삼성그룹 내부 교통정리부터 국정농단 사건 대법원 판결에 정부와의 ‘조율’까지 거치느라…
문재인 대통령이 지난 10월 10일 오전 충남 아산시 삼성디스플레이 아산공장에서 열린 삼성디스플레이 신규 투자 및 상생협력 협약식에 도착, 이재용 부회장과 인사하고 있다. 사진=청와대 제공
삼성디스플레이는 지난 10월 10일 충남 아산캠퍼스에서 문재인 대통령과 이재용 부회장, 이동훈 삼성디스플레이 사장, 양승조 충남도지사 등이 참석한 가운데 차세대 QD디스플레이 생산시설 구축 및 연구개발에 대해 총 13조 1000억 원 규모의 투자 계획을 발표했다. 삼성의 역대 대형 디스플레이 사업 투자 중 최대 금액. 10조 원은 시설 투자에, 3조 1000억 원은 차세대 기술 개발에 사용된다.
오는 2025년까지 세계 첫 QD디스플레이 양산인 ‘Q1 라인’을 구축한다는 게 회사의 계획이다. 핵심은 기존 LCD 라인을 차세대 디스플레이인 QD디스플레이 라인으로 전환하는 것이다. 8세대 LCD 라인이 단계별로 바뀌면서 오는 2021년부터 8.5세대 65인치 이상 ‘초대형’ QD디스플레이가 생산된다.
삼성이 투자하겠다는 QD디스플레이는 기존 디스플레이보다 한 단계 더 진화한 기술로 평가된다. LCD는 백라이트에 의해 빛을 내는데, 이후 개발된 OLED는 자체 발광을 할 수 있어 LCD보다 얇고 응답속도가 빠르다. QD디스플레이는 초미세 반도체 입자인 ‘퀀텀닷’을 통해 전기나 빛 에너지를 받으면 스스로 빛을 낸다. OLED의 최대 약점인 ‘번인(burn-in)’ 현상으로 인한 색감 저하나 짧은 수명 등을 극복할 수 있다.
삼성디스플레이가 다시 대형 OLED 패널 생산을 시작한다는 점도 주목받고 있다. 삼성은 2005년 세계 최대 크기인 21인치 OLED를 개발했고 2013년엔 55인치 OLED TV를 선보였지만 낮은 수율 때문에 OLED 생산을 중단했다. 이후 대형 OLED 시장은 LG디스플레이가 세계 시장을 독점했다. 삼성디스플레이는 스마트폰에 사용되는 중·소형 OLED를 주력으로 생산해왔다.
삼성디스플레이의 변화는 일찌감치 예견됐다. 중국 디스플레이 업체들의 급성장을 의식했다는 게 중론이다. 중국 업체들은 당국의 전폭적인 지원을 받아 시장 상황에 관계없이 공급량을 큰 폭으로 늘려 가격을 낮추는 전략을 쓰고 있다. IHS마킷이 집계한 통계를 보면, 2016년 대형 디스플레이 시장에서 한국은 35%로 1위였고 중국은 26%였지만, 가격경쟁이 치열해진 2017년부터는 1위 자리를 내준 뒤 2018년 한국 27%, 중국 34%로 격차가 벌어졌다.
개별 기업으로 보면 올해 1분기 중국 BOE가 대형 디스플레이 시장 점유율 1위를 차지했다. 10년 이상 왕좌를 지켜오던 LG디스플레이는 2위로 밀렸다. 삼성디스플레이는 점유율이 9.9%로 5위 수준이다. 디스플레이 업계 관계자는 “최근 수년 사이 삼성이든 LG든 기존 대형 디스플레이는 만들면 만들수록 적자가 쌓이는 상황이었다”며 “차세대 디스플레이는 기술 장벽이 높아 중국 업체가 쉽게 추격하지 못한다. 삼성이 디스플레이 사업에도 ‘초격차’ 전략을 써 시장 판도를 한 번에 바꿔 놓는 전략이 나올 것이라는 관측이 적지 않았다”라고 설명했다.
