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19년 건국 부정 이해할 수 없어…김원봉 서훈 문제는 통일 후 다루는 게 옳아
광복군동지회는 광복군의 나라사랑 정신을 계승하고 발전시키기 위해 지난 1965년 설립된 단체다. 설립 당시 회원이 550명에 달했지만 현재 생존자는 19명뿐이다. 이중 사회적 활동이 가능한 사람은 김 회장이 거의 유일하다. 한일 무역전쟁으로 양국 관계가 극한으로 치닫고 있는 가운데 일요신문이 김 회장을 만나 광복절의 의미를 되새겨봤다.
김영관 광복군동지회 회장. 박정훈 기자
―한일 무역전쟁으로 양국 관계가 극한으로 치닫고 있다. 광복절을 맞이하는 소회가 평소와는 다를 것 같다.
“한마디로 착잡하다. 일본이 침략 근성을 또 노출시켰다. 일본은 이웃 국가와 친하게 지내기보다는 침략한 역사가 더 많은 나라다. 그런 나라라는 것을 알고 일본을 대해야 한다. 일본을 규탄하면서 우린 그동안 뭘했는지 스스로도 반성해서 이 난국을 타파해야 한다. 이번 역경은 우리나라가 동북아 중심국가로 발돋움하기 위한 한 과정이라고 생각한다. 어려움을 이겨내기 위해 국민들이 손을 잡고 앞으로 나가야 한다.”
―광복군에 입대하게 된 계기는 무엇인가.
“만 20세 때 일본군에 징병됐다. 나는 일본인들이 조선인을 차별대우하는 것에 반감이 심했다. 일본 군대에 갈 수는 없었다. 징병된 후 마침 부대가 중국으로 이동했다. 임시정부에 합류하려고 일본군에서 탈출했다. 일본군이 주요 도로와 도시를 모두 장악하고 있어서 산악 지역으로만 이동했다. 이동하면서 풍토병에 걸려 죽다 살아났다. 광복군 주둔지에 도착해 입대하는데 애국가를 부르면서 눈물이 나더라. 목숨 걸고 온 보람이 있었다.”
―광복군으로 활동하며 기억에 남는 전투나 성과가 무엇인가.
“광복군은 전체 600명 정도 있었는데 중국 전역에 흩어져 있었다. 내가 입대한 부대는 총인원이 20명 정도였다. 내가 소속되어 있던 광복군 부대는 일본군과 대규모 전투를 벌인 적은 없었다. 일부 지역에서 일본군 초소를 습격하거나 하는 정도의 소규모 전투만 있었다. 나는 직접 전투에 참여해보진 못했다. 주로 중국군과의 협동작전, 선전활동을 했다. 일본말을 잘하는 사람이 많으니까 일본 포로를 심문하거나 일본군 통신 감청, 노획 문서 해석 등 정보수집 활동을 주로 했다.”
―일각에선 광복군 활동이 독립에 직접적인 도움이 되진 않았다고 평가절하하는 사람들도 있다.
“1943년 카이로 선언(한반도의 독립을 연합국으로부터 최초로 약속받은 국제선언)에서 우리나라가 독립을 약속받는 데 광복군 역할이 컸다. 당초 연합국은 우리나라 독립에 반대했다. 그런데 당시 중국 장개석이 광복군 활동에 상당히 깊은 인상을 받았다. 장개석이 미국과 영국을 설득해 우리나라 독립을 카이로 선언에 포함시키도록 했다. 광복군은 국내외 흩어져 있던 독립단체들을 단합시키는 역할을 했고, 국민들이 독립에 대한 희망을 품을 수 있게 해줬다. 해방 후에는 본국에 돌아와 국군 뿌리가 됐고 대한민국의 군맥(軍脈)을 잇게 했다.”
―일제 강점기 우리 국민들이 어떤 어려움을 겪었는지 생생한 경험담을 말씀해 달라.
“일본은 정책적으로 조선 사람을 내세워 조선인들을 관리했다. 요즘으로 치면 파출소에 소장은 일본인이 맡고, 순사는 조선 사람이 맡았다. 소장은 직접 나서지 않고 순사들이 악질적으로 같은 조선인을 괴롭혔다. 조선인들을 서로 이간질시킨 거다. 당시 순사가 온다고 하면 울던 애도 울음을 그친다고 했다. 학교에서 조선말을 쓰다 걸리면 혼났다. 공출이라는 이름으로 식기까지 가져갔다. 1944년 통계를 보니까 우리나라에서 생산된 쌀 중 63%를 일본으로 공출해갔다고 하더라. 당시 우리 국민은 출구 없는 암흑 속에 살았다.”
―일본은 총리 등이 수차례 사과했기 때문에 과거사는 잊자고 한다.
“나는 아직도 일본이 진심어린 사과는 한 번도 안했다고 생각한다. 앞에선 사과를 하고 돌아서면 ‘위안부 강제동원 아니다’ ‘강제 징용 없었다’면서 책임회피를 한다. 일본 국민들이 진심으로 사과하면 얼마나 좋겠나. 그러면 과거를 잊고 양국이 새 출발 할 수 있을 텐데 아쉽다. 일본이 (과거사에 대해 진심어린 사과를 한) 독일 사례를 본받으면 좋겠다.”
―광복 당시 어떤 기분이었나. 당시를 회상해본다면.
