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승계작업’ 보다 대통령 직무 범위에 초점...“국정농단 사건과 달리 기존과 달라진 점 없다”는 해석도
그러나 최근 법조계 일각에선 대법원의 판결이 검찰 수사에 직접적인 영향을 주지 않을 수 있다는 분석이 나오고 있다. 대법원이 승계작업이 있었다는 점을 명확하게 인정한 건 아니라는 취지의 지적이다.
지난 8월 29일 김명수 대법원장(왼쪽 다섯 번째)과 12명의 대법관들이 29일 오후 서울 서초구 대법원 대법정에서 열린 박근혜 전 대통령과 ‘비선 실세’ 최순실 씨, 이재용 삼성전자 부회장의 ‘국정 농단’ 사건 상고심 선고공판에서 개정을 기다리고 있다. 사진=공동취재단
삼성바이오 회계 부정 사건을 수사중인 검찰은 2015년 삼성물산-제일모직 합병 당시 삼성바이오가 콜옵션(주식을 살 수 있는 권리)이라는 일종의 부채를 숨기고, 합병 뒤에 이로 인해 발생한 자본 잠식 위기를 피하기 위해 회계처리를 변경하는 방식의 회계 부정을 저질렀다고 판단한다.
이로 인해 삼성바이오로직스의 모(母)회사였던 제일모직이 유리한 입장에서 합병을 할 수 있었으며 제일모직 최대주주인 이재용 삼성전자 부회장이 경영권 승계 과정에서 유리한 위치에 서게 됐다는 것이다. 삼성바이오 회계 부정은 승계 작업과 떼려야 뗄 수 없는 관계인 셈이다.
그동안 삼성은 승계작업은 없었고, 회계 부정 의혹도 2015년 합병이나 경영권 승계와는 관계없이 삼성바이오로직스에서만 이뤄진 단순한 회계 문제라고 주장해 왔다. 특히 회계 부정이 발생한 시점을 유독 강조해 왔다. 회계 작업이 제일모직-삼성물산 합병에 영향을 미치기 위해서였다면 합병 이전에 일어났어야 하는데, 실제로는 3개월이 지나서야 이뤄졌다고 주장했다.
이러한 검찰과 삼성의 ‘승계작업 존재 여부’에 대한 다툼은 국정농단 사건들과 연결돼 이뤄졌다. 앞서 박근혜 전 대통령과 최순실 씨 사건을 심리한 2심 재판부는 당시 삼성그룹에 ‘승계작업’이라는 포괄적 현안이 있었고, 이 부회장이 최순실 씨 조카 장시호 씨가 운영한 한국동계영재스포츠센터에 보낸 지원금은 승계를 위한 묵시적 청탁이라고 판단했다.
그러나 이 부회장 사건을 심리한 또 다른 2심 재판부는 승계작업이 존재했다고 보기 어렵고, 부정한 청탁도 없었다고 봤다. 박 전 대통령과 최순실 씨, 이 부회장 사건을 다룬 하급심 판단이 각각 엇갈렸던 만큼 대법원의 통일된 판단이 필요했다.
이에 대해 대법원 전원합의체는 지난 8월 29일, 이 부회장이 박 전 대통령에게 한국동계영재스포츠센터 지원금 합계 16억 2800만 원을 뇌물로 건넸다고 판단했다. 하급심 판단을 완전히 뒤집은 셈이다. 대법원은 뇌물 혐의에 대한 앞선 2심 판단이 잘못됐으니, 다시 재판하라며 서울 고등법원으로 사건을 돌려보냈다.(파기환송)
곧바로 삼성바이오 검찰 수사에 관심이 쏠렸다. 그동안 ‘승계작업 자체가 없었다’는 삼성의 최대 방어논리가 흔들리게 됐기 때문이다. 검찰 안팎에선 8월 검찰 인사 등으로 숨고르기에 들어갔던 삼성바이오 수사에 조만간 속도가 붙을 것이란 관측도 나왔다.
그러나 최근 법조계 일각에선 대법원 판결이 검찰에 유리한 것만은 아니라는 해석이 나오고 있다. 한 판사 출신 변호사는 “대법원이 부정 청탁의 대상이 된 ‘승계작업’을 명확하게 규정하지 않았다는 게 이 해석의 요지다. 대법원은 이번 판결에서 승계작업의 존재 여부를 판단하지 않았다”라며 “원심이 잘못돼 다시 재판하라며 되돌려 보냈다는 게 승계작업을 인정했다는 뜻은 아니다”라고 말했다.
실제 대법원 전원합의체는 승계작업과 연결된 한국동계스포츠영재센터 뇌물 혐의와 관련한 원심에 대해 이렇게 판단했다.
