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버트 리처드 이사는 국가신용등급을 담당하고 있지 않기 때문에 공식 견해로 받아들이기 힘들다”(재경부 국제금융 관계자)
한국의 국가신용등급 조정문제로 한국 정부와 국제신용기관이 신경전을 벌이고 있다. 마찰을 빚고 있는 당사자는 한국 경제정책을 총괄하고 있는 재경부와 미국의 세계적인 신용평가기관인 스탠더드 앤드 푸어스(S&P).
신경전의 발단은 문제의 로버트 리처드 이사가 최근 “한국 신용등급 조정은 연말 대선이 끝난 뒤에 고려할 것”이라고 밝힌 데서 비롯됐다. 리처드 이사는 이와 함께 현 상황에 비춰 한국의 신용등급 조정(상향)은 시기상조라며 ‘부정적’ 견해를 비춘 것으로 전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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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지난해 8월 한국을 방문한 존 챔버스 S&P 상무(오른쪽)가 신동규 재경부 국장과 악수하고 있다. 왼쪽은 타카히라 오가와 부사장. | ||
특히 재경부는 신용등급 조정에 부정적 의사를 표명한 리처드 이사의 자격에 대해 의문을 제기했다. 국제금융과 관계자는 “리처드 이사는 기업신용을 담당하는 인물이며, 국가 신용등급 담당자는 다른 사람”이라고 전했다.
사실 재경부의 주장도 틀린 것은 아니다. 리처드 이사는 S&P의 기업 신용담당 고위관계자이며, 국가 신용등급은 존 챔버스 상무와 오가와 부사장이다. 때문에 리처드 이사의 발언은 S&P의 입장을 공식적으로 대변하고 있다고 보기는 힘들다. 이점에서 본다면 리처드 이사의 발언 내용에 크게 무게를 실을 상황은 아니라는 게 전문가들의 견해다.
그러나 문제는 재경부가 비중을 두지 않아도 될 S&P 관계자의 발언에 그토록 예민하게 반응하고 있느냐는 점이다. 재경부의 반응 수위를 보면 “한국 정부가 국제 신용평가 기관에 끌려가고 있다”는 인상으로 비쳐질 정도다.
한국 정부는 지난 97년 외환위기가 도래하기 전까지도 국제 신용평가기관의 평가내용에 대해 관심이 없었다. 외환위기 전까지 한국의 국제 신용등급이 A+ 수준을 유지하고 있었으니 신용평가 기관들의 평가에 신경 쓸 처지는 아니었다.
그러나 외환위기 이후 국가신용등급이 정크본드 수준인 BBB로 추락하면서 외화부채에 적용되는 이자율이 급등하면서 국제 신용평가기관의 평가에 매달리게 됐다. 무디스, 피치, S&P 등 세계 3대 신용평가기관의 말 한마디, 평가내용 하나에 온통 신경을 쏟았던 것.
이렇게 되자 국제 신용평가 회사들이 한국의 경제정책이나 정책운용에 막강한 영향력을 행사할 정도로 입지가 높아졌다. 일부 신용평가 기관들은 노골적으로 자신들이 요구하는 정책수단을 한국 정부가 채택토록 강요하는 사태까지 벌어진 것으로 알려져 있다.
일부에서는 “국제 신용평가기관들이 한국 정부를 갖고 논다” “일부 정책담당자들이 자신들의 업적 부풀리기를 위해 국제 신용평가회사들의 비위를 맞추고 있다”는 등의 비난도 제기됐다.
어쨌든 외환위기 사태 이후 한국 정부의 국제신용평가기관에 대한 접촉은 매우 적극적이었고, 이 결과 지난해부터 한국 신용등급은 점진적으로 상향됐다.
특히 올 들어 전윤철 재경부 장관이 세계경제회의 등에 잇따라 참석하면서 신용평가기관 관계자들의 협조를 끌어내 지난 3월 무디스가 한국의 신용등급을 A3로 두 단계나 상향시키기도 했다.
이어 피치의 경우도 조만간 A-로 상향조정하는 방안을 검토중인 것으로 알려져 한국 국가신용등급은 외환위기 이전 수준으로 점차 다가서고 있는 상황이다.
이런 와중에 S&P가 대선 후 신용등급 조정이라는 다소 의외의 반응을 보이고 있으니 정부 관계자들로서는 다소 신경이 쓰이는 점인 것만은 분명하다. 구조조정과 경기회복도 비교적 가시적이라는 점에서 신용등급 상향을 주저해야 할 특별한 이유가 있는 것은 아니라는 게 정부 관계자들의 설명.
그러나 일부 경제계 관계자들은 “정부가 마치 국가 신용등급 상향을 정책성공의 표창장으로 생각하고 있는 모습으로 비쳐지는 것은 잘못”이라는 비판을 하고 있다.
국제신용평가 회사들은 자사의 이익이나 편의에 따라 얼마든지 신용등급을 조정할 수 있는 것이며, 실제로 그렇게 하고 있음에도 한국 정부 관계자들은 신용평가 결과를 정부의 업적으로 여기는 것은 착오라는 지적인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