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정계은퇴 - 위는 지난 92년 12월19일 DJ의 정계은퇴 기자 회견. 아래는 지난 연말 역시 은퇴를 선언하고 있는 이회 창 전 총재. | ||
지난 대선 이후 정계복귀 가능성을 계속해서 일축해왔음에도 이 전 총재 주변에는 언제나 정계복귀 가능성을 두고 물음표가 꼬리표처럼 따라다녔다. 연이은 대선 패배, 해외 ‘유학’으로 이어지는 일련의 행보가 김대중 전 대통령의 과거사와 흡사하기 때문이다. 이에 대해 한 정치권 인사는 “이 전 총재가 두 번의 대선에서 ‘연패’당했지만 그를 빼놓고는 국내 보수세력을 결집해 40% 이상의 지지율을 얻어낼 후보를 떠올리기가 쉽지 않기 때문”이라고 설명한다. 끊이지 않는 정계 복귀설의 근원은 바로 ‘대안부재론’이라는 지적이다.
한나라당의 한 중진 의원은 “현재 당권을 잡겠다고 뛰고 있는 주자들의 대부분은 대선후보가 되기엔 함량이 떨어지는 사람들”이라고 평가한다. 이 의원은 “불과 지난해 초만 해도 노무현 대통령을 가능성 있는 대권주자로 본 사람은 많지 않았다. 그러나 보수를 골자로 하는 우리 당내에서 그런 참신한 주자가 나올 가능성은 현재 거의 없어 보인다”고 지적했다. 이 의원은 “보수세력을 결집하는 데 있어 이 전 총재 만한 후보를 찾기란 쉽지 않다”며 이 전 총재의 ‘대권 삼수론’이 나오는 배경을 설명했다.
이 전 총재의 ‘대권 삼수’ 소문의 진원지를 ‘대안부재론’아닌 다른 곳에서 찾는 시각도 적지 않다. 이 전 총재의 후광을 입었거나 정권교체 이후 반사이익을 챙길 것으로 기대했던 몇몇 측근인사들의 아쉬움이 이른바 ‘삼수론’에 부채질을 하고 있다는 지적이다.
실제로 이 전 총재 측근으로 분류됐던 몇몇 의원들은 ‘이회창 대권 삼수론’의 진원지로 지적 받고 있는 상황이다. 뚜렷한 계보나 자금원 등을 찾기 힘든 일부 ‘친창파’의원들이 내년 총선을 전후로 심각한 정치적 위기를 맞을 수도 있다는 위기감에서 이회창 전 총재를 ‘기댈 언덕’으로 삼고 있다는 것이다.
▲ 가슴 아픈 유학길 - 왼쪽은 지난 93년 1월 대선패배의 아픔을 뒤로 하고 영국 유학을 떠나는 DJ. 오른쪽 역시 지난 3월16일 미국유학 길에 오르고 있는 이회창 전 총재. | ||
정치권의 다른 관계자는 “이 전 총재를 추종했던 인사들 중 일부는 현재 당내 각 당권주자 진영으로 들어간 상태”라며 “하지만 당권주자들도 이젠 ‘창심 논란’에 휩쓸리는 걸 부담스러워 하고 있어 아직도 제자리를 찾지 못한 친창파 인사들로서는 내년 총선을 생각하면 암담할 것”이라고 지적했다. 실제로 한 유력 당권주자 진영의 한 인사는 “이 전 총재 특보진 몇 명이 우리 의원에게 찾아와 ‘돕고 싶다’는 의견을 밝혔지만 거절당했다”고 밝히기도 했다.
그러나 이 같은 소문에 대해 이 전 총재 측근들은 “당치 않은 일”이라 입을 모은다. 이 전 총재 특보를 지낸 한 인사는 “우린 전당대회에 대해 관심도 없고 아무런 욕심도 없으며 이는 곧 ‘정치불개입’을 선언한 이 전 총재의 뜻이기도 하다”고 밝혔다. 이 인사는 “애꿎은 ‘창심’ 논란이 우리 특보 출신들을 괜한 소문에 시달리게 만들고 있다”고 덧붙였다.
‘친창파’로 불리던 한 의원은 다소 불편한 심기를 드러내기까지 했다. 이 의원은 “대선 당시 우리 당 후보를 위해 애쓴 것이 지금 와서 문제가 된다면 할말이 없다”며 “하지만 이 전 총재를 위해 누구보다 애쓴 의원들이 이 전 총재를 다시 옹립하려한다는 소문은 말도 안된다. 결국 당을 위해 가장 애쓴 사람들을 사지로 몰아넣겠다는 다른 세력의 모함으로 볼 수밖에 없다”고 토로했다. 결국 ‘삼수’를 거론하는 것은 이 전 총재 본인은 물론 ‘친창파’로 분류된 측근 인사들 모두를 ‘죽이는’ 일이란 것이다.
