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통 녹아든 일본 대중문화 보며 반성? 웹툰·K-POP 등 트렌드 선도 콘텐츠로 이미 차별화 성공
“세밑에 코타츠(화로 등 난방 기구를 탑재하고 이불을 둘러 온기를 가두는 좌식 탁자)에서 TV로 홍백가합전(일본을 대표하는 인기 가수들이 나오는 연말 NHK의 TV프로그램)을 시청하며 놀다가 새해의 시작인 자정에 종소리를 들으며 토시코시소바(해를 넘기는 때에 먹는 메밀국수)를 먹고 새벽에 기모노 차림으로 신사에 가서 손바닥을 마주치며 참배하고 오미쿠지(운세 제비)를 뽑아 그해의 길흉을 점친다.” 직접 손으로 쓴 연하장이 제때 도착하도록 새해를 앞두고 일찌감치 엽서 지옥(?)에 빠지는 모습은 별첨이다.
이와 같은 풍경은 우리나라와는 분명 거리가 있고, 심지어 일본이 메이지 유신 이후 음력 설을 폐지해 시기마저 다르지만 ‘일본 설날’ 하면 무의식적으로 떠오르는 장면들이다. 일본의 대중문화는 이런 풍경들을 시간과 감정의 흐름을 묘사하면서도 일상성을 확보하는 장치로 곧잘 활용해 왔는데, 특히 만화와 애니메이션, 게임 등에 등장하는 설 풍경은 금붕어 뜨기나 야키소바(볶음국수), 야시장 풍경 등 마쓰리(축제) 하면 떠오르는 풍경과 더불어 일종의 클리셰 같은 역할을 한다.
#한국적인 것에 관한 집착의 정체
반복 학습의 효과는 꽤 놀라운 편이다. 명백히 다른 나라의 풍습인데도 설 하면 자동 재생되듯 떠오르는 건 그만큼 많은 작품이 같은 장면을 ‘일본의 일상’으로 그려 왔기 때문이다. 적당히 전통적인 느낌과 적당히 가족적인 분위기가 뒤섞인 이들 풍경은 한국에서는 일본 대중문화의 시장적 우월성과, 서구권에서는 오리엔탈리즘과 결부되며 일종의 ‘로망’이 된 면도 있었다.
실제로는 한국이 바로 그 일본에 전통과 과거의 흔적을 모조리 파괴당했던 입장인지라 굉장히 이율배반적인 감정이 들기도 하지만, 그럼에도 작품이라는 형태로 생활 문화 속 일면을 반복해 담아내는 모습은 한편으로 부러움의 대상이 되기도 했다. 이러한 클리셰 같은 장면들은 비단 설 풍경에만 국한되지 않은 데다, 또 집요할 만큼 예쁘고 자연스레 묘사돼 한때 많은 이들이 일본 대중문화의 특징을 설명할 때에 중요한 대목으로 언급하기도 했다. 그리고 그런 언급의 뒤엔 늘 “우리는 왜 이런 걸 만들어내지 못할까”라는 자조가 깔리곤 했다.
그래서 한때 한국 사회 전반은 물론 한국 만화와 애니메이션의 주요 논점이자 화두가 바로 ‘한국적인 것은 무엇인가’였다. 이는 비교적 후발 주자로 대중들에게 들어선 라이트노벨 장르에서도 고스란히 치열한 논쟁으로 이어진 바 있다.
가깝게는 설 풍경 같은 ‘일본적인 장면’의 대립항에 놓을 만한 우리의 장면이 무엇이 있는가부터 멀게는 작품 속에 담아야 할 한국의 정취와 그림체는 무엇인가에 이르기까지, 한국의 현실 위에서 딱히 답이 나올 수 없을 이야기에 많은 이들이 목을 매 왔다.
