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지난해 11월15일 노무현-정몽준 후보가 단일화에 합의한 뒤 포장마차에서 소주 러브샷(위쪽). 그러나 정 후보측은 대선투표를 8시간여 앞두고 지지철회를 선언했다. | ||
두 사람의 이날 만남은 대선 투표를 불과 8시간여 앞두고 정 대표가 ‘지지철회’를 선언한 후 1백19일 만에 이뤄진 것이다. 당시 노 대통령 진영은 정 대표의 이 같은 돌출행동으로 경악과 분노를 금치 못했다. 지옥과 천당을 오간 그 악몽 같은 경험으로 노 대통령 진영은 대선 후 ‘정몽준’이란 이름 석 자만 들어도 말 그대로 이를 갈았다.
그러나 16일 노 대통령의 표정과 말투에서는 정 대표에 대한 구원의 그림자를 전혀 느낄 수 없었다.
우선 이날 만남은 공식적으로는 정대표가 회장을 맡고 있는 대한축구협회 초청으로 이뤄졌다. 대한축구협회가 정 대표의 강력한 영향력 아래에 있음을 감안하면 사실상 정 대표의 초청인 셈이고 여기에 노 대통령이 응한 셈이다.
상암경기장에서 두 사람은 마치 오랜 정치적 동지처럼 다정한 모습을 연출했다. 정 대표는 경기장에 미리 나와 있다 지하 주차장 입구까지 내려가 노 대통령을 기다렸다. 노 대통령이 도착하자 정 대표는 상기된 표정으로 “안녕하십니까”라고 인사를 건넸다. 노 대통령도 “초청해주셔서 감사하다. 회장님(정 대표)하고 같이 가야 대접을 받을 수 있죠. 회장님과 나란히 갑시다”라고 화답했고 정 대표는 환하게 웃으며 “감사합니다”라고 말했다.
두 사람의 화해무드는 노 대통령의 인사말에서 절정에 이르렀다. 노 대통령은 그라운드에 설치된 연단에 올라 관중들에게 인사말을 하면서 정 대표를 향해 “앞으로 함께 협력해 한국축구발전과 국가발전을 위해 노력하겠다”고 말했다. 정 대표는 노 대통령을 선수단에게 안내하며 노 대통령의 허리를 가볍게 잡기도 했다.
귀빈석으로 이동하는 과정에서 정 대표가 노 대통령에게 “오늘 좋은 말씀을 해줘 감사하다”고 인사하자 노 대통령은 “맞는 말을 했는지 잘 모르겠다”고 웃으며 답했다. 이어 전반전이 끝난 뒤 다과회에서 정 대표는 노 대통령에게 방미 때 “부시 대통령과 골프를 치는 게 어떠냐”고 정치적 조언까지 했고 노 대통령은 “그렇게 시간이 날 것 같지 않다”고 답했다.
정 대표의 ‘지지철회’ 이후 정 대표에 대한 노 대통령의 태도에 주목해온 사람들은 이날의 분위기에 고개를 갸우뚱거리고 있다. 정 대표의 지지철회 직후 노 후보는 “빨리 정 대표를 찾아가 공조를 회복하라”는 참모들의 종용에 “차라리 잘됐다. 대통령이 안되면 그만이지 그렇게는 못한다”고 완강히 버텼다. 당시 주변에 있었던 한 참모는 “대놓고 화를 내지 않았지만 노 후보가 분노를 삭이는 표정이 섬뜩할 정도였다”고 회고했다.
노 대통령은 지난 1월22일 한국보도사진전에 참석해서도 정 대표와 후보단일화에 합의한 뒤 국회 근처의 포장마차에서 ‘러브샷’을 하던 사진을 보고는 “이 사진 때문에 골병들었지. 결과적으로는 잘 됐지만…”이라고 말해 여전히 앙금이 남아있음을 내비쳤다. 이후에도 두 사람 사이에 화해를 위한 정치적 교감이 오간 흔적은 포착되지 않았다. 노 대통령 측근 중 일부나 민주당 내 구파 일부가 “노 대통령이 정 대표를 포용해야 한다”고 주장하긴 했지만 힘을 얻지는 못했다.
▲ 지난 16일 축구 한일전에 참석한 노무현 대통령 과 정몽준 회장이 다정한 모습을 연출해 세인의 관심을 집중시켰다. 이종현 기자lee@ilyo.co.kr | ||
‘보답설’은 주로 노 대통령 측근들이 주장하고 있다. 노 대통령의 핵심 측근으로 꼽히는 한 민주당 의원은 “노 대통령이 정 대표의 대선 전날 공조파기에 대해 분노한 것은 사실이지만 후보 단일화의 약속을 지켜준 것에 대해 그간 고마워하는 마음을 갖고 있었다”고 말했다.
이 의원에 따르면 노 대통령은 정 대표가 후보 단일화에 합의했지만 여론조사 이후 후보 등록을 포기한 데 이어 선거 공조에까지 나서리라고는 기대를 하지 않았다. 그러나 정 대표가 대선 승리 이후의 지분 문제로 속을 태우긴 했지만 결국 공동선대위 의장을 수락한 데 이어 선거운동에 까지 나서자 노 대통령은 고마운 마음을 여러 차례 표시했다는 것이다.
