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생은 똥선생처럼”… 악역 특화 배우가 말하는 ‘가늘고 길게 사는 법’
배우 김희원. 사진=CJ엔터테인먼트 제공
“다른 배우 분들은 일이 하나 끝나면 ‘난 나만의 시간을 가질래’ 하면서 여행도 떠나고 그러시잖아요. 그런데 저는 다음 일이 안 잡혀 있으면 잘 못 쉬어요. 이러다 또 일이 들어오지 않으면 어떡하나 하는 트라우마가 있어서 일을 계속 하는 게 더 편해요. 지금은 많이 좋아지긴 했는데, 그래도 여전히 불안불안하죠. 그런데 지금 ‘신의 한 수:귀수편’ 끝나고는 아직 다음 작품 들어온 게 없어요, 큰일났네(웃음).”
오랜 극단 생활을 통해 탄탄한 연기 경력을 다져 왔지만 기회는 그리 쉽게 오지 않았다고 했다. ‘혹시 술자리 인맥이 없어서 그런가’라는 생각에 마시지 못하는 술도 들이부어 봤지만 “건강만 축났을 뿐”이라며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제가 술을 정말 못 마셔서 술자리에 잘 안 가요. 술자리에서 저를 부르지도 않고(웃음). 그런데 연극계 동료들이 잘 되는 걸 보면서 ‘나는 술자리도 못 가고 사회생활도 못해서 (성공하지 못하나)’라는 자격지심을 갖게 된 거예요. 그래서 마시지도 못하는 술을 미친 듯이 마신 적이 있어요. 어차피 한 잔만 마시면 바로 기절하니까 다음날 일어나서 또 한 잔 마시고, 또 기절하고… 그때는 그런 마음이었어요. 이렇게 가난하게 사느니 그냥 죽어버리자. 그런데 그냥 몸만 상하고 아무 것도 없더라고요(웃음). 그래도 늦게 참 잘 된 편이죠.”
대중이 배우 김희원이라는 이름 석 자를 기억하게 되기까지 그의 내면에서도 여러 갈등이 있었다. 아마 그만큼 절실하게 연기의 길을 갈구하고 또 절절하게 포기하려 한 배우도 많지 않을 것이다. 계속되는 가난에 결국 연기를 포기하고 돌연 호주로 향했던 그는 그곳에서 1년 반 동안 페인트공으로 일했다. 하루 종일 가만히 벽을 칠하면서 나름의 ‘면벽 수행’을 했다고 한 김희원은 문득 “내가 왜 이러고 있나”라는 생각에 부딪쳤다고 한다.
“연기를 때려 치고 호주에 간 건 용기라고 표현하면 안 될 것 같아요. 그건 그냥 비겁하게 도망간 거고, 잘못 도망갔다고 후회해서 다시 돌아온 거죠(웃음). 호주에서 페인트칠을 하면 그래도 먹고 살 돈을 충분히 벌 수는 있었어요. 그런데 문득 내가 행복한가, 라는 생각이 들더라고요. 돈이 없어도 행복하냐면 그건 아닌데, 그렇다고 돈이 있는데 행복하냐고 물으면 또 그것도 아니고… 그때 인생에 대해 참 많이 생각했던 것 같아요. 그러고 나니까 ‘아, 나 다시 연기해야겠다’ 하는 마음이 생겼던 거죠. 근데 이것도 거창하게 ‘난 반드시 다시 연기를 하겠어’라는 게 아니라 ‘몰라, 일단 돌아가!’ 하는 마음이었어요(웃음).”
배우 김희원. 사진=CJ엔터테인먼트 제공
“동물원에서 제일 키우기 힘든 동물이 사자나 호랑이 같은 맹수래요. 사슴과 토끼 같은 애들은 조금만 아파도 아픈 티를 내서 바로 치료를 할 수 있는데 맹수들은 죽기 일보 직전까지 너무 참아서 모른다는 거예요. 똥선생도 사슴, 토끼 같은 캐릭터거든요. 허당에 약골인데 싸움도 못하고, 엄살만 많고… 그런데 이런 애들이 꼭 오래 살잖아요(웃음). 조금이라도 위험하다 싶으면 바로 자리를 피하고 도망가는 데 일가견이 있는 친구예요. 인생은 얘처럼 살아야죠, 가늘고 길게(웃음).”