이 전 총재 핵심측근으로 분류됐던 한 초선 의원도 자신들이 ‘삼수론’의 진원지로 지목된 것에 대해 민감한 반응을 보였다. 이 의원은 “우리가 이 전 총재 당선을 위해 헌신한 것은 사실이지만 당 차원의 선거운동이었을 뿐이지 사리사욕을 채우자고 그랬겠나”라며 “정치판을 떠난 분(이 전 총재)을 우리가 팔아먹으면서 마치 그분이 없으면 당장 정치생명이 끊어지기라도 할 것처럼 처신한다는 게 말이 되나”라고 반문했다.
이 전 총재 선거운동에 적극적이었던 또 다른 의원은 이 전 총재 ‘삼수론’과 관련해 극도로 말을 아끼며 “논의할 가치조차 없는 일”이라 밝혔다. 그밖에 ‘친창파’로 분류된 여러 의원들은 ‘삼수론’과 관련해 자신들의 발언이 기사화되는 것마저 극도로 꺼리는 반응을 보였다.
▲ 화려한 복귀? - 지난 95년 8월, DJ는 정계복귀를 선언한 뒤 곧바로 새정치국민회의를 창당했다(왼쪽). 최근 정가에 이회창 전 총재의 ‘대권 삼수론’이 나돌아 눈길을 끈다. 그가 DJ의 뒤를 따를까. 96보도사진연감 | ||
이에 대해 이 전 총재 보좌역을 지낸 한 인사는 “우리들 중 어느 누구라도 이 전 총재와 관련한 말을 입에 담으면 득볼 것이 없다”라고 밝혔다. 이 인사는 “국민들 수준이 높아진 상황에서 책임지고 깨끗이 물러난 분을 거론하는 행태가 표심을 모으는 데 무슨 도움이 되겠는가”라고 반문했다.
한편 이 전 총재 ‘삼수론’과 관련한 또 다른 ‘소문’도 있다. 이 전 총재의 ‘대권 삼수’를 바라는 목소리가 이 전 총재 본인이 아닌 부인 한인옥씨에게 계속 전달되고 있다는 것이다. 이 전 총재의 일부 측근인사들과 이 전 총재의 후광을 원하는 인사들이 미국에 체류중인 한씨에게 전화를 걸어 ‘삼수’의 당위성을 역설한다는 것이 소문의 골자다.
이 전 총재를 가까이서 보좌했던 한 인사는 “이 전 총재 본인이 정치와 관련된 언행을 삼가고 있는 터라 일부 측근들 이외에 다른 인사들은 미국에 거주하는 이 전 총재에게 전화 한 통 걸기조차 부담스러운 실정”이라며 “안부를 묻고자 하는 여러 인사들이 대신 한인옥 여사에게 전화를 걸어 이 전 총재의 재기를 권하는 일이 있는 것으로 안다”고 밝혔다.
그러나 이 인사는 “‘너무 안타깝다. 한번 더 출마하시면 안되겠나’란 식의 인사말을 한 여사에게 전하는 것이 이상한 일은 아니지 않느냐. 그런 식의 위로는 할 수 있는 것 아닌가. 나라도 전화하면 그렇게 말할 것”이라고 덧붙였다.
대선 과정에서 이 전 총재와 한씨를 측근에서 보좌했던 한 인사도 “현역 의원들이나 이 전 총재 측근들이 한 여사에게 이 전 총재의 정계 복귀에 대한 말을 건넬 수는 있지만 단순한 인사치레일 것”이라며 “설사 한 여사에게 대권 삼수에 대한 청원이 쇄도한다 해도 이 전 총재의 의중을 뒤흔들만한 위력은 없을 것”이라 역설했다.
그러나 지난 대선 때 대 여권 공세에 적극적이었던 한 의원은 “지역구 수성이 여의치 않은 의원들이나 국회 입성을 노렸던 이 전 총재 주변의 인사들이 이 전 총재의 ‘공백’에 허탈해하는 것은 사실”이라며 “그런 사람들이 이 전 총재측에 안부인사를 하면서 ‘대권 삼수’에 대한 말을 건넨다면 그것이 단순한 인사치레이겠는가”라고 반문했다.
이 의원은 “이미 정계은퇴를 선언했다가 이를 뒤집고 복귀해 결국 당선된 DJ의 전례가 있어서 그럴지도 모른다. 하지만 달라진 의식의 유권자들이 ‘제2의 DJ’가 탄생하는 것에 과연 동조할지 곰곰이 따져봐야 할 것”이라고 지적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