바. 한국동계스포츠영재센터 관련 뇌물공여 원심은, 아래와 같은 이유를 들어, 피고인 이재용과 박근혜 전 대통령 사이에 영재센터 지원금 합계 16억 2800만 원과 관련하여 부정한 청탁을 인정할 수 없다고 보아, 피고인 이재용, 최지성, 장충기에 대한 이 부분 공소사실을 무죄로 판단하였다. ㄱ. 원심요지 - 부정한 청탁의 대상이 되는 ‘승계작업’을 인정할 수 없다. 특별검사가 주장하는 현안들 중 일부는 그것이 성공에 이르는 경우 피고인 이재용의 삼성전자 또는 삼성생명에 대한 지배력 확보에 직접적,간접적으로 유리한 영향을 미치는 효과가 있었다고 인정할 수 있으나, 그러한 사정만으로 승계작업을 바로 인정할 수는 없다. - 승계작업은 피고인 이재용과 박근혜 전 대통령 사이에 부정한 청탁의 대상이 되는 것이므로 명확하게 정의된 내용으로 그 존재 여부가 합리적 의심이 없이 인정되어야 한다. 묵시적 의사표시에 의한 부정한 청탁에 필요한 공통의 인식과 양해의 대상인 승계작업이 명확하지 않거나 개괄적이게 되면 처벌의 범위가 불명확해지기 때문이다. - 승계작업은 부정한 청탁의 대상으로서의 의미를 갖는 것이므로 그에 대한 당사자들의 인식도 뚜렷하고 명확하여야 한다. 박근혜 전 대통령이 승계작업을 인식하였다고 볼 수 없다. - 승계작업을 인정할 수 없으므로, 박근혜전 대통령이 승계작업에 대하여 인식하고 있었다거나 박근혜 전 대통령과 피고인 이재용 사이에 승계작업을 매개로 영재센터를 지원한다는 묵시적인 인식과 양해가 있었다고 볼 수 없다. ㄴ. 그러나 아래와 같은 이유에서 원심은 박근혜 전 대통령의 직무와 청탁의 내용, 박근혜 전 대통령과 피고인 이재용의 관계, 이익의 다과, 수수 경위와 시기, 이익의 수수로 인하여 사회 일반으로부터 직무집행의 공정성을 의심받게 되는지 등을 심리하여 박근혜 전 대통령의 직무와 영재센터 지원금 사이에 대가관계가 있는지 여부와 그와 관련된 부정한 청탁이 인정되는지를 판단했어야 한다. - 원심의 판단에는 법리를 오해하고 필요한 심리를 다하지 않아 판결에 영향을 미친 잘못이 있다. 이를 지적하는 특별검사의 상고는 정당하다. |
이에 따르면, 대법원은 2심이 대통령의 직무 범위와 이재용 부회장과의 관계 등을 확인해 부정한 청탁이 있었는지를 판단했어야 했다고 지적했다. 삼성의 ‘경영권 승계 작업’이 아닌, 대통령 직무 범위에 초점이 맞춰진 것이다. 이에 대한 대법원의 구체적인 설명은 다음과 같이 이어진다.
- 부정한 청탁의 대상 또는 내용은 구체적일 필요가 없고 공무원의 직무와 제3자에게 제공되는 이익 사이의 대가관계를 인정할 수 있을 정도로 특정되면 충분하다. - 그리고 이러한 부정한 청탁의 내용은 죄의 성립요소인 사실이므로 그에 대한 인식은 미필적인 것으로 충분하고, 확정적일 필요가 없다. 그런데도 원심은 부정한 청탁의 대상이 명확하게 정의되어야 하고, 부정한 청탁의 대상에 대한 인식은 뚜렷하고 명확하여야 한다는 근거를 들어, 부정한 청탁의 대상이 되는 승계작업을 인정할 수 없고, 전 대통령이 승계작업을 인식하고 있었다고 볼 수 없다며 부정한 청탁을 인정하지 않았다. 이러한 원심의 판단은 위 법리에 배치된다. - 대통령은 정부의 수반으로서 중앙행정기관의 장을 지휘․감독하여 정부의 중요정책을 수립․추진하는 등 모든 행정업무를 총괄하는 직무를 수행하고, 대형건설 사업과 국토개발에 관한 정책, 통화, 금융, 조세에 관한 정책, 기업활동에 관한 정책 등 각종 재정․경제 정책의 수립과 시행을 최종 결정하며, 소관 행정 각 부의 장들에게 위임된 사업자 선정, 신규사업의 인․허가, 금융지원, 세무조사 등 구체적 사항에 대하여 직접 또는 간접적인 권한을 행사함으로써 기업체들의 활동에 있어 직무상 또는 사실상의 영향력을 행사할 수 있는 지위에 있다. - 위에서 본 것처럼 부정한 청탁은 묵시적 의사표시로도 가능하고 청탁의 대상인 직무행위의 내용이 구체적일 필요도 없다. 