실제로 대선 당시 노 후보의 지지율 추이를 감안하면 ‘후보 단일화’가 노 후보 당선에 결정적으로 기여했다는 것을 부인하기는 어렵다. 이와 관련, 여권 일각에서는 이미 노 대통령이 정 대표에게 측근을 통해 이 같은 뜻을 은밀하게 전달했다는 설도 나오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두 사람의 화해가 고마움에 대한 답례 이상으로 확대될 가능성은 그리 높지 않다는 게 노 대통령 측근의 대체적 분석이다. 노 대통령의 또 다른 측근은 “상암경기장의 화해는 시기의 문제일 뿐 언젠가는 이뤄질 일”이라며 “그러나 두 사람의 화해가 곧 정치적 공조체제 복원으로 이어지는 것은 아니다”고 못박았다.
주로 야당과 반노세력을 중심으로 제기되고 있는 ‘밀약설’은 노 대통령과 정 대표가 신당 창당을 위해 밀약을 했다는 분석이다. 즉 노 대통령이 정치적 명분과 세력을 정 대표가 재력을 제공해 신당을 창당한다는 것이다.
실제로 민주당 내 강경 개혁파들은 이미 여러 차례 신당 창당 가능성을 언급해왔고 노 대통령 역시 이 같은 방향에 동조해온 것으로 알려졌다. 이들이 신당 창당과정에서 어려운 점 중 하나로 꼽아온 것이 적어도 1백억대를 상회할 것으로 추정되는 창당 자금의 조달이다. 그런데 정 대표가 동참할 경우 이 문제를 합법적으로 해결할 수 있다는 것이다. 이와 관련, 야당 일각에서는 벌써부터 정 대표가 대선 후보 등록을 포기하면서 대선 자금으로 비축해둔 돈이 수백억원대에 이른다는 설이 흘러나오고 있다.
물론 여기에 대해서는 강력한 반론이 제기되고 있다. 정 대표가 ‘지지철회’로 정치적 이미지나 신뢰도 면에서 최악의 상황에 있는 만큼 ‘창당자금 조달’만을 목적으로 정 대표와 신당을 함께할 것이라는 시나리오는 조잡한 ‘음모론’에 불과하다는 것이다. 실제로 정치권 일각에서는 정 대표가 차기 총선에서는 울산에서조차 쉽게 당선을 장담할 수 없다는 분석도 나오고 있다.
그러나 밀약설을 제기하는 야당 인사들은 다소 다른 입장을 보이고 있다. 야당의 한 재선의원은 “노 대통령이 대선에서의 정 대표의 공로를 높게 반복해서 강조하다보면 정 대표에 대한 평가가 변할 수 있다”며 “특히 정 대표가 한때 영남 대표성을 일정정도 갖는 것처럼 인식됐던 점을 감안해보면 신당 창당에 정 대표를 끌어들이는 방안은 한 번쯤 시도해볼 만한 시나리오”라고 말했다. 노 대통령이 지지철회로 빛이 바랜 ‘한국정치사상 최초의 후보 단일화 약속 이행’이란 정 대표의 정치적 업적을 재조명해줄 경우 분위기가 반전될 수 있다는 것이다.
노 대통령이 다수의 적대세력에 의해 포위된 상황을 돌파하기 위해 정 대표를 활용했다는 분석도 있다. 노 대통령은 취임 이후 각종 개혁정책을 추진하면서 정계 재계 언론계 문화계 등으로 끊임없이 전선을 확대해왔다. 더구나 노 대통령이 상대하는 적대 세력은 모두 우리사회의 다수 기득권 세력인 반면 노 대통령의 추종세력은 소수인 데다 과거 비주류였다.
결국 노 대통령으로서는 다수에 의해 포위된 상황에서 대기업 오너이자 영남권 출신으로 전형적인 한국사회의 주류 다수파인 정 대표와 화해 제스처를 취함으로써 상황 반전을 시도했다는 것이다. 실제로 정 대표가 지지철회의 정치적 실수에 대한 노 대통령의 ‘사면’에 보답하는 차원에서 ‘노무현 정부’의 지지자이자 ‘노무현 개혁’의 전도사로 나설 경우 노 대통령에게는 상당한 도움이 될 수도 있다. 최근 노 대통령이 김대중 전 대통령을 청와대로 초청한 것도 당내 다수파인 동교동계 등 구파와 호남민심을 겨냥했다는 차원에서 같은 맥락으로 볼 수 있다.
물론 현재로서는 이 같은 분석들이 구체적 사실관계를 바탕으로 한 것은 아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지지철회 직후 상황 등을 감안하면 전혀 풀릴 것 같지 않던 두 사람의 극적 화해는 정치적 의구심을 불러일으킬 수밖에 없고 각종 설을 양산할 것으로 전망된다.
이필지 언론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