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방만경영 바로잡자 ‘반란군’에 넋놓고 당해” 5년 만에 원심 깨고 무죄…성추행 허위 주장 고작 벌금 300만원
박현정 전 대표는 요즘 사진을 찍지 않는다. 언젠간 밝게 웃으며 찍겠다는 심산이다. 사진=연합뉴스
박현정 전 대표는 이번 일로 ‘진짜 기획’이 무엇인지 처절하게 깨달았다. 그가 경험했던 기획은 삼성금융연구소, 삼성생명, 삼성화재 등에서 근무하며 쌓았던 경영기획이었다. 5년 전 그에게 향했던 칼끝에는 흔히 공작이라 불리는 ‘정치기획’ 네 글자가 새겨져 있었다. 그는 “기획이란 걸 깨달았을 때 내가 가진 건 아무 것도 없었다. 그렇게 기획당할 줄 몰랐으니 자료라는 걸 챙길 생각을 못했다. 서울시향에 있었을 때 자료를 모았더라면 아마 지금 서울시향 구성원은 대부분 온전치 못했을 것”이라고 했다.
박현정 전 대표는 박원순 서울시장의 부탁을 받고 2013년 1월 31일 서울시향 수장이 됐다. 금융계에서 오래 커리어를 쌓았던 그는 취임 뒤 근태 관리와 역량 강화, 회계 투명성 등을 강조했다. 당연한 소리 같지만 예술계에서는 이만큼 민감한 말이 없다. ‘예술’이란 단어 뒤에 숨은 나태함은 늘 관리를 거부하는 법이다. 그는 “서울시향은 상상을 초월할 정도로 방만하게 운영되고 있었다. 횡령은 일상이었다. 직원이 빵집에 가서 구성원 간식을 법인카드로 산 뒤 자기가 집에 가져갈 빵도 한가득 같이 샀다. 사무실로 돌아와 가지고 있다가 퇴근할 때 가져가더라. 그게 그냥 습관이었다”고 했다.
박현정 전 대표는 이를 바로잡기 시작했다. 큼지막한 비용부터 손대기 시작했다. 가장 이상했던 건 현금으로 나가는 비용이었다. 법인카드로 하면 피차 증빙이 편하다. 하지만 이상하게도 서울시향에서는 현금 지급이 많았단다. 그는 “비행기표를 현금으로 구매하는 게 이해되지 않았다. 그것도 늘 가장 비싼 걸 샀다. 증빙자료도 항공사 영수증이 아니었다. 그냥 비행기삯이 적혀 있는 인보이스였다. 개인이 손수 제작한 문서였다. 그걸 증빙이라고 내놓으니 어처구니가 없었다”고 말했다.
방만 경영을 바로잡아야 했다. 박현정 전 대표는 제대로 된 관리를 시작했다. 박 전 대표의 ‘관리’는 서울시향 직원들에게 연봉 삭감과도 같았다. 법인카드 사용이 까다로워지니 자신의 삶을 과거와 같이 유지하는 데 자신의 돈이 더 필요했던 까닭이었다. 불만은 사람을 잇는 가장 강력한 끈이다. 그렇게 하나씩 반란군이 모이기 시작했다.
정치기획은 순차적으로 차근차근 진행됐다. 2014년 10월쯤 서울시향 사무국 직원 일부는 정명훈 전 감독에게 박현정 전 대표의 인권 유린 내용이 담긴 탄원서를 보냈다. 정 전 감독은 박원순 시장에게 이 내용을 전했고 탄원서를 작성한 이들은 박 전 대표의 해임을 요구했다. 날아오는 칼날은 단검에서 장검으로 점차 길고 날카로워졌다.
박현정 전 대표는 일단 그만두기로 마음먹었다. 그래도 시기는 조율해야 했다. 서울 시민을 대표하는 의회를 존중했기 때문이었다. 서울시의회 회기가 종료되는 12월 중순이 적당했다. 박 전 대표는 사임 시기를 조율하려 박원순 시장과 면담을 요청했다.
