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정치자금 수수로 곤욕을 치른 일이 있는 김대중 대통령 (사진)은 청와대는 물론 민주당까지도 철저히 정치자금을 만들지 못하게 했다. 이 때문에 정치권의 불만이 하늘을 찌를 정도였다고 한다. | ||
김종필 총리 인준안이 5개월째 지연되고 있던 98년 8월 초 국민회의 한화갑 원내총무가 청와대에서 김대중 대통령을 면담, 경색된 여야관계를 보고하면서 하소연한 내용이다.
소심한 스타일이라는 평까지 들었던 한 총무로서는 큰 용기를 냈던 셈이다. 그만큼 한 총무는 어려운 사정이었다. 정권 초부터 여야 관계가 최악의 상태를 거듭해 국회가 장기간 공전되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더욱이 총리 인준안의 경우 한때 박희태 한나라당 총무와 처리하기로 합의했다가 7월30일 검찰이 한나라당 서상목 의원 등의 세풍사건 수사 사실을 발표함에 따라 무산되기도 했다. 한 총무는 당시 세풍수사 사실 자체를 모르고 있다가 검찰 발표를 보고 경악했다.
‘뒤통수’를 맞은 격이 된 한나라당은 즉각 강경 기류로 선회, 인준안 처리는 다시 연기됐다. 한 총무는 당시 “총리 인준안이라도 처리하고 발표했으면 좋았을 텐데. 아무리 깨끗한 정치도 좋지만 최소한 당정 조율은 해야지”라며 ‘정보 소외’를 푸념했다.
‘돈’문제는 더 심각했다. DJ정권 이전에는 돈이 여야 관계의 윤활유 역할을 했다. 집권여당 총무는 야당 총무에게 돈가방을 건네주고 그 돈이 야당 의원들에게 풀려나가는 게 과거의 정치관행이었다. 본회의장에서는 여야 의원 간에 욕설하고 몸싸움을 하다가도 저녁에는 호쾌하게 폭탄주를 돌리는 식이었다. 초기부터 ‘총풍’, ‘세풍’ 등이 쏟아졌던 DJ정권은 한나라당 입장에서 ‘채찍’만 난무하고 ‘당근’이 없는 정권이었다.
누구보다도 이 같은 구 정치의 관행을 잘 아는 김 대통령이 절박한 한 총무의 호소를 이해하지 못할 리 없었다. 하지만 한 총무에게 원칙론을 되풀이했다. 돈을 뿌려대는 부패정치, 정보를 무기로 삼는 공작정치를 포기하고 정도를 고수하라는 주문이었다. 한 총무는 이후에도 한두 차례 정도 김 대통령에게 정치자금의 필요성을 건의했던 것으로 알려졌다. 하지만 김 대통령은 똑같은 반응을 보였다는 후문이다.
김 대통령 스스로도 집권 5년 동안 정치에서 필요악으로 불리는 돈에 관한 한 철저하게 거리를 유지했다. 당시 여권의 한 핵심인사는 “김 대통령이 굳이 기업들에게 정치헌금을 받지 않아도 최소한의 돈을 만들 수는 있었다. 국정원 통치자금을 쓰면 됐다. 취임 초 실제로 국정원 통치자금이 청와대로 들어왔다. 하지만 김 대통령은 호통을 치며 돌려보냈다. 대통령이 쓸 수 있는 여유 돈이 원천적으로 봉쇄된 셈이다.”
98년 당시 안기부 공식 예산은 6천억원대였지만 실제 예산은 8천억원 이상이 될 것이라는 게 일반적 관측이었다. 그 차액은 ‘통치자금’으로 불리는 국정원장 비자금과 대공수사실 및 해외조사실의 ‘공작예산’으로 추정됐다. 이들 자금은 기조실 예산담당자조차 내역을 모를 정도로 비밀리에 운영됐다. 비밀이 보장되는 정치자금마저 김 대통령은 거절한 것이다.
김 대통령이 차관급인 총무수석을 1급인 총무비서관으로 격하시켜 박금옥씨를 임명한 것도 같은 맥락이다. YS정권 시절 홍인길 총무수석이 ‘정치자금’을 만들고 주물렀다면 미혼여성인 박 비서관은 청와대 ‘살림살이’만 했다. ‘짠돌이’라는 별명이 붙을 정도로 비용 절감은 박 비서관의 유일한 목표였다. 박 비서관은 유일하게 DJ정권 5년 동안 김 대통령 곁을 떠나지 않은 비서관이 됐다.