지난해 말 단행된 삼성디스플레이의 조직개편은 올해 투자와 같은 구체적인 움직임이 있을 것이라는 예상에 힘을 실었다. 삼성디스플레이는 그동안 크게 LCD와 OLED로 나눠 사업부를 구성했는데, 이번엔 중소형, 대형 사업부로 바꿨다. 대형 디스플레이 사업 확대를 앞두고 조직을 새롭게 정비할 것이란 예상이 나온 이유다. 투자는 올해 여름이 유력하게 점쳐졌다.
문재인 대통령이 지난 10일 오전 충남 아산시 삼성디스플레이 아산공장을 방문, 손을 들어 인사하고 있다. 사진=청와대 제공
다만 투자 결정은 당초 예정보다 다소 미뤄진 것으로 평가된다. 복수의 삼성그룹과 삼성디스플레이 관계자들의 말을 종합하면, 투자결정에 대해 회의적인 목소리가 적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반대도 있었던 것으로 전해진다. 삼성의 한 관계자는 “투자를 한다면 왜 한국에 해야 하는지, 대형 디스플레이에 대한 투자가 적절한지, 왜 지금 해야 하는지 등에 대한 언급들이 있었다”고 귀띔했다.
삼성전자와의 내부 교통정리도 필요했던 것으로 알려졌다. 삼성전자가 그동안 LCD 기반의 QLED TV로 세계 시장 1위를 유지해왔기 때문에 삼성 디스플레이 투자와 생산 라인 전환 결정에 시간이 필요했던 것이다. 여기에 삼성전자가 그동안 차세대 TV와 관련해 ‘QD-OLED TV’와 ‘마이크로 LED TV’ 투 트랙 전략을 선언했던 만큼 우선순위를 두고 내부적인 고심이 있었던 것으로도 전해진다.
현재 삼성디스플레이가 만든 패널을 삼성전자에 판매하는 구조인 만큼, 자연스럽게 삼성 디스플레이의 차세대 패널(대형 디스플레이) 전략이 삼성전자의 차세대 TV전략에도 영향을 미칠 수밖에 없다. 이에 대해 삼성전자 관계자는 “투 트랙 전략은 그대로 유지한다”고 설명했다.
국정농단 사건과 관련한 이재용 부회장의 대법원 판결도 투자 일정 결정에 영향이 있었던 것으로 전해진다. 복수의 삼성 관계자들의 말을 종합하면, 내부 교통정리는 이동훈 삼성디스플레이 사장이 직접 삼성전자를 비롯한 그룹 경영진들에게 QD디스플레이 사업 추진 필요성을 표현하는 방식으로 일부 해결했다.
이후 지난 8월 26일 이재용 부회장이 삼성디스플레이 충남 공장을 방문해 경영진 회의 과정에서 “LCD 사업이 어려워도 대형 디스플레이 사업을 포기하면 안된다. 신기술 개발에 박차를 더해 새로운 미래를 선도해 나가야 한다”고 언급한 것을 기점으로 대규모 투자에 대한 결단이 사실상 내려진 것으로 분석됐다. 재계 관계자는 “삼성디스플레이 방문 직후 이재용 부회장에 대한 대법원 판결이 내려지면서 계획들이 일부 밀리게 된 것으로 보인다”라고 말했다.
정부와 삼성의 ‘교감’에 시간이 필요했다는 분석도 나온다. 이번 삼성 디스플레이 투자계획 발표 자리까지 포함하면 문재인 대통령이 이재용 부회장을 만난 건 이번이 아홉 번째다. 특히 문 대통령은 지난해 7월 인도에 위치한 삼성 스마트폰 공장 준공식을 시작으로 지난 4월 반도체 화성공장에 방문했다. 삼성의 주력 사업인 스마트폰, 반도체, 디스플레이 부문 모두를 확인했다.
재계 다른 관계자는 “정부로서는 기업들의 투자와 고용 확대가 필요하고, 기업들은 이미 상수가 된 미-중 무역분쟁과 최대 변수였던 한-일 무역 갈등과 관련해 정부와 유기적인 협력이 필요한 상황”이라며 “이번 투자와 관련해 대통령과 정부 관계자들이 참석하는 행사까지 마련됐었던 만큼 시기 등과 관련한 조율이 필요했던 것으로 보인다. 실제 이번 ‘삼성 13조 원 투자설’은 정치권과 지자체로부터 시작되기도 했다”고 설명했다.
문상현 기자 moon@ilyo.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