“1945년 8월 11일경부터 일본이 곧 항복할 거라는 소식이 전해졌다. 시내에서 폭죽이 터지고 중국 사람들도 서로 껴안고 좋아했다. 축제 분위기였다. 전쟁이 몇 년은 더 갈 줄 알았는데 일본이 그렇게 빨리 항복할 줄은 몰랐다. 나도 너무 좋았다. 해방 소식을 듣고도 한국에 돌아오는 데 몇 개월이 걸렸다. 1946년 6월 한국에 도착했다. 고국에 도착하니 너무 감격스러워 땅에 입을 맞췄다.”
―우리나라에선 ‘독립운동을 하면 3대가 망하고 친일을 하면 3대가 흥한다’는 말이 있다. 광복군에 참여한 것을 후회한 적은 없나.
“해방 후 주변에 광복군 출신이라는 사실을 말하지 못했다. 당시 반민특위(반민족행위특별조사위원회)를 강제로 해산하고 친일파들을 중용하는 상황에서 광복군 경력이 알려지면 손해만 볼 게 뻔했다. 그래도 후회는 없다. 다시 그때로 돌아가도 똑같은 선택을 할 거다. 다만 건의할 사항이 있다면 새로 광복군동지회 회장을 맡고보니 사무실 환경이 너무 열악하다. 독립유공자가 이런 예우를 받는 것을 보면 국가가 위기에 처했을 때 누가 발 벗고 나설지 걱정된다.”
―박근혜 정부 시절 건국절 논란에 일침을 가해 화제가 됐었다. 보수 진영에선 1948년 정부 수립을 부정하는 것은 남한정부수립을 폄훼하려는 북측 논리라고 주장한다.
“당시 정부에서 대한민국 임시정부(1919년 출범)를 무시하고 1948년 정부 수립일을 ‘건국절’로 하려고 했다. 나는 북한 그런 거 모른다. 역사는 실증적 사실로 보자는 거다. 임시정부가 우리나라의 뿌리 아닌가. 헌법에도 우리나라는 임시정부의 법통을 계승한다고 써있다. 이렇게 주장하니 어떤 학자가 헌법에 적힌 내용은 상징적인 선언일 뿐이라고 하더라. 그렇다면 헌법에 적혀있는 ‘대한민국은 민주공화국이다’라는 내용도 상징적인 선언일 뿐인가. 이승만 전 대통령도 대한민국은 1919년에 건국됐다고 했다. 이승만을 지지하는 보수층이 왜 1919년 건국을 부정하나. 왜 우리 스스로 독립운동을 과소평가하려 하는지 이해할 수가 없다.”
―최근 정부가 광복군에 참여했던 김원봉 서훈을 검토하고 있다. 북한으로 건너간 독립유공자도 서훈해야 한다고 보나.
“김원봉이 독립운동을 한 것은 사실이지만 지금 서훈을 논한다면 문제라고 생각한다. 북한으로 건너간 독립운동가에 대한 서훈은 남북이 통일된 후 논의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북한으로 건너간 독립운동가는 북한에서 서훈하면 되는 것 아닌가. 지금은 덮어두고 통일이 된 후 국민 총의에 의해서 결정하는 것이 옳다고 본다.”
―앞으로 한일 관계는 어떻게 정립해야 하나.
“일본이 나쁜 것은 틀림없다. 일본이 하는 행태를 보면 광복군 출신으로서 지금이라도 총 들고 싸우고 싶은 심정이지만 공생의 길을 모색해야 한다. 일본은 우리나라와 지정학적으로 가장 가까운 이웃이다. 일본은 상대하기도 싫지만 어찌됐든 같이 손잡고 가야 한다. 같이 갈 수밖에 없는 일본이기 때문에 슬기롭게 합의점을 찾아서 문제를 해결해야 한다.”
김명일 기자 mi737@ilyo.co.kr
광복군동지회는 어떤 단체? 대한민국 임시정부 무장 독립군 광복군동지회는 한국 광복군의 나라사랑정신을 계승 및 발전시키기 위해 만들어진 단체다. 광복군은 1940년 중국 충칭에서 창설된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무장 독립군이다. 대한민국 독립을 회복하기 위해 일본제국주의를 타도하고 연합군의 일원으로 항전할 것을 목적으로 창설됐다. 국내진공 작전을 계획했으나 일본의 항복으로 무산됐다. 대한민국 임시정부는 1919년에 대한민국육군임시군제를 제정한 바 있다. 이는 군대를 창설한다는 원칙하에, 군대의 편제와 조직에 관한 법규를 마련한 것이었다. 이러한 계획은 지역적 차이와 재정적인 어려움 때문에 실현되지 못하다가 1932년 윤봉길 의거를 계기로 중국정부의 지원과 협조를 받게 됐다. 김구는 1934년에 뤄양군관학교에 한인특별반을 설치해 군사간부를 양성했고, 중국 중앙육군군관학교에도 우리나라 청년들을 입교시켜 군사인재 양성에 힘썼다. 1937년 중일전쟁이 발발하자 임시정부는 군사위원회를 설치하고 한국광복군 창설계획을 세웠으나, 일본군 점령지역이 확대되면서 중국 대륙 여러 곳으로 피난처를 옮겨 다녀야 했다. 중국 임시수도였던 충칭에 정착하면서 비로소 1940년 9월 17일 광복군총사령부가 성립됐다. 광복군은 중국에 파견되어 있던 미국전략사무국(OSS, Office of Strategic Service)과 협약을 맺고 특수공작훈련을 실시했다. 그러나 일본이 항복한 이후 미군정은 임시정부를 인정하지 않았고, 광복군에 대해서도 무장해제를 요구했다. 광복군은 무장을 해제하고 개인자격으로 귀국했으며, 1946년 6월 해체했다. 김명일 기자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