대신에 청와대와 정부, 민주당의 고위인사들은 고생깨나 했다. 스스로 푼돈을 만들어 정치를 해야 했기 때문이다. 청와대 비서관들만 해도 형편없는 판공비로 인해 손발이 묶였다. 일반 비서관은 1백만원, 정무수석실 소속 비서관은 2백만원, 수석비서관은 3백만원 정도였다.
그나마 현금이 아니라 신용카드로 사용해야 했다. 힘없는 비서관들은 기자들과 식사할 형편이 못됐다. 일부 ‘물좋은’ 파트의 비서관들은 용돈이 생겼지만 상당수 비서관들은 부하직원들과의 회식비용도 없어서 쪼들릴 정도였다.
▲ 99년 청와대 비서관들과 회의를 하고 있는 DJ(가운데). 당시 수석비서관의 판공비는 약 3백만원. | ||
당시 신 차관이 MCI코리아 부회장 진승현씨에 대한 금감원 조사 무마 등의 명목으로 최씨를 통해 매번 3백만∼5백만원씩 받은 것으로 알려졌기 때문이다.
청와대 내에서는 “서슬퍼런 민정수석이 푼돈을 받다가 구속되니 창피해서 청와대 비서관이라는 얘기를 못하겠다”는 자조 섞인 농담이 유행하기도 했다.
민주당 출신으로 정무수석실 비서관을 지낸 L씨는 이렇게 고백했다. “청와대에 들어와서 역대 정권에서 가장 유능한 정무비서관이 누구인지를 탐문해봤다. 그 결과 노태우 정권에서 정무비서관을 지낸 L의원이라는 답이 나왔다. 그 이유는 간단했다. L의원은 비서관 재직시 일주일에 두 차례 정도 여의도로 나갔다. 물론 야당 의원들을 만나기 위해서였다.
그때마다 L의원은 현찰을 채운 007가방 두 개를 들고 나갔다고 한다. 물론 들어올 때는 빈 가방으로 왔다. 그런데 우리는 원천적으로 움직일 수 없다. 야당 의원들을 다독거릴 수단이 없다. 결국 사무실에 앉아서 보고서만 쓰는 게 우리 일이다.”
또 다른 DJ정권의 비서관은 풍족했던 과거 정권의 일화를 소개하면서 부러움을 토로하기도 했다. “전두환 정권에서 비서관을 지낸 선배 관료와 토요일 저녁에 식사를 한 적이 있다. 식사를 마치고 그 선배는 ‘전두환 전 대통령에게 받았던 용돈 중 남은 돈인데 가족들과 식사나 하라’면서 참석자 3명에게 봉투를 한 개씩 건네줬다. 뜯어보니 50만원이 들어있었다.
전두환 대통령은 설날 추석 같은 명절이면 비서관들에게 1억원씩 돌렸다고 한다. 뿐만 아니라 비서관들 부인에게도 직접 사람을 보내 007가방 한 개씩을 전달했다고 한다. 사람이란 푼돈을 받으면 고마워하지만 상상을 초월하는 목돈을 받으면 목숨을 걸고 충성하는 것 아니냐.”
이처럼 ‘돈 기근’은 DJ정권 내부의 중요한 불만 요인이었다. 2001년 말 민주당 이상수 원내총무는 김 대통령의 호출을 받고 청와대에 들어간 적 있다. 돈 쓸 일이 많았던 이 총무는 시기가 연말인 만큼 김 대통령의 ‘촌지’를 내심 기대했었다. 그러나 김 대통령은 이 총무의 보고만 듣고 “이제 가보라”고 말했다.
약간 실망한 이 총무가 청와대를 나오려는데 정무수석실에서 연락이 왔다. “남궁진 정무수석이 잠깐 뵙자”는 전화였다. 이 총무는 남궁 수석이 대통령 격려금을 주려고 부르는 것으로 짐작했다. 생각대로 남궁 수석은 이런 저런 얘기를 하다가 봉투를 한 개 꺼내서 이 총무에게 건네줬다. 기분이 좋아진 이 총무는 돌아오는 차 안에서 봉투를 열어보고 깜짝 놀랐다. 1백만원이 들어있었기 때문이다. 민주당 의원 1인당 1만원도 돌아가지 않는 돈이었다.
정부 각료들도 사정은 매일반이었다. 정치권 출신의 J장관은 입각하면서 자신이 쓸 수 있는 판공비를 알아보고 땅을 쳤다. 임동원 국정원장이 취임하면서 국정원장이 장관들에게 매달 1천만원씩 주던 격려금이 없어졌다는 사실을 발견했기 때문이다.