2014년 12월 1일 둘이 만났다. 면담은 허무하게 끝나버렸다. 박원순 시장은 박현정 전 대표가 12월 중순쯤 그만두고 싶다고 말하자 바로 자리를 떴다. 박 전 대표는 “박 시장과 그날 오찬을 함께했다. 박 시장이 바로 서울시향 대표직을 즉시 그만두라고 하더라. 난 그냥 그만둘 수가 없었다. 갈 때 가더라도 서울시의회 회기를 마치는 게 내게 남겨진 마지막 책임이었다. 하지만 박 시장은 그냥 자리를 박차고 나갔다”고 말했다.
모든 행동에는 의도가 담기는 법이다. 박원순 시장과 오찬을 한 지 얼마 지나지 않아 ‘박현정 대표이사 퇴진을 위한 호소문’이 언론에 배포됐다. ‘클래식 악단 여자 대표의 남직원 성추행’이란 프레임은 언론에게 멋진 식전요리였다. “여성인 박 대표가 외부협력기관과의 공식적인 식사 자리에서 술을 과하게 마신 뒤 남자 직원의 넥타이를 당기면서 성기를 만지려고 하는 등 성추행을 저질렀다”고 보도됐다. 서울시가 기름을 부었다. 서울시 시민인권보호관은 2014년 12월 23일 서울시향 직원들의 호소문 내용이 사실이라는 취지의 결정문을 언론에 발표했다. 수사가 시작됐다.
박현정 전 대표가 사임 시기를 놓고 염두에 뒀던 서울시의회 마지막 회기에선 정명훈 전 감독 관련 문제를 비롯 서울시향 문제가 제기될 예정이었다. 그는 “정 전 감독은 행정감사 심판대에 증인 출석을 앞뒀다. 하지만 지금 그 누구도 당시 정 전 감독 관련 문제가 제기되기 직전에 이와 같은 허위 폭로가 터져 나왔다는 걸 기억하지 못한다. 그렇게 ‘여성 권력자의 남성 부하직원 성추행’ 프레임은 모든 걸 덮어 버렸다”고 했다. 박 전 대표는 그냥 떠날 수밖에 없었다.
얼마 지나지 않은 2015년 1월 23일 서울시는 정명훈 전 감독 관련 감사 결과를 내놨다. 특정단원 특혜 의혹이 사실로 드러났다. 재계약업무 등을 담당하는 경영 조직의 업무가 소홀했다며 ‘기관경고’ 조치가 불가피하다는 결과도 함께했다. 항공권 세비 지급이 타당치 않다며 시정 요구도 나왔다. 매니저에게 지급하도록 되어 있는 항공권을 가족이 탑승하기도 했다고 나타났다. 외부출연 및 이중계약, 겸직금지 규정 문제도 불거졌다. 무단 개인영리목적 공연 참가와 정 전 감독 처형의 동창이자 막내아들 피아노 선생이었던 사람을 채용한 사실도 확인됐다. 2016년 3월 2일에는 박현정 전 대표의 성추행 의혹 역시 허위로 밝혀졌다.
박현정 전 대표의 모든 걸 앗아간 이 허위 폭로 사건으로 처벌 받은 사람은 딱 한 명이었다. 자신이 성추행을 당했다고 허위 사실을 배포해 정치기획의 시작을 알린 인물이었다. 그가 이 사태를 벌이고 받은 형벌은 고작 벌금 300만 원이었다. ‘항공료 횡령’ 의혹으로 고발됐던 정 전 감독 역시 검찰 수사 과정에서 무혐의 처분을 받았다. 그리고 최근 서울시는 정 전 감독을 명예감독으로 추대하려고 한다.
직업 없이 몇 년을 지낸 박현정 전 대표는 요즘도 매우 바쁘다. 그는 정명훈 전 감독의 귀환설을 듣고서도 아무 말 없이 그저 자료를 모으고 또 모은다. 왜 그러냐고 물었다. 그는 그저 웃었다.
최훈민 기자 jipchak@ilyo.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