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0조 원대 신탁시장 고사 위기는 벗어났지만 시장 규모 제한과 깐깐해진 감독은 부담
“은행장들의 표정이 하나같이 굳어있었다. 그때만 해도 결과는 정해져 있었던 것과 다름 없었다. 은성수 금융위원장이 시작 전에 가벼운 인삿말을 건넸지만 반응이 거의 없었다.” 지난 12일 오전 정부서울청사 금융위원회 대회의실에서, 은 금융위원장이 주재한 은행장 간담회를 지켜본 한 시중은행 관계자의 말이다.
지난 12월 12일 오전 정부서울청사 금융위원회 대회의실에서 열린 은행장 간담회에 참석한 은행장들. 사진=연합뉴스
이날 간담회에서는 최근 논란이 된 해외 금리연계 파생결합펀드(DLF) 불완전판매 문제의 재발을 막기 위해 지난 11월 14일 금융위가 마련한 종합대책의 최종안을 발표할 예정이었다. 당시 금융위는 ‘고난도(고위험) 금융상품’ 개념을 도입해 은행에서 사모펀드 판매를 제한하기로 했다. 특히 그동안 은행들의 ‘황금알을 낳는 거위’로 통했던 신탁 상품의 구조가 사모펀드와 비슷하다는 이유로 판매 금지 방침을 밝혔다.
DLF의 수수료율은 1% 내외에 불과해 판매가 제한돼도 큰 문제가 없지만, 신탁 수수료율은 DLF의 10배 이상이다. 최근 수년 사이 경쟁적으로 비이자 수익을 확대하고 있는 은행 입장에선 알토란과 같은 사업부문을 포기해야 하는 상황인 셈이다. 은행들은 투자자 보호를 강화하겠다며 대신 신탁 판매는 허용해달라는 입장을 여러 경로로 밝혔지만 불과 간담회 하루 전까지도 “은행은 ‘신탁이 다 죽는다’라며 협박해선 안 된다”고 밝히는 등 금융당국은 강경한 입장을 고수했다. 간담회에 참석한 은행장들의 표정이 굳어있던 이유다.
그러나 금융위가 이날 내놓은 결과는 모두의 예상을 벗어났다. 금융위가 정의한 ‘고난도 금융상품’은 파생상품이 들어있어 가치를 평가하는 데 투자자의 이해가 어렵고, 최대 원금손실가능비율이 20%를 초과하는 상품이다. 주식, 채권, 부동산 등 실물상품이나 기관투자자 간 거래와 투자자가 직접 판단해 거래소에서 매입하는 ETN 등도 고난도 금융상품에서 제외됐다.
이같이 예외적으로 제외되는 상품을 빼고 사모펀드와 신탁 중 고난도 금융상품에 해당하면 은행에서 판매가 불가능하다. 금융위는 원금손실 가능성 20%를 넘는 고난도 금융상품 신탁은 원칙적으로 판매를 금지하지만, 기초자산이 주요국 대표 주가지수고, 공모로 발행되며 손실배수가 1 이하로 적은 파생결합증권은 신탁 판매를 할 수 있도록 했다. 허용된 기초자산 주가지수는 5개(KOSPI200, S&P500, Eurostoxx50, HSCEI, NIKKEI225)다. 공모펀드의 경우 고난도 금융상품에 해당해도 은행이 계속 판매할 수 있다.
DLF 사태와 같은 불완전 판매는 차단하면서, 시장을 꾸준히 키워내 일반투자자에게 재산을 늘릴 수 있는 기회는 막지 않겠다는 게 금융위 입장이다. 지난 11월 종합대책이 발표된 이후 은행들이 “내년 실적 전망이 불투명한 상황인데 ELT 판매를 금지하면 영업이 더 어려워진다”며 읍소했던 점, 신탁에서 손실이 크지 않았다는 점 등도 반영된 것으로 해석된다.