야당 의원들은 겉으로 표현을 못했지만 내부적으로는 불만이 하늘을 찔렀다. DJ정권 초기에 한나라당 중진의원들 서너 명은 여의도 국회의사당 근처의 일식집에서 점심 식사를 한 적이 있다. 그 자리에서 김 대통령과 민주당은 집중적 성토의 대상이 됐다.
▲ 한나라당은 서상목 의원 체포동의안 부결로 다수당의 위 력을 보여줬다. 사진은 이회창 당시 총재(왼쪽)와 서상목 의원. | ||
즉각 옆에 있던 B의원이 “이놈의 정권은 정치를 하겠다는 거야, 아니면 말겠다는 거야”라고 말을 받았다.
그러나 C의원은 한술 더 떠 “지들은 우리가 여당 할 때 다 받아먹고서 이제 와서 깨끗한 정치한다고 딴청 부리니 그 꼴을 보면 울화통이 터지는구만”이라고 분통을 터뜨렸다.
그러나 과연 DJ정권 전체가 5년 동안 비리사슬에서 벗어나 있었는지는 별개의 문제다. DJ정권의 인사들이 쫄쫄 굶고 다닌 것만은 아닌 것 같다.
핵심 실세급들은 ‘스폰서’를 통해 비자금을 조성해서 썼다는 주장도 적지 않다. 그 전모는 알 수 없지만 정황증거들이 간헐적으로 목격되기도 했다.
2000년 4·13총선 전 민주당 한 실세급 의원은 자신이 주재하는 모임자리에 종종 경기도의 한 재력가를 끌고 다녔고 나중에 그 재력가는 공천을 받았다. 때문에 그 재력가가 실세 의원의 스폰서 역할을 하고 공천을 받았다는 추측이 무성하게 나돌았었다. 또 다른 여권 실세는 여러 사람들이 지켜보는 앞에서 충청지역 건설업자에게 돈을 받아서 나눠주는 해프닝을 연출하기도 했다.
결국 역대 정권의 실세들이 대기업으로부터 거액의 정치헌금을 받아 ‘손 크게’ 썼던 반면 DJ정권의 실세들은 여러 명에게 받은 ‘푼돈’을 모아 정치자금을 간신히 조달했다는 얘기도 듣는다. 호남 건설업자 및 요식업자 등이 소액의 정치자금을 제공하는 주요 스폰서였다는 게 민주당 관계자들의 전언이다.
DJ정권에서 대형비리 사건이 터져 나오지 않은 것은 이 같은 ‘수요-공급’구조 덕분이라는 분석이다. 때문에 한나라당 의원들은 사석에서 DJ정권을 비난할 때 ‘호남 조폭 정권’이라고 비하했다.
실제로 민주당 내에서 동교동계 의원들은 다른 지역 의원들에 비해 상대적으로 돈 씀씀이에 여유가 있는 편이었다.
한 동교동계 의원은 “DJ가 대규모 정치자금을 조달해주지 않는 상황에서 푼돈을 모아서 정치를 한 것은 일정 부분 사실이다. 현실적으로 지구당 운영비나 선거비용 등을 생각해봐라. 법 테두리 내에서 모은 공식후원금만으로는 불가능하다. 또 동교동계가 소장파나 개혁파의 후원자 역할을 하기도 했다”고 해명했다.
이에 대한 반론도 있다. 청와대 비서관을 지낸 한 인사는 “DJ정권의 청와대가 가난하다는 말이 반드시 맞는 것은 아니다. 그건 권력을 몰라서 하는 얘기다. DJ는 실제로 돈에 손을 대지 않았다고 본다. 하지만 밑의 사람들은 다를 수 있다. 내가 보기에 실세 수석들은 마음만 먹으면 수백억원의 비자금도 만들 수 있다. 권력이란 그런 것이다”라고 말했다.
어쨌든 김 대통령이 ‘탈비자금’ 노선을 끝까지 견지했다는 점에는 이견이 없다. 이것이 김 대통령의 자기반성 결과라는 분석은 흥미롭다.
민주당의 한 핵심인사는 “김 대통령은 89년 3월 노태우 대통령으로부터 중간평가 유보에 동의해주는 대가로 ‘20억원+α’를 받았던 사건이 97년 대선과정에서 터져 나오자 당혹감을 감추지 못했다. 더욱이 집권 초기에 검찰수사까지 들어가는 과정에서 우여곡절이 많았다. 역설적으로 김 대통령은 이후 정도를 걷기 위해 더욱 노력했던 것 같다”고 분석했다.
이진설 언론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