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병풍’ 남캐 딛고 올라선 ‘여성 킬러’…성별을 바꿔도 이야기는 흘러가네
영화 ‘안나’ 스틸컷.
‘파리의 톱 모델로 위장한 강력한 킬러 안나(사샤 루스 분)의 하드코어 킬링 액션’이라는 홍보 문구만으로도 영화의 줄거리 90%는 예상하고도 남는다. 그러지 않아도 섹슈얼한 이미지로 소비될 여성 캐릭터에 총까지 쥐어줬으니 스크린은 피와 섹스로 가득찰 것이다. 남자들이 가장 두려워하는 존재인 침대 속 요부 살인마로 러닝타임 120분 가운데 100분은 채울 수 있을 것이다.
실제로 영화는 이런 예상에서 크게 빗나가진 않는다. 톱 모델인 안나가 떼로 덤벼드는 남성을 향해 쌍권총을 쏴 대고, 뤽 베송의 영화 가운데 아마 세 번째 정도로 긴장감이 떨어지는 액션을 보여주며 난투를 벌이는 씬이 지나면 남성 캐릭터들과의 스킨십이 남은 씬을 채우기 때문이다. 기존의 여성 스파이나 여성 킬러의 이미지를 그대로 답습하는 초반의 모습은 고루하고 자칫 평면적으로 보이기까지 한다.
영화 ‘안나’ 스틸컷.
만일 뤽 베송이 중반부에 이르러 이런 이미지를 살짝 꼬아놓지 않았다면 이 영화는 2019년에 개봉한 1999년 작품처럼 비난받았을지 모른다. 20년의 갭을 뛰어 넘기 위해 설치한 감독의 장치가 단순한 ‘성별 역전’이라는 것이 나이브하게 느껴질 수 있다. 그러나 깊게 생각하지 않고 위치를 바꾸는 것만으로 관객들로 하여금 카타르시스를 느끼게 하는 가성비만큼은 뛰어나다고 할 수 있겠다.
‘안나’에서 등장하는 주요 남성 캐릭터는 2명. 안나를 발탁하고 킬러로 키워낸 KGB 교관 ‘알렉스(루크 에반스 분)’, 안나를 감시하는 적대 조직 CIA 요원 ‘레너드(킬리언 머피 분)’다. 극중에서 이들의 존재감은 미미하다는 말로 밖에는 표현이 되지 않는다.
영화 ‘안나’ 스틸컷.
허세에 찌든 대사와 직위에 걸맞은 무게감 있는 태도를 보여주긴 하지만 찰나일 뿐이다. 특히 중후반부로 향할수록 조금씩 무너져 내리는 이들의 모습은 관객들로 하여금 기존 액션 영화에서 여성 조연들이 어떤 식으로 활용됐었는지 다시 한 번 되새기게 한다. ‘사랑은 모든 것을 이긴다’는 진부한 대사가 어떻게 박살나는지, 권총 액션보다 이쪽이 좀 더 파격적이다.
킬러와 상사의 관계성도 주목할 만한 포인트다. 영화 속에서 안나에게 가장 큰 영향을 끼치는 것은 이 근사한 두 남자가 아닌 KGB의 여성 리더 ‘올가(헬렌 미렌 분)’다. 과거와 현재, 그리고 또 과거와 그보다 더 과거를 정신없이 왔다 갔다 하는 영화 속 중심에 서 있는 올가와 안나의 관계성은 마무리에 이르러 완벽해진다. 여성들의 서사에 남성들이 끼는 것을 원하지 않는다면, 끼어들더라도 아이캔디 그 이상을 바라지 않는다면 이 영화는 좋은 선택이 될 것이다.
영화 ‘안나’ 스틸컷.
다만 ‘여성을 위한’ 영화로써 존재감이 있다고 하기엔 부족한 점이 많다. 여전히 여성 킬러나 스파이에 대한 고정관념은 존재하고, 이런 류의 영화를 제작하면서도 뤽 베송에겐 이를 격파할 생각이 아직까지 없어 보인다는 것이 아쉬운 점이다.
한편, 영화 ‘안나’는 톱 모델로 위장한 강력한 킬러 안나(사샤 루스 분)가 자유와 평온한 삶을 위해 모든 위협을 제거해 나가는 하드코어 킬링 액션을 그린다. 119분, 15세 관람가. 28일 개봉.
김태원 기자 deja@ilyo.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