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화성 3·1운동만세길’ ‘안성 3·1운동 기념관’ ‘몽양 기념관’ 순국선열 희생·독립 정신 고취
화성 3.1운동 만세길.
1919년 4월. 3·1운동의 만세 소리가 화성에 닿았다. 장안면 수촌리에서 시작된 만세 행렬은 우정면 화수리를 거쳐 31km를 돌며 면사무소를 불태우고 주재소를 파괴했다. 총을 쏘는 일본 순사에 맞서며 격렬히 저항한 화성의 3·1운동이었다. 이후 일제의 잔인한 보복을 겪었지만, 화성의 용기와 독립 의지를 보여준 위대한 발걸음이었다.
화성시는 3·1운동 100주년을 맞아 독립정신을 기리는 ‘3·1운동 만세길’을 조성했다. 100년 전 그때, 우리 선조들이 대한독립만세를 외치며 걸었던 바로 그 길 31km 구간이다. 만세길의 시작점에 ‘2019 아이코닉 어워드’ 건축 분야 대상을 수상한 만세길 방문자센터가 있다.
오랜 시간 지역의 보건지소였던 건물이 길 여행자에게 정보와 휴식을 제공하고 일제 저항의 역사를 기억할 수 있는 특별한 공간으로 재탄생했다. 바닥의 검은 화산석은 3·1운동 후 불타버린 마을을 상징하고 벽돌을 쌓아 만든 높이 9m 기념비에는 당시 만세운동에 참여했던 희생자들의 이름이 새겨져 감동을 더한다. 방문자센터에서 ‘만세길 여권’을 발급받고 15개 포인트에서 스탬프를 찍으면 특별한 완주 훈장을 받을 수 있다.
안성 3.1운동기념관.
전국의 3·1 만세운동 중에서도 안성의 실력 항쟁은 가장 주목받았다. 주민들이 힘을 모아 일제의 통치 기관을 무력화시키고 일본인을 몰아내며 ‘2일간의 해방’을 쟁취했기 때문이다. 전국에서 유례를 찾기 어려운 결과로 놀라운 성과였지만 이후 일제의 잔혹한 보복으로 가장 많은 희생자가 발생한 곳이기도 하다.
안성3·1운동기념관은 순국선열들의 희생과 독립정신을 기리기 위해 당시 만세운동의 집결지였던 만세고개에 설립됐다. 전시관에는 일제에 의한 우리 민족의 수난과 안성의 3·1운동에 대하여 자세히 보여준다. 전국으로 퍼진 대한독립만세의 물결, 양성과 죽산 등 안성의 고을마다 펼쳐진 만세운동, 실력 항쟁으로 일제를 몰아낸 2일 천하가 기록돼 있다. 특히 3·1운동에 사용된 빛바랜 태극기와 독립운동 선열들을 보면 그 숭고한 희생에 절로 고개가 숙여진다. 체험관에는 당시 약 2000여 명이 모여 만세를 외쳤던 양성우편소와 일제의 악랄한 고문이 자행된 고문실과 수감방을 재현하고 있다.
몽양 여운형 기념관.
1945년 8월 15일. 연합군에 항복한 일제는 조선의 치안권을 몽양에게 이양한다. 당시 민중에게 실질적인 지도력을 발휘할 수 있는 사람이란 판단이었다. 몽양은 건국준비위원회를 결성해 보름 만에 전국 145개의 지부를 개설했다. 우리 민족이 독자적인 국가 수립의 의지와 능력을 보여준 것이다.
일본에서도 민족의 지도자로 인정한 몽양 여운형의 생가·기념관은 독립운동과 평화통일을 위해 일생을 바친 선생의 삶을 올바로 알리기 위해 설립됐다. 약관의 나이에 학교를 설립하고 집안의 노비들을 해방했으며, 1919년 중국 지린성에서 대한독립선언을 주도해 도쿄 유학생의 독립선언과 3·1 기미독립선언, 만세운동의 시발점이 된 이야기 등은 큰 감동을 전한다.
기념관에서는 몽양의 일생을 알 수 있는 상설전시 외에도 몽양과 사진찍기 체험도 가능하다. 크로마키 기법을 통해 마치 몽양과 함께 찍은 듯한 사진을 완성할 수 있다. 몽양은 광복 후 좌우 연합과 남북통일을 위해 애쓰다 12번의 테러를 당하며 여생을 마쳤다. 이후 군사정권 때는 독립운동 시절 레닌, 마오쩌둥, 호찌민과 교류했다는 이유로 공산주의자 취급을 받기도 했다. 몽양 여운형 기념관은 모두를 아우르려고 했지만 서로에게 부정당한 의로운 독립운동가의 일생과 숭고한 정신을 보여주는 곳이다.
김장수 기자 ilyo22@ilyo.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