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랑스러운 꼴통’ 박정민부터 ‘단발머리 핑크공주’ 마동석까지 빼놓을 데 없는 수작 코미디
영화 ‘시동’ 스틸컷. 사진=NEW 제공
분명 주연인 박정민도 샛노란 단무지 머리로 시선을 사로잡고 있는데, 정작 다 보고 나면 기억에 남는 건 마동석의 단발머리밖에 없는 영화 ‘시동’은 코미디 영화이면서도 관객들에게 생각해 볼만한 화두를 하나 던진다. 누구나 인생에서 한 번쯤 방황할 수 있는 것이고, 아직 하고 싶은 일을 찾지 못했다면 그것은 단지 ‘시동’이 걸리지 않았을 뿐이라는 것. 어딘가에 반드시 당신을 필요로 하는 곳이 있을 것이며, 그것이 무엇이든지 이제까지의 방황은 그곳을 찾기 위한 워밍업에 불과했다는 것이다.
조금산 작가의 동명의 웹툰을 원작으로 하는 영화 ‘시동’은 학교도 싫고 엄마의 잔소리는 더 싫은 중졸 반항아 택일(박정민 분)이 무작정 가출해 우연히 들른 장풍반점에서 남다른 포스의 주방장 거석이 형(마동석 분)을 만나게 되면서 ‘진짜 세상’을 맛보는 유쾌한 이야기를 그린다.
개봉 전부터 “마동석이 단발머리로 나온다”는 입소문 아닌 입소문으로 관객들의 궁금증을 유발했던 터다. 그 궁금증이 허무하지 않게, 단발 마동석은 이제까지의 마동석 시네마틱 유니버스(MCU)에서 고를 수 있는 또 다른 완벽한 맛으로 자리 잡는다.
영화 ‘시동’ 스틸컷. 사진=NEW 제공
단발머리에 핑크색 트레이닝 복, 깜찍한 헤어밴드에 트와이스 춤까지 춘다니. 네 가지 가운데 하나만 하고 있어도 보는 입장에서는 올라가는 입 꼬리를 멈출 수 없는 판에, 홈쇼핑 바지도 아니고 4종 세트로 스크린 앞에 선 그를 보고 터지지 않을 관객이 있을까. 이처럼 시각에 엄청난 파괴력을 선사하는 마동석의 ‘거석이 형’은 대사마저도 어디 하나 빼놓을 곳이 없다. 시각 파괴를 간신히 피한 관객이라도 그의 대사에서 터지는 웃음을 참을 수 없을 것이다.
다만 후반부로 갈수록 거석이 형에게서 그동안 그가 맡아왔던 뻔한 ‘마동석 캐릭터’로 판단할 만한 장치들이 튀어나와 관객들을 실망케 할 수 있다. 그러나 이 같은 섣부른 판단은 결말에서 다시 주워 담게 될 것이다. “마동석 님이 다 해 주실 거야”로 귀결됐던 모든 마동석 영화와 달리 ‘시동’은 영화의 시작과 끝을 모두 택일(박정민)에게 쥐어주고 있기 때문이다.
앞선 ‘사바하’나 ‘타짜: 원 아이드 잭’에서 현실과는 다소 동떨어진 역할로 2019년 스크린을 장악했던 박정민은 ‘시동’에서 다시 친근한 이웃으로 돌아왔다. 30대에 만 18세 중졸을 연기함에도 이상하리만치 위화감이 없는 그는 이 영화에서 코미디부터 액션, 신파에 이르기까지 가장 넓은 스펙트럼으로 관객을 웃기고 울린다. 이른바 ‘생활 밀착형 연기’로 이런 류의 배역을 맡을 때마다 캐릭터와 물아일체가 되던 박정민이다. 이번 ‘시동’에서도 박정민이라는 배우를 믿고 보는 관객들을 결코 실망시키지 않는다.
