완벽한 캐스트가 엮어낸 ‘시리즈 적통’의 귀환, 기다린 보람이 있다
‘터미네이터: 다크 페이트’ 스틸컷. 사진=월트디즈니컴퍼니코리아 제공
오는 30일 개봉을 앞둔 ‘터미네이터: 다크 페이트’는 터미네이터 시리즈의 자타공인 ‘적통’이다. 1991년 개봉한 ‘터미네이터 2: 심판의 날’에서 이어지는 스토리이기 때문에 28년 만에 제작된 실질적인 ‘터미네이터 3’으로 볼 수 있다. 시리즈에서 서자 취급을 받고 있는 ‘터미네이터 3: 라이즈 오브 더 머신’ ‘터미네이터: 미래전쟁의 시작’ ‘터미네이터 제니시스’에 실망했던 관객들을 환호하게 한 것도 이런 이유에서 기인했다.
여기에 기존 감독인 제임스 카메론이 다시 제작 일선에 서는가 하면, 전작의 주역 사라 코너(린다 해밀턴 분)의 귀환이라는 믿을 수 없는 일까지 성사되면서 오랜 팬들을 더욱 들뜨게 했다. 터미네이터의 오리지널 시리즈를 성공으로 이끌었던 공식들이 다시금 스크린에 떠오른 셈이다.
앞선 1~2편이 그랬듯 영화는 절망적인 미래를 앞두고 있는 사회의 어둡고 음울한 분위기를 유지하면서도 눈을 뗄 수 없는 강렬한 액션을 가미해 관객들을 완벽하게 사로잡는다. ‘터미네이터: 다크 페이트’는 스카이넷으로 말미암았던 ‘심판의 날’을 종결시킨 후의 세계관을 다루고 있다. 사라 코너와 그의 아들 존 코너(에드워드 펄롱 분)가 그들을 제거하기 위해 과거로 보내졌던 터미네이터 T-1000을 쓰러뜨리고, 스카이넷의 시작을 막아 예정돼 있던 미래를 바꾼 직후부터 이야기가 시작된다.
‘터미네이터: 다크 페이트’ 스틸컷. 사진=월트디즈니컴퍼니코리아 제공
이들의 저항이 단순히 ‘어두운 운명’을 바꾼 것이 아니라 늦췄을 뿐이라는 점은 ‘라이즈 오브 더 머신’의 배경과 유사하다. 스카이넷은 사라졌지만 새로운 인공지능 ‘리전(Legion)’이 탄생했고, 리전에 위협이 되는 인물을 제거하기 위한 신형 터미네이터 ‘Rev-9(레브나인·가브리엘 루나 분)’이 2020년 멕시코시티로 보내진다. Rev-9의 제거 대상은 멕시코시티에 거주하고 있는 대니 라모스(나탈리아 레이즈 분)다.
터미네이터 시리즈가 단순한 액션 블록버스터가 아니라 추격 스릴러로도 높은 평가를 받는 이유는 초반 약 10여 분 간 이어지는 터미네이터 간의 추격전에서 찾을 수 있다. 대니를 지키기 위한 슈퍼 솔저 ‘그레이스(맥켄지 데이비스 분)’의 등장 이후 다리 밑과 자동차 공장, 그리고 고속도로로 이어지는 화려한 추격전은 우리가 왜 이 영화를 ‘심판의 날’ 이후 28년 간 기다려 왔는지를 설명해 준다. 제거하려는 자와 지키려는 자 가운데 어느 쪽이 먼저 대상에게 도착하는지. 양 측의 시선으로 번갈아가면서 이어지는 이들의 추격전은 전체 러닝타임 중 단연 손에 땀을 쥐게 하는 시퀀스라 할 수 있다.
더욱이 이 추격전의 끝에 서 있는 인물의 등장은 관객들의 첫 환호성을 이끌어 내기에 충분하다. 추격전을 다소 식상하다 여길 냉소적인 관객들도 이 장면에서는 머리 보다 몸이 먼저 움직여 박수를 치고 있을지 모른다.
‘터미네이터: 다크 페이트’ 스틸컷. 사진=월트디즈니컴퍼니코리아 제공
바주카포를 손에 든 백발의 사라 코너의 등장은 이제껏 헐리우드 영화 역사상 꼽혀 왔던 ‘배드 애스(Badass)’의 순위를 단번에 뒤집는다. 지난 21일 터미네이터: 다크 페이트의 감독과 출연진의 내한 기자회견에서 가장 많이 언급된 ‘배드 애스’라는 찬사가 왜 특히 린다 해밀턴에게 집중적으로 쏟아졌는지, 이 신을 보면 곧바로 이해가 될 것이다.