부정한 청탁의 내용도 박근혜전 대통령의 직무와 피고인 이재용 등의 영재센터에 대한 자금 지원 사이에 대가관계를 인정할 수 있을 정도면 충분하다. 위에서 본 대통령의 포괄적인 권한에 비추어 보면, 영재센터 지원금은 대통령 직무와 대가관계가 있다고 볼 여지가 충분하다. - 그리고 이러한 부정한 청탁의 내용은 죄의 성립요소인 사실이므로 그에 대한 인식은 미필적인 것으로 충분하고, 확정적일 필요가 없다. 그런데도 원심은 부정한 청탁의 대상이 명확하게 정의되어야 하고, 부정한 청탁의 대상에 대한 인식은 뚜렷하고 명확하여야 한다는 근거를 들어, 부정한 청탁의 대상이 되는 승계작업을 인정할 수 없고, 전 대통령이 승계작업을 인식하고 있었다고 볼 수 없다며 부정한 청탁을 인정하지 않았다. 이러한 원심의 판단은 위 법리에 배치된다. |
대법원은 “부정한 청탁의 대상 또는 내용은 구체적일 필요가 없고 공무원의 직무와 제3자에게 제공되는 이익 사이의 대가관계를 인정할 수 있을 정도로 특정되면 충분하다”고 밝혔다. 2심처럼 승계작업이라는 부정한 청탁의 대상이 명확하게 정의돼야 하고, 부정한 청탁의 대상에 대한 인식은 뚜렷하고 명확할 필요가 없다는 뜻이다. 대법원은 “부정한 청탁은 ‘묵시적 의사표시’로도 가능하고 청탁의 대상인 직무행위의 내용이 구체적일 필요도 없다”고 설명했다.
대법원은 ‘부정한 청탁의 대가’에 대해서도 언급했지만 역시 ‘승계작업’이라고 명확히 설명하지 않았다. 대법원이 대가라고 판단한 부분은 ‘대통령의 영향력’이었다. 대통령은 정부의 수반으로서 모든 정부의 행정업무를 총괄하고, 정책 통화 금융 조세에 관한 정책을 최종 결정하는 등 기업체 활동에 영향력을 행사할 수 있는 영향력’을 가지고 있으니, 이것이 대가라고 판단한 것이다.
앞서의 판사 출신 변호사는 “대법원은 대통령의 영향력 그 자체가 삼성 지원금에 대한 대가라고 판단했다. 상당히 포괄적으로 뇌물 혐의를 인정한 것”이라며 “이는 이번 사안을 하급심뿐만 아니라 특검팀의 주장보다 더 넓게 판단한 것으로 풀이된다”고 설명했다.
대법원 전원합의체 판결의 소수의견에서도 ‘승계작업을 인정한다’는 문구는 없다. 대법관 3명이 다수의견을 반대하는 내용에선 “승계작업은 박근혜 전 대통령과 이재용 사이에 부정한 청탁의 대상이 되는 것이므로 그 존재 여부가 합리적 의심이 들지 않을 정도로 인정돼야 한다. 그러나 특별검사가 사실심 법원에 제출한 모든 증거들을 종합해 보더라도 공소사실에 특정된 내용의 부정한 청탁의 대상이 되는 승계작업을 인정하기 어렵다”고 밝혔다.
대법원의 판결에 대한 다른 해석이 나오면서, 법조계에선 검찰 수사에 대한 관측 역시 신중하게 바뀌기 시작했다. 한 검사장 출신 변호사는 “삼성 쪽은 대법원이 영재센터 뇌물 혐의에 대해 승계작업과 관계없이 포괄적으로 판단을 내렸다는 점을 집중적으로 파고들 것으로 보인다”며 “파기환송돼 열리는 재판과 달리 삼성바이오로직스 회계 부정 사건은 기존 상황과 크게 달라진 게 없는 것으로 보인다”고 말했다.
이에 대해 검찰 관계자는 “대법원 판결은 승계작업 현안이 존재한 시점에 관한 내용 등이 담겨 있어 분식회계 수사와 관련성이 있다”며 “판결문을 면밀히 검토해 향후 수사 방향을 정할 방침”이라고 말했다.
문상현 기자 moon@ilyo.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