영화 ‘시동’ 스틸컷. 사진=NEW 제공
물론 ‘방황하는 청춘’이라고 하면 당연히 따라 붙을 수밖에 없는 양아치적인 순간도 있다. 택일과 상필(정해인 분)의 대사 절반 이상이 욕설로 채워져 있는 부분이나, 택일이 엄마 정혜(염정아 분)에게 대하는 철없는 태도가 스크린에 비춰질 때마다 이제까지 이어졌던 객석의 웃음이 멈추기도 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택일에게서 민감할 정도의 불쾌감을 느낄 수 없는 것은 ‘본체’인 박정민의 계획된 연기 덕으로 보인다.
10일 서울 롯데시네마 건대입구점에서 열린 ‘시동’ 언론배급시사회에 참석한 박정민은 “방황하는 청소년이라고 하면 어쩔 수 없이 떠오르는 불편한 이미지를 최대한 배제하고 사랑스러운 모습을 보여줘야 ‘시동’과 맞닿는다고 생각했다”고 설명했다. 그의 말대로 택일은 어딘지 모르게 한 대 쥐어박고 싶으면서도 한편으로는 따뜻하게 안아주고 싶은 양면의 감정을 갖게 만든다.
택일의 엄마 역을 맡은 염정아와 박정민의 합도 이 같은 모순된 감정에 힘을 실어준다. 염정아라는 배우를 생각하면 주인공의 엄마라는 이름표는 다소 가벼울 수 있다. 그러나 영화 속 그의 모습을 보고 있자면, 바로 염정아였기에 단순히 속 터지는 아들을 둔 엄마가 아닌 그 이상의 인간상을 연기해 냈다는 생각이 든다.
서울 압구정CGV에서 열린 영화 ‘시동’ 제작보고회에 배우 박정민, 정해인, 염정아가 참석해 포토타임을 갖고 있다. 사진=박정훈 기자
또 다른 방황하는 청춘으로 등장한 택일의 친구 상필 역의 정해인 역시 ‘시동’을 통해 새로운 면모를 뽐냈다. 이제까지 다정하고 달달했던 연하남의 정석을 벗고, 현실과 상상의 괴리에 후회하고 두려워하는 청년의 모습을 완벽하게 표현해 낸다. 로맨스로만 그를 접했던 관객들에겐 가히 정해인의 새 발견이다.
‘시동’에서 또 하나 주목할 점은 신예 배우의 활약이다. 커터 칼처럼 날카로우면서도 언제든 날을 집어넣을 준비가 돼있는 가출소녀 ‘경주’ 역의 최성은은 ‘시동’이 그의 데뷔작이다. 택일에게 결코 밀리지 않는 강렬한 헤어스타일과 살아있는 눈빛, 거석이 형에 비견될 만한 강렬한 포스의 경주는 영화의 요소요소에서 빛나는 존재감을 보여준다.
이처럼 ‘시동’은 다양한 인간 군상을 다루면서도 처음부터 끝까지 하나의 이야기를 강조한다. 최정열 감독은 “‘시동’에는 여러 캐릭터가 나온다. 캐릭터를 통해 감히 (관객들에게) ‘어울리는 일을 찾아야 해’ 라고 하는 것은 아니다. ‘그것이 무엇이든 괜찮다’라는 이야기를 하고 싶었다”라고 설명했다. 하고 싶은 일을 찾는다면, 그때 가서 꺼진 ‘시동’을 다시 켜도 괜찮다는 게 그의 이야기다.
한편 영화 ‘시동’은 정체불명 단발머리 주방장 ‘거석이 형(마동석 분)’을 만난 어설픈 반항아 택일(박정민 분)과 무작정 사회로 뛰어든 의욕충만 반항아 상필(정해인 분)이 진짜 세상을 맛보는 유쾌한 이야기를 그린 작품이다. 무턱대고 폭소하다가 후반부에 치고 들어오는 코 끝 찡한 감동을 위해, 그리고 흐르는 침을 위해 티슈도 한두 장 준비해 가자. 18일 개봉.
김태원 기자 deja@ilyo.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