‘가늘고 길게’ 살고 싶은 김희원의 실생활은 어떨까. 이 질문에 강렬한 마스크와는 전혀 어울리지 않는 답변이 나왔다. “골목에 애들 모여 있잖아요? 그러면 저는 그 앞으로 안 지나가고 돌아가요….” 특히 교복을 입은 아이들이 두려운 존재란다.
그러면서도 문득 한 가지 미담을 꺼내기도 했다. “교복을 입고 몰려 있는 아이들을 피해 문제를 일으키지 않는 것도 하나의 용기”라는 주장에서 확장된 질문, “용기라는 건 무엇일까”에 대한 그의 이야기다.
“어느 날 제가 집에 가는데 아파트 입구에 보니까 웬 아저씨가 젊은 여자 분의 팔목을 꺾은 채로 핸드백을 뺏어서 털고 있더라고요. 순간 겁이 확 나서 ‘어쩌지’ 하고 고민하는데, 일단 저희 집이잖아요. 똥개도 자기 집 앞에서는 50%는 먹어주고 간다는데… 그래서 용기를 내서 ‘뭐 하는 거야 이 새X야’ 하고 소리를 질렀더니 그 아저씨가 저를 빤히 쳐다보더라고요. 순간 기 싸움에서 이긴 줄 알고 계속 소리를 질렀는데 알고 보니까 아저씨는 택시기사였고, 여성 분이 택시비를 안 내고 도망가다가 잡힌 거더라고요(웃음). 하지만 저는 나름대로 용기를 낸 거라고 생각했어요. 진짜 강도였다면 제가 머뭇거리는 사이에 도망갔을 수도 있고, 해코지를 했을 수도 있으니까요. 저도 살면서 의로운 일을 한 번쯤은 해봤다고 할 수 있을 것 같아요(웃음).”
극중에서 그의 용기는 귀수(권상우 분)와 외톨이(우도환 분)의 주물공장 대국 신에서 찾아볼 수 있다. 귀수를 꾀어내기 위한 미끼로 붙잡히면서 용광로 위에 대롱대롱 묶인 채 긴 시간을 고통 속에 홀로 버티는 것도 용기라면 용기였다. 김희원은 이를 두고 “올해 영화 가운데 최고로 고생한 신”이라며 몸서리를 치기도 했다.
영화 ‘신의 한 수:귀수편’ 스틸컷. 사진=CJ엔터테인먼트 제공
투덜거림 속에서도 애정이 묻어날 정도로 김희원에게 연기란 이미 그의 삶의 일부가 된 것처럼 보였다. 자신에게 “지금 행복하냐”는 질문을 했을 때, 망설임 없이 “그렇다”고 답을 할 수 있는 것은 그가 비로소 ‘좋은 배우’가 된 다음의 일이라고 했다. 연기만 바라보고 걸어온 만큼 그의 행복과 불행을 가르는 척도도 연기 그 자체가 될 수밖에 없다는 이야기다.
“물론 이전보다 지금이 경제적으로는 행복하죠. 밥 사먹을 돈도 없던 예전에 비하면 지금은 차도 있고, 돈도 있긴 한데 제게 ‘행복하지 않냐’고 묻는다면 쉽게 대답하진 못할 것 같아요. 행복이라는 걸 어떻게 정리하기가 좀 어려운데, 좋은 배우가 되면 행복하다고 말할 수 있지 않을까요(웃음)? 아직 제 자신이 좋은 배우가 됐는지, 안 됐는지는 잘 모르겠지만 행복한지에 대해서는 아마 그렇게 확신한 이후에나 말씀드릴 수 있을 것 같아요.”
김태원 기자 deja@ilyo.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