나랏말싸미’는 모든 것을 걸고 한글을 만든 세종과 불굴의 신념으로 함께한 사람들, 역사가 담지 못한 한글 창제의 숨겨진 이야기를 그린 영화다. 훈민정음 창제에 있어 아직까지는 학계에서 받아들이고 있지 않은 ‘신미 스님’의 이야기가 더해지면서, 역사와는 또 다른 궤로 대중들에게 다가서고 있다.
조철현 감독은 “신미 스님의 존재에 대해서는 이 영화를 만들기 전부터 알고 있었지만 확신할 수는 없었다”라며 “이후 신미 스님의 행적을 좇던 가운데 합천 해인사 대장경 테마파크를 갔다가 ‘대장경 로드’를 보게 됐다. 대장경이 인도에서 티베트를 거쳐 중국 송나라, 거란, 여진, 고려, 일본까지 전파되는 과정이었다. 저것이 대장경 로드일 뿐 아니라 표음문자의 이동경로일 수도 있겠다는 영감이 떠올랐다”고 설명했다.
박해일은 “감독님을 통해 신미라는 인물을 처음 알게 됐다. 영화를 관람해주시는 많은 관객들에게도 낯설 것이고, 어떻게 받아들일까 궁금함이 커질 캐릭터라고 생각했다”고 설명했다. 그러면서 “신미는 문자에 능통하다는 점이 있기 때문에 인도학과 교수님께 산스크리트 어를 최대한 배울 수 있을 만큼 배웠다”며 캐릭터와 하나가 되기 위한 노력의 뒷이야기를 풀기도 했다. 극중에서 신미는 산스크리트 어, 티벳 문자 등 다양한 문자와 언어에 통달한 승려로 등장한다.
배우 박해일이 ‘나랏말싸미’ 언론시사회에 참석해 취재진의 질문에 답하고 있다. 사진=최준필 기자
극중 시대 배경은 숭유억불로 인해 불승들이 ‘개’ 취급을 받으며 억압을 받던 때다. 신미 스님이라는 새로운 캐릭터를 내세우면서 시대적 배경을 무너뜨리지 않는 치밀한 설정이 필요했다. 이에 대해 박해일은 “억불정책이 주를 이루던 시대에 세종대왕은 애민 정신이 있었고 문자가 중요한 목적이었다. 이미 불경이라는 소재로 본인만의 문자를 만들고 있었을 신미는 문자를 통한 (불교 전파) 목적이 있지 않았을까”라며 극중 신미 스님과 세종대왕의 자연스러운 만남과 그 타협 과정을 설명했다.
박해일이 그려낸 신미가 역사 속에서 등장하지 않는 온전히 새로운 인물이라면, 송강호가 그려낸 세종대왕은 이미 익숙한 인물이지만 그간 사극에서 볼 수 없었던 ‘세종이란 인간’ 그 자체의 고뇌를 그려내 균형을 맞췄다. 이에 따라 관객들은 새로운 인물 신미와 함께, 익히 알고 있던 인물 세종의 내면 속 새로운 모습을 함께 관찰하게 되는 것이다.
배우 송강호가 ‘나랏말싸미’ 언론시사회에서 취재진의 질문에 대답하고 있다. 사진=최준필 기자
송강호는 “세종대왕은 드라마나 영화를 통해 가장 많이 알려진 성군이다. 우리가 봐 온 모습도 있지만, 스스로 머리 속에 그리는 모습도 있을 거라고 생각한다. 그래서 그런 쪽의 모습을 창의적 파괴를 통해 새롭게 만들고자 했다”며 “한글을 만드는 과정 속에서의 고뇌, 군주로서 외로움에 대한 초점은 아마 처음이지 않을까. 그런 점에서 이 영화에 특별함이 있을 것 같다”고 설명했다.
한편 영화 ‘나랏말싸미’는 문자와 지식을 권력으로 독점한 조선 시대, 모든 신하의 반대를 무릅쓰고 훈민정음을 창제한 세종의 마지막 8년을 그리는 영화다. 세종과 스님 신미가 함께 한글을 만들었다는 설을 소재로 한 작품으로 송강호가 세종, 박해일이 신미 스님, 전미선이 소헌왕후를 연기했다.
앞서 개봉을 앞두고 출판사 나녹 측과 저작권 소송이 벌어지기도 했다. 이에 대해 오승현 영화사 두둥 대표는 “영화가 개봉되면 아시겠지만 이 작품은 순수 창작물”이라며 “오히려 그 쪽과 합의를 않고 법원의 판단을 기다리고 있다”고 단호하게 말했다. 영화 ‘나랏말싸미’는 오는 24일 개봉한다. 110분, 전체관람가.
김태원 기자 deja@ilyo.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