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설 없는 30대 배우’의 마지막 10대 연기…‘인간 박정민’에 가장 가까운 모습
배우 박정민. 사진=NEW 제공
지난 13일 서울 종로구 삼청동의 한 카페에서 만난 박정민은 방황하는 10대 청소년 ‘택일’로서 연기에 대해 “촬영하기 전에 우려가 많았다”고 운을 띄웠다. 이전에도 10대 연기를 한 적은 있지만 지금처럼 캐릭터와 배우의 나이 차가 많지 않았다는 것이다.
“캐스팅될 때 제가 감독님께 수차례 말씀 드렸거든요. 괜찮으시겠느냐고(웃음). 그런데 막상 촬영을 시작하고 나니까 화면에 찍힌 모습에서 크게 이질감이 안 느껴지더라고요. 그걸 보고 ‘아, 그냥 우기면 되겠다’ 생각했어요(웃음).”
조금산 작가의 동명 웹툰을 원작으로 하는 영화 ‘시동’은 학교가 싫고 엄마의 잔소리는 더 싫은 중졸 반항아 택일(박정민 분)이 무작정 가출해 우연히 들른 장풍반점에서 남다른 포스의 주방장 거석이 형(마동석 분)을 만나면서 ‘진짜 세상’을 맛보는 유쾌한 이야기를 그린다. 앞서 올 상반기 ‘사바하’나 ‘타짜: 원 아이드 잭’을 통해 다소 현실과 동떨어진 캐릭터를 보여줬던 박정민이 ‘인간 박정민’의 모습에 가장 가까운 캐릭터로 관객을 마주하는 작품이기도 하다.
배우 박정민. 사진=NEW 제공
영화의 주역은 박정민이지만, 그를 갱생의 길로 이끄는 ‘거석이 형’의 이야기가 나오지 않을 수 없었다. 단발머리와 핑크색 운동복, 머리띠까지 착용한 채 트와이스의 춤을 추는 마동석은 샛노란 단무지 머리로 연기하는 박정민 그 이상의 아우라를 뽐낸다. 박정민은 촬영 현장에서 가장 적응이 안 됐던 것이 바로 이 거석이 형이었다고 짚었다.
“영화를 찍을 때 제일 무서운 게 적응이 돼버리는 거거든요. 저는 노란 머리고, 경주(최성은 분)는 빨간 머리를 하고 있는데 이런 게 촬영 몇 회차씩 지나가니까 다들 적응이 돼서 별로 동요들을 안 하는 거예요. 나중에 택일이가 검은 머리를 하고 나오는 신이 있는데 그때서만 ‘헉, 얘 머리가 검은 색이야’ 하고 놀라긴 하더라고요. 근데 거석이 형은 적응하는 데 시간이 더 많이 걸렸어요. 그 단발머리가(웃음)….”
마동석처럼 박정민과 함께 ‘시동’에서 첫 호흡을 맞춘 정해인은 그와의 연기로 ‘성공한 덕후(팬)’가 됐다고 말한 바 있다. 이 이야기가 나오자마자 박정민은 “걔는 왜 그러는지 모르겠다. 자기가 더 잘나가면서”라며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어 기자들을 웃기기도 했다.
“해인이가 ‘파수꾼’ 영화를 되게 좋아했대요. 어쩌다 해인이 친구랑 저랑 아는 사이여서 통화를 한 번 한 적이 있는데 해인이가 ‘선배님, 나중에 꼭 만나 뵀으면 좋겠다’고 해서 이름을 기억하고 있었어요. 이후에 영화 ‘임금님의 사건수첩’ 우정출연을 할 때도 현장에서 봤고요. 이렇게 서로 알고 있는 상태다 보니까 이번에 처음 같이 촬영하는 건데도 그렇게 어색하지가 않더라고요. 근데 성덕은… 자기가 더 잘나가잖아요(웃음). 그건 좀 부러웠어요, ‘파수꾼’ 머그컵 가지고 있던 거. 나도 없는데 좀 주지(웃음).”
‘덕후’와 관련한 키워드에서 박정민이 최근 빠져 있다는 펭수의 이야기로 자연스럽게 이어졌다. MBC ‘나 혼자 산다’에 출연 중인 그는 펭수에 대한 애정을 숨기지 않고 드러내면서 ‘연예계 펭덕(펭수 덕후)’이라는 별명까지 얻었다. 심지어 이날 인터뷰 현장에서 펭수 굿즈를 무심한 듯 시크하게 보여주기도 했다.
배우 박정민. 사진=NEW 제공
그의 ‘펭덕’ 기질이 드러난 ‘나 혼자 산다’ 출연은 사실 고민에 고민을 거듭한 끝에 결정 내린 것이었다고 했다. 사생활을 잘 공개하지 않는 배우 가운데 한 명으로 꼽히는 박정민은 개인 SNS도 하지 않는다. 그런 그가 예능에서 일상을 공개한다는 것에 대중의 관심도 커지고, 그만큼 부담감도 커지고 있었다.
“출연 결정이 잘한 짓인지 아직도 잘 모르겠어요. 오늘 저는 수면유도제를 먹고 일찍 잘 거예요(웃음). 연기가 아니라 일상의 저를 보니까 제 입장에선 참 한심하더라고요, 쟤 왜 저러나 싶기도 하고(웃음). 그런데 저는 사생활 공개를 일부러 안 하는 게 아니라 공개할 게 진짜 없는 거거든요. 아마 ‘나혼산’ 보시면 아실 거예요. ‘쟤 왜 나오지?’, ‘나 혼자 산다는 걸 알리고 싶어서 나오나’ 이런 반응일 것 같아요(웃음). SNS 같은 경우도 제가 그걸 하다가 사고를 칠 수도 있잖아요. 저만 그렇게 되면 모르겠는데 영화처럼 제작진들이나 다른 분들에게도 피해를 줄 수 있으니까, 그런 점을 생각하다 보면 망설이게 되더라고요.”
거듭된 망설임은 신중함으로 이어진다. 그 덕에 박정민은 ‘구설수가 없는 배우’로 자리매김했다. 2016년 이후로 어엿한 상업 영화의 주역을 맡고 있는 동세대 젊은 배우들 사이에서도 그는 도마 위에 올려놓고 찧어댈 만한 ‘이야깃거리’가 없는 몇 안 되는 배우 중 하나다. 어느 정도 인기를 얻었음에도 과시하려 하지 않고 차분히 자신의 길을 걷는 그를 두고 누군가는 “득도한 배우”라는 우스갯소리를 하기도 한다. 이처럼 박정민을 결코 들뜨게 만들지 않는 배경에는 그의 ‘과거’가 있었다.
“돌이켜 보면 저를 둘러싸고 있는 환경이 옛날보다는 조금 나아졌죠. 그런데 저는 그걸 잘 모르겠어요. 다만 걱정해도 해결되지 않는 것들을 걱정하는 시간이 줄어든 것 같아요. 내가 고민한다고 해서 해결될 문제가 아닌데도 고민하고 걱정하던 걸 덜 하게 됐으니까 그것만으로도 다행이라고 생각해요. 저는 늘 현실의 벽을 느끼고 있었는데 앞으로도 아마 평생 그걸 느낄 것 같아요. 그런데 그런 것에 명확한 답은 없는 것 같아요. 갑자기 저도 모르게 어떤 순간이나 계기로 풀리는 게 많으니까요. 그냥 지금 하는 거나 잘해야지, 하고 살아요. 뭔가 계획을 하면 항상 실망을 하게 되거든요. 전 그래서 계획도 잘 안 하고 살아요(웃음).”
김태원 기자 deja@ilyo.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