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이지 않는 공포’보다 ‘보이는 공포’가 더 두렵고 강렬하다
영화 ‘미드소마’ 스틸컷
이렇게 어느 정도 예상을 하면서도 우리가 ‘미드소마’로 또 속는 것은 단순히 ‘유전’ 감독의 차기작이기 때문만은 아닐 것이다. 햇빛이 하얗게 부서지는 백주 대낮에 사람 머리도 부서질 거라곤 아무도 생각하지 않을 테니까. 작열하는 태양 아래이기 때문에, 파란 하늘과 초록색 잔디 사이로 훈풍이 불며 꽃잎 사이를 간질이고 있기 때문에 영화는 더욱 선명하고 끔찍하게 느껴진다. 공포 스릴러 영화는 어둡고 음침해야 한다는 클리셰가 사라진 만큼, 그것을 바탕으로 한 모든 예상도 뒤집히고, 또 산산조각날 수밖에 없다.
영화 ‘미드소마’는 실재하는 스웨덴의 세계 최고 규모 하지 축제를 모티브로 삼고 있다. 감독 아리 애스터는 2013년부터 스웨덴의 민속과 토속 신앙 전통을 조사해 ‘미드소마’의 바이블을 만들어 냈다고 밝혔다. 이 과정에서 바이킹의 고문 방법을 포함한 악마적인 풍습의 연구가 더해졌고, 이 연구는 영화에서 매우 적재적소에 사용됐다.
감독의 전작 ‘유전’에서 그랬듯 ‘미드소마’ 역시 인간 사이의 관계에 초점을 맞추고 있다. 유전이 거부하거나 선택할 수 없는 ‘혈연’이라는 선천적인 관계를 그렸다면, 미드소마는 언제든지 끊을 수 있지만 일말의 ‘정’으로 인해 아슬아슬하게 매달려 있는 타인 간의 후천적인 관계를 다룬다는 게 다른 점이다. 그러나 관계에 대한 집착에 스포트라이트가 쏟아지는 것만 보아도 같은 감독의 작품이란 걸 어렵지 않게 느낄 수 있다.
영화 ‘미드소마’ 스틸컷
작중 대니(플로렌스 퓨 분)는 타의에 의해 선천적인 관계가 모두 끊긴 뒤 유일한 끈인 남자친구 크리스티안(잭 레이너 분)에게 집착하는 모습을 보인다. 크리스티안은 이런 대니에게 질려하면서도 불안함에서 비롯된 정으로 애써 관계를 유지하고 있다.
마지막에 대니에게 주어진 선택의 길도 이 같은 관계를 바탕으로 이뤄진다. 언제 끊어질지 모르는 아슬아슬한 관계의 줄타기를 할 것인지, 혈연 아닌 혈연으로 또 다른 관계를 성립할 것인지. 이처럼 미묘하게 끊어짐과 이어짐이 교차하는 순간, 스크린과 유리돼 있던 관객들의 시선도 자연스럽게 그 위로 옮겨진다. 마치 태양처럼 하늘에서 아래를 굽어보는 카메라 워크도 이를 따라 토속신앙 속의 마을 ‘호르카’ 주민들 속으로, 크리스티앙과 대니의 앞과 뒤로 전환되는 것을 볼 수 있다. 이로써 관찰자에 불과했던 관객들도 어느 순간부터 호르카 주민들과 같은 눈높이로 섞여들게 되는 것이다.
관객이 섞여들기 시작하면 그때부터 본격적인 아리 애스터의 영화가 시작된다. 음침하고, 우울하며, 초자연적인 마법이 잠식하고 있던 ‘유전’과 달리 ‘미드소마’는 시종일관 밝고, 아름다우며, 모든 것은 철저히 인간의 손에서 시작되고 끝맺는다.
영화 ‘미드소마’ 스틸컷
아리 애스터 감독은 “눈부시게 아름다우며 부끄러움이 없는 햇빛 속에서 공포와 두려움이 커지는 이야기를 만들었다”고 ‘낮 보다 더 무서운 대낮 공포’의 탄생을 설명했다. 이처럼 배우들의 솜털까지 보일 것 같은 밝은 햇살 아래서 벌어지는 모든 일들은 그 배경 때문에, 그리고 누구를 탓하기 어렵다는 것 때문에 더욱 악몽처럼 느껴지게 되는 것이다.
신도, 악마도 없는 이곳에서 유일한 적은 공동체를 잠식하고 있는 ‘전통’ 뿐이다. 오히려 그 곳에서 주인공 무리는 반대로 이질적인 존재에 불과하다. 두려운 전통과 하나가 돼 새로운 권력을 누릴 것인지, 이질적인 존재로 배척당할 것인지의 갈림길은 캐릭터의 성장으로도 이어진다. 그렇기에 관객들은 현대인의 시각과 상식으로 받아들일 수 없는 전통임에도 불구하고 세뇌된 것처럼 그 당위성을 찾을 수밖에 없게 되는 것이다.
‘유전’에서 그랬듯 감독은 ‘미드소마’에도 곳곳에 상징적인 요소를 박아두었다. 호르가 마을 주민들이 사용하는 가상의 언어 ‘아펙트(Affekt)’와 룬 문자, 복잡하게 그려진 벽화 등에는 앞으로 벌어질 모든 이야기가 숨겨져 있다. 한 번 만으로는 온전한 이해가 불가능하니 두 번, 세 번 보게 하는 감독의 꼼수(?)라고 표현해도 과언이 아니지 않을까. 스토리의 당위성과 함께 곳곳에 숨겨진 이 같은 이스터 에그를 찾아보는 것도 공포 속에서 발견할 수 있는 또 다른 재미가 될 것이다.
한편 ‘미드소마’는 90년에 한 번, 9일 동안 이어지는 한여름 미드소마 축제에서 벌어지는 일을 다룬 공포영화다. 가족을 잃고 슬픔에 잠긴 대니(플로렌스 퓨 분)가 조금씩 관계가 얼어붙고 있는 남자친구 크리스티안(잭 레이너 분)과 그의 친구들과 함께 스웨덴의 작은 마을 ‘호르가’에서 열리는 신비한 이교도 축제에 참여하면서 기이한 일들을 겪는 과정을 담았다. 깜짝 놀라게 하는 장면은 없지만, 고어의 정도가 강하고 또 강렬하다. 설마가 사람 잡는 스플래터에 주의. 147분, 11일 개봉. 청소년관람불가.
김태원 기자 deja@ilyo.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