터미네이터 시리즈를 통해 ‘여전사’의 개념을 재정립함으로써 당시의 여성들에게 여성 캐릭터의 새로운 지평을 보여준 것도 사라 코너였다. 그런 그가 백발의 모습으로도 강렬한 아우라와 완벽한 액션을 갖춰 다시 한 번 스크린에 등장한 데에 환호하지 않을 관객은 없을 것이다. 그의 이상과 발자취를 따라간다는 점에서 터미네이터: 다크 페이트는 스크린의 안과 밖을 모두 만족시킨다.
이처럼 ‘전설적인’ 사라 코너의 카리스마에 밀리지 않으면서 뚜렷한 존재감을 비친 그레이스도 눈 여겨 볼만 한 ‘새로운 세대’다. 인간의 육체에 기계를 더한 슈퍼 솔저(강화 인간)로서 그는 기존의 수호자였던 T-800에 비해 몹시 감정적이면서도 인간적인 면모를 보여준다. 이는 관객들로 하여금 대니를 지키는 그레이스가 슈퍼 솔저로서의 목적, 그리고 인간 그 자체로 살아가기 위한 목적을 위해 어디까지 진화할 수 있는지를 더욱 세밀하게 관찰할 수 있도록 한다.
‘터미네이터: 다크 페이트’ 스틸컷. 사진=월트디즈니컴퍼니코리아 제공
그레이스의 인간성은 오직 대니에게로만 향하고 있다. 대니와 그레이스의 유대관계는 2편에서 존 코너와 T-800의 유사 부자 관계에서 더 나아가 관객들에게 ‘지켜야 하는 것’과 ‘희생시켜야 하는 것’의 본질을 두고 질문을 던진다. 인류의 희망이기 때문에 지켜야 한다는 기계적인 결론에서 벗어나 관객이 직접 목적의 차이와 경중을 생각하게 만드는 장치가 여기서 발동하는 것이다.
터미네이터 시리즈의 명성을 생각하면 다소 빈약한 설정이라는 비판이 나올 수 있는 뻔한 질문이기도 하다. 하지만 이 같은 질문을 던짐으로써 1편부터 다크 페이트까지 이어진 터미네이터 오리지널 시리즈의 트릴로지가 완성된다. 미래에서 온 제거자가 수호자로, 그리고 수호자이면서 동시에 구원자로서의 답을 구해나가는 여정이 시리즈의 큰 줄기로 자리매김하는 것이다. 그리고 이는 극의 중심이 되는 여성 캐릭터의 서사가 연약한 피보호자에서 전사로, 그리고 구원자로 옮겨지는 것과 궤를 같이 한다.
터미네이터 시리즈에서 빼놓을 수 없는 T-800의 변화도 인상적이다. ‘목적을 달성한 터미네이터는 어떻게 되는가’ 라는 단순한 의문에서 시작된 그의 행적은 잠시 암전됐다가 ‘칼’ 이라는 이름으로 이어진다.
‘터미네이터: 다크 페이트’ 스틸컷. 사진=월트디즈니컴퍼니코리아 제공
T-800이 아닌 칼은 막강한 화기(火器)와 그에 필적하는 유머 감각까지 장착한 전례 없는 터미네이터다. 앞선 터미네이터 2에서 메모리를 리셋한 뒤 존 코너로부터 ‘인간적인 행동과 감정’을 배운 T-800을 기억하는 관객이라면 그의 이 같은 면모가 그다지 낯설지 않을 것이다.
더욱이 배우 본인의 나이가 기억나지 않을 정도로 완벽한 ‘아 윌 비 백’ 액션은, 2시간 여 이어지는 이 영화의 러닝타임 중 그가 등장할 때마다 모든 관객들이 엄지손가락을 치켜세우게 만든다. 영화의 중심은 대니와 그레이스, 사라 코너에게 맞춰져 있긴 하지만 칼의 등장이 이 영화에 더없이 완벽한 한 방울을 더한 셈이다.
이처럼 ‘다크 페이트’는 ‘심판의 날’ 이후 28년을 기다려 온 옛 팬들을 배신하지 않는다. 다만 예민한 팬들은 일부 시퀀스나 서사의 굴곡을 두고 “예전 같지 않다”거나 “전작을 너무 오마주했다”며 상반된 실망감을 느낄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이는 사라 코너와 T-800의 그림자 아래 가려질 정도로 사소하고 또 그다지 중요하지도 않다. 우리는 앞서 더 이상 낙담할 힘도 없을 정도로 고개를 숙여보지 않았나. 실망감을 느낀 관객들은 터미네이터 2가 아닌 전작을 감상한 뒤 다시 다크 페이트를 보자. 다시 보니 선녀 같다는 말이 나올 것이다. 128분, 15세 이상 관람가. 30일 개봉.
김태원 기자 deja@ilyo.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