이는 역사적인 측면에서 오는 감정과는 별개로 일본의 영향을 강하게 받고 있음을 부정할 수 없는 대중문화들이 어쩔 수 없이, 또 오래도록 끌어안고 있던 일종의 콤플렉스다. ‘우리만의 것을 만들지 못할 만큼’ 체급이 낮았다는 패배의식이 자리하고 있었다는 사실을 부정할 수 없다.
#어느덧 극복한 일본 콤플렉스
재밌는 건 이러한 콤플렉스가 어느새 많은 부분 해소되고 있다는 점이다. 분명 일본 문화는 한때 강점과 우월성을 지니던 시기를 맞았었다. 버블 경기와 그 여파가 남아 있던 시기 많은 돈과 인적 자원이 몰리며 만들어냈던 소프트웨어 파워는 지금 봐도 실로 대단했고, 한국은 많은 부분에서 압도당했다. 하지만 지금도 이러한 우열이 명확하게 갈리느냐 하면 그렇지 않다고 할 수 있다.
원인은 일본 대중문화의 강점을 ‘일본의 우수성’ 따위로 단순하게 해석해선 안 되는 것과 마찬가지로 다분히 복합성을 띠고 있다. 한국의 소프트웨어 파워가 올라간 점, 일본의 소프트웨어가 사회·정치 분위기와 더불어 답보와 침체를 거듭하는 점, 그리고 한국 대중문화의 시장 판도 자체가 바뀌면서 일본의 영향권에서 벗어나 있다는 점 등이 함께 작용한 결과다.
문법과 형태 자체가 완전히 다른 웹툰을 상업적으로 정착시키며 작가와 독자의 세대교체를 이뤄낸 만화는 물론, 유아·아동 콘텐츠에 특화해 발전을 이뤄낸 캐릭터와 애니메이션은 이제 많은 부분에서 일본의 영향권에서 벗어나 있다. 여기에 세계 음악 시장의 호응을 받고 있는 K-POP 아이돌을 배출한 음악에 이르면 어느덧 일본 대중음악을 상징하던 J-POP의 위치를 넘었다 해도 과언이 아니다. 2020년 1월 27일 열린 미국 그래미 어워즈에서 호스트를 맡은 앨리시아 키스가 여러 다양한 음악 장르군에 K-POP를 직접 거론한 점은 사소할 수 없는 상징성을 보여준다.
분명 일본 대중문화의 한 시기가 대단했다는 점은 인정해야 하고, 지금도 그 시장 규모가 내수만으로도 나름대로 유지되고 있음을 부정할 순 없다. 하지만 지금의 일본 대중문화가 과거만한 소프트웨어 파워를 내고 있는가, 또한 아시아권의 대표성을 지닐 만한 상품을 만들어내고 있는가 하면 고개를 저을 수밖에 없는 것이다. 물론 한국의 현 상황이 마냥 긍정적이지만은 않다. 한국은 좁은 시장과 적은 제작비용에 비해 대중의 기대치와 눈높이가 높아 창작자들 입장에서는 분야를 막론하고 가혹한 환경에 놓여있다. 그럼에도 웹툰이 그러하듯 한국의 대중문화는 전반적으로 높아진 품질 위에서 구현된 압도적인 다양성을 기회로 삼아 수익 다변화와 수출을 꾀함으로써 열악한 부분을 상쇄하려 하고 있다.
만화와 애니메이션 속 ‘일본적인 것’을 보며 ‘한국적인 것’을 찾자는 외침은 결과적으로 답을 찾을 수 없었다. 하지만 한국의 대중문화는 어느새 전통을 억지로 끼워넣으려 노력하기보다 음으로든 양으로든 한국의 현실과 실제가 담긴 모습을 드러내고 사회·문화 트렌드에 맞춰 섞음으로써 어느 나라와도 다른 색채를 드러내고 있다. 정답은 아닐지 몰라도 최소한 이제 일본을 마냥 부러워하지 않아도 되겠다 싶은 점만은 분명해졌고, 그 점이 참 좋다.
만화칼럼니스트 iam@seochanhwe.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