넘치지도 모자라지도 않는 ‘모든 김지영의 삶’…굳이 이해를 바랄 이유가 없다
영화 ‘82년생 김지영’ 스틸컷. 사진=롯데엔터테인먼트 제공
이미 같은 감정을 느낄 수밖에 없는 사람들에게 또 한 번 동지애를 느끼도록 채찍질해야 할 이유도, 마지못해 고개를 끄덕일 사람들에게 “이해해 주셔서 감사합니다”라고 고개를 숙여야 할 이유도 없다. 영화는 그저 흘러갈 뿐이고, 그것이 누군가의 삶에 맞닿아 있는 것이 이야기의 전부다.
1982년 태어나 2019년 오늘을 살아가는 김지영(정유미 분)의 이야기를 그린 영화 ‘82년생 김지영’은 개봉 전부터 거센 비판에 맞설 준비를 해야 했다. ‘페미니스트를 위한 성경’이기 때문이라는 다소 사소한 이유로 무장한 비판 세력 탓에 주연인 정유미와 공유는 모두 “용감한 선택을 했다”는 칭찬 아닌 칭찬을 받기도 했다.
보통 일본 배우가 항일 영화에 출연하거나, 진보 성향의 배우가 보수를 비판하는 영화에 출연하는 것을 두고 우리는 “용감한 선택을 했다”고 말한다. ‘82년생 김지영’이 이런 선택의 기로를 나눌 만큼 우리 사회에서 중요한 지점에 서 있다는 방증이 되는 걸까. 아마 남들은 그렇게 생각하더라도, 정유미는 그렇지 않은 모양이다.
영화 ‘82년생 김지영’ 제작보고회 현장. 사진=박정훈 기자
14일 오후 서울 광진구 롯데시네마 건대입구에서 열린 ‘82년생 김지영’ 언론배급시사회 기자간담회에 참석한 정유미는 “진짜 용기를 내야 하는 일은 따로 있다고 생각한다”며 선을 그었다.
그러면서 “저는 시나리오를 읽고, 나누고 싶었던 이야기를 전하는 게 가장 중요하다는 생각이 들었다”며 “(젠더 이슈 등) 다양한 반응이 나와서 사실 좀 놀라기도 했지만 제가 이 영화를 통해 하고 싶었던 이야기가 딱 하나였기에 그 마음으로 임했다. 성별과 나이 구분 없이 관객 분들은 분명 이 영화를 보실 마음이 있을 거라 생각한다”고 설명했다.
영화 속 김지영에 대한 비판의 주안점은 “각각의 여자들이 삶을 살면서 한 번 정도 겪을까 말까 한 일을 한 여자의 삶에 다 욱여넣어 일반화시켰다”는 데 있었다. 그러나 이 영화는 그렇기에 더욱 현실적이고, 바라보는 이들로 하여금 모든 장면에서 고개를 끄덕이게 한다. 경험해 보지 않아 이해가 되지 않는 지점이 있더라도 또 다른 지점에서 공감하게 되는 것이다. 이렇다 보니 이 영화를 ‘공감의 연쇄’라고 표현하는 것이 더할 나위 없이 적절해 보인다.
영화 ‘82년생 김지영’ 스틸컷. 사진=롯데엔터테인먼트 제공
이날 기자간담회에서 김도영 감독은 작품에 대해 “자신의 말을 잃어버린 여자가 자신을 찾는 과정”이라고 설명했다. 그는 “처음에는 아무 말도 할 수 없고 다른 사람의 목소리를 빌려서 밖에 이야기할 수 없었지만, 결국 마지막에 지영이가 자신의 이야기를 하며 성장해 가는 이야기라 생각했다”고 연출 의도를 전하기도 했다.
감독의 말대로 극중 김지영이 속마음을 말하는 것은 모두 다른 이의 입을 빌린 것이었다. 그 중에는 자신과 같은 또래의 목소리도 있고, 전세대인 어머니, 그 전세대인 할머니도 있다. 자신의 속내까지도 타자화시켜 밝히는 이 장치는 관객으로 하여금 다시 한 번 제3자의 눈으로 김지영의 삶을 온전히 바라볼 수 있도록 한다.
김지영의 남편 대현(공유 분) 역시 아내를 자신의 울타리 밖으로 내몰아 자신과 아내를 분리한다. “(육아나 가사 일을) 도와줄게” “너랑 우리 딸이 힘들어 할까봐 그러지” 마치 가정의 모든 일이 지영의 목에만 달려 있고, 남편은 종종 시혜적으로 손길을 내미는 것만으로 모든 일을 해결할 수 있다는 착각에서 비롯된 대현의 이 대사는, 아무리 공유가 말한 것이라도 용서가 되지 않는다.
영화 ‘82년생 김지영’ 스틸컷. 사진=롯데엔터테인먼트 제공
공유는 대현에 대해 “현실이라는 바닥에 발이 닿아있는 캐릭터”라고 설명했다. 앞서 tvN 드라마 ‘도깨비’로 강한 판타지 이미지를 구축했던 그가 이번에는 좀 더 현실감 있는 ‘보통의 남자’를 연기하게 된 셈이다. 그의 말대로 대현은 현실 어디에서나 볼 수 있는, 아주 나쁜 남편도 아주 좋은 남편도 아닌 보통의 남편상을 보여줬다.
이날 기자간담회에서 공유는 “내가 이 영화를 왜 했을까 생각했는데, 간단히 말하면 저는 이 시나리오를 읽고 위로를 받았다. 그래서 하게 된 것 같다”며 ‘82년생 김지영’ 출연 이유를 밝혔다.
그러면서 “관객 분들도 영화를 통해 그런 위로를 충분히 느끼셨으면 한다”며 “젠더 이슈는 크게 생각하진 않았다. 관객 분들이 각자 기준에 따라 이 영화를 어떻게 보실지 궁금하다”고 개봉에 앞선 논란을 일축하기도 했다.
영화 ‘82년생 김지영’ 제작보고회 현장. 사진=박정훈 기자
영화는 마지막으로 향하면서 씁쓸한 현실 속 한 줄기 희망을 보여준다. 지영이의 엄마보다 지영이가 나은 삶을 살았듯, 지영이보다 그의 딸 아영이가 또 다른 나은 삶을 살기를 희망하는 뜻에서 원작을 살짝 틀었다는 게 김 감독의 이야기다.
김 감독은 “원작에선 결말이 씁쓸한 이 현실을 돌아보게 만들었다면 시나리오에선 2019년을 살아가고 있는 많은 김지영들에게 희망의 메시지를 주고 싶었다”며 “영화를 통해 엄마, 누이, 동료들, 친구들이 어떤 풍경에 있는지 둘러보게 되는 기회가 되면 좋겠다. 이 땅의 지영이들이 이렇게 살았구나 하고 한 번 쯤 바라보는 영화가 되길 바란다”고 설명했다.
한편 ‘82년생 김지영’은 멀리서 보면 순탄해 보이지만, 가까이서 보면 굴곡진 ‘당신과 나의 삶’을 그린 작품이다. 커리어를 잃고 가정주부로의 삶을 살고 있는 1982년생 김지영(정유미 분)이 2019년 현재까지 겪고 있는 여성의 삶이 과거와 현재를 교차하며 펼쳐진다. 뻔하다면 뻔할 수밖에 없는, 그러나 그래서 더 와 닿을 수밖에 없는 이야기. 113분, 12세 이상 관람가. 23일 개봉
김태원 기자 deja@ilyo.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