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회의의 공식 명칭은 ‘수펙스 추구 협의회’. 그룹의 모토인 ‘수퍼(Super), 엑셀런트(Excellent)를 추구한다’는 의미에서 붙여진 이 회의는 최종현 전 회장 시절부터 2주마다 월요일에 열렸다. 회의에는 그룹 주요 계열사 13개사 사장과 구조조정본부 소속 오너 경영인이 참석했다.
이날 회의 분위기는 여느 때보다 더 침울했다. 그룹 위기 사태가 해소되지 않은 탓도 있었지만, 또 다른 이유가 있었다. 그룹의 핵심인 김창근 구조조정본부장이 돌연 사퇴 의사를 밝힌 때문이었다.
김 본부장은 지난 74년 선경그룹 시절에 입사한 뒤 30여 년간 재직해온 정통 ‘SK맨’. 그는 SK주식회사 사장 및 그룹구조본부장, 최태원 회장 비서실장 역할 등 1인3역을 해내고 있었다.
▲ 지난 2월22일 김창근 구조본부장이 구속되는 모습. 최태원 회장 (작은사진)의 ‘비서실장’으로 불린 김 본부장은 지난 6일 본부장직 을 전격 사임했다. | ||
그러나 김 전 본부장의 행보는 예상을 깼다. 그는 보석 후 나흘이나 회사를 출근하지 않았다. 그가 출근하지 않자 그룹 내에서는 ‘이상기류’가 흘렀다. 나흘 만에 그는 구조본부장을 사퇴한다는 뜻을 수펙스회의를 통해 공식적으로 밝혔다. 사유는 ‘건강’ 때문이라는 것. 수감생활로 심신이 크게 지쳐 있다는 것이 사퇴 이유였다.
그러나 그의 사퇴소식을 접한 사장단은 크게 동요했다고 한다. 이를 반영하듯 이날 수펙스회의는 오후까지 이어졌다. 실제로 회의에서는 김 본부장의 사퇴를 두고 다양한 견해가 쏟아진 것으로 전해졌다.
어쨌든 의장인 손길승 회장은 고심 끝에 김 전 본부장의 구조본부장의 사퇴를 결정했다. 그룹측은 회의가 끝난 뒤 “김 본부장은 5월6일자로 구조본부장직을 사퇴하고, 향후 SK주식회사 사장직만 수행한다”고 밝혔다.
이 같은 사실이 전해지자 재계에서는 김 본부장의 사퇴 배경에 촉각을 곤두 세우고 있다. SK그룹의 ‘키맨’인 김 본부장이 갑작스레 사임한 진짜 이유가 대체 무엇일까 하는 점 때문이다. 무엇보다도 재계 관계자들이 김 본부장의 사퇴에 깊은 관심을 보이는 것은 그가 최태원 회장의 비서실장 역할을 맡아왔다는 점 때문이다. 최 회장의 최측근인 김 본부장이 사임한다는 것은 향후 최 회장의 그룹 내 입지가 좁아진다는 의미.
이에 대해 SK그룹 홍보실은 “김 전 본부장이 지난해부터 건강에 무리가 있어왔다”며 “심장질환을 앓고 계신 것으로 전해들었고, 이번에 수감된 동안 병이 악화돼 보석도 신청하게 된 것”이라고 말했다. 홍보실 관계자는 “출감 후 휴식을 취해오다가 SK주식회사 사장직만 맡기로 생각을 굳히신 것으로 전해 들었다”고 말했다.
그러나 김 본부장이 사퇴한 이후 그룹 내에서 감지되고 있는 몇 가지 징후가 눈길을 끈다. 그 중 하나는 김 본부장의 사퇴를 계기로 그룹경영체제 전반에 모종의 변화가 모색되고 있는 부분.
이는 그룹 관계자의 말에서도 느낄 수 있다. 구조본 홍보실 관계자는 “김 본부장의 후임은 아직 정해지지 않았다”면서, “현재 정부측이 구조본의 존재에 부정적이라는 점을 고려하고 있다”고 밝혔다. 김 전 본부장의 사퇴를 계기로 구조본의 존속 여부를 전면 검토할 수 있다는 뜻이 담겨 있는 것이다.
그렇다면 SK그룹뿐 아니라 재계 전체로 볼 때 적잖은 파장이 예상된다. 재계랭킹 10위 안에 드는 재벌은 LG그룹을 빼고는 모두 구조본을 운영하고 있고, 구조본의 필요성을 강력히 주장하고 있다. LG 역시 구조본을 없애긴 했지만, 지주회사인 (주)LG를 출범시켜 기존 경영체제와 큰 차이가 없다.
그런 상황에서 재계랭킹 3위인 SK가 구조본을 없앨 경우 재계에 미칠 영향은 적지 않을 것으로 보인다. 특히 오너 직할 경영체제로 구성된 삼성, 한화, 롯데 등은 긴장하지 않을 수 없는 상황이다. 구조본이 없어진다면 이는 곧 오너 경영인의 영향력이 사라지는 것과 마찬가지이기 때문이다.
또 SK그룹 내부로 볼 때에도 구조본이 없어진다는 것은 향후 최태원 회장의 경영 입지가 크게 약화된다는 것을 말한다. 최 회장의 그룹지배력이 줄어들 경우 SK그룹의 경영체제에도 엄청난 변화가 몰려올 수 있다는 얘기.
김 본부장의 사퇴와 관련해 재계 일각에서는 그룹 내부의 불협화음 때문이 아니냐는 시각도 있다. 최 회장이 구속된 이후 출범한 ‘SK글로벌 정상화 추진위원회’를 주목하는 것도 그 같은 이유다. 정상화추진위는 최 회장이 구속된 후 그룹의 위기상황을 초래한 SK글로벌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구성한 조직.
이 조직의 출범으로 사실상 구조본의 역할은 줄어들었다. 특히 이 조직은 SK글로벌 문제에 국한돼 있긴 하지만, 그룹 전체의 경영에 깊숙히 개입하게 될 수밖에 없다는 점에서 실질적인 최고 파워조직이다.
결국 김 본부장은 구조본의 역할이 줄어든 상황을 감안, 자진 사퇴한 것이라는 추측이다. 이는 최태원 회장이 주도하던 구조본의 힘이 줄어든 대신, 손길승 회장이 이끄는 정상화추진위가 실세 조직으로 부상한 부분과 연결지어 바라보는 묘한 시선도 있다.
어쨌든 최태원 회장의 구속-김창근 본부장의 사퇴로 이어진 일련의 사건은 향후 SK그룹 전체의 경영체제 변화로 이어지는 출발점이 될 수도 있다는 해석이 많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