은행장 간담회에서 발언하는 은성수 금융위원장. 사진=연합뉴스
조건부 판매 허용이지만 은행 관계자들은 일단 ELT 판매가 원천적으로 금지되지 않은 것은 다행이라고 입을 모은다. 기존 입장과 비교하면 충분히 환영할 만한 수준이라는 것. 기초자산 주가지수가 5개로 줄었지만, 지금까지 은행들이 판매해온 상품 대부분 5개 안에 한정돼 있었던 만큼 크게 달라지는 건 없다는 판단이다. 시중은행 다른 관계자는 “기존보다 위험도를 낮춰 판매하거나 상대적으로 투자자 보호 장치가 갖춰진 공모펀드 중심으로 영업하라는 취지로 이해했다”고 말했다.
어디까지가 고위험 상품인지를 두고 불거졌던 논란도 최종안에서 충분히 해결됐다는 시각도 있다. 11월 대책만으로는 구분이 불가능하다는 것이 중론이었다. 금융위는 고위험 상품 판단은 1차적으로 금융회사가 하고, 분명하지 않으면 금융투자협회에 판단을 의뢰하면 된다고 밝혔다. 그래도 해결이 안 될 경우 금융위원회가 고난도금융상품판정위원회를 구성해 논의 후 결정하기로 했다.
다만 세부적으로 최종안을 따져보면 은행들이 마냥 반기기 어렵다는 지적도 나온다. ELT 판매량은 올해 11월 말 잔액 범위 안에서만 판매가 허용된다. 금융위 집계를 보면, 최근 은행권에서 팔린 신탁 상품 규모는 37조~40조 원이다. 앞으로 은행은 어떤 형태로 신탁을 팔든 최대 40조 원 이내에서만 판매할 수 있다. 금융권 관계자는 “40조 원 기준에 따라 조절해야 하는 만큼 기존 상품을 일찍 상환하거나 해지해야 할 수도 있다”고 말했다. 금융권 다른 관계자는 “수익을 정해준 만큼만 내라는 것으로 읽힐 수도 있어 아쉬움이 없진 않다”고 전했다.
감독 체계가 깐깐해진 점도 은행으로선 부담이다. 금융위는 은행이 고위험상품을 제대로 취급하고 있는지 점검하는 시스템을 만들기로 했다. 금융위와 금감원이 고위험상품 투자자 리스크 점검회의를 정례화해서 손실 가능성을 모니터링하고, 금융투자상품 판매에 대한 현장점검 횟수도 늘리기로 했다. 특히 금감원은 내년 중 은행이 신탁을 비롯한 고위험상품 판매를 제대로 하고 있는지 테마검사를 실시한다.
금융회사 경영진의 책임도 강화됐다. 고난도 금융상품 영업행위준칙에 판매과정에서의 인사결정 책임을 명확히 명시하도록 했다. 고난도 금융상품 판매여부는 대표이사 확인을 거쳐 이사회 의결로 결정해야 한다. 최근 DLF 사태와 관련해 우리은행, KEB하나은행 CEO(최고경영자) 제재 근거가 명확하지 않아 논란이 되고 있는데, 이번에 강화된 조치에 따르면 앞으로 고위험 상품에서 문제가 발생하면 대표이사와 이사회의 책임을 확실히 물을 수 있게 된다. 금융권의 또 다른 관계자는 “혹이 하나 더 붙은 셈이다. 투자자 보호에 방점이 찍혀 있어 은행으로선 따르는 게 맞지만 부담스러운 건 사실”이라고 말했다.
은행들은 금융위 최종안과 별개로 자체적인 투자자 보호 장치를 만들 계획이다. 앞서의 시중은행 임원은 “금융위에서 업계 요청을 듣고 ‘한 발 물러서 준’ 만큼 ‘성의’는 충분히 보여야 하지 않겠느냐”며 “다만 신탁 외에 새로운 수익원을 찾는 일도 병행하게 될 것”이라고 말했다.
문상현 기자 moon@ilyo.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