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서울 여의도 서통의 사무실 입구가 닫혀 있다. | ||
서통의 부도는 여러가지 점에서 주목을 받고 있다. 특히 서통은 지난 54년 출범한 뒤 백색가전이 호황을 누리던 60~80년대를 풍미하며 국민들과 함께 성장했던 대표적인 기업이라는 점에서 더욱 안타깝게 만들고 있다.
서통의 창업자는 최준규 회장. 그는 지난 54년 서통의 전신인 서울통상주식회사를 만든 뒤 60년대에 가발수출조합장, 70년대에는 쉐터수출조합장을 역임한 초창기 우리나라 경공업 수출 시대의 산증인이었다.
서통 역시 60년대에는 가발, 70년대에는 쉐터, 80년대에는 썬파워란 브랜드의 건전지로 시대에 따라 업종을 달리하며 끊임없는 변신에 성공한 기업이었다. 하지만 90년대 들어 서통은 시대 흐름을 따라잡지 못했다.
지난 96년 5월 서통은 국내 1,2위를 다투던 썬파워 브랜드의 건전지 사업부의 판매망과 브랜드를 다국적 기업인 듀라셀(96년 질레트에 인수됨)에 1억2천만달러를 받고 넘긴 후 시장에서 철수했다.
생산시설을 갖고 있던 서통은 듀라셀의 주문에 따라 썬파워란 브랜드를 달고 있는 건전지를 생산하는 하청업체로 전락한 것이다. 당시 서통의 건전지사업 매각은 봇물처럼 밀려오는 외국자본의 위력에 굴복한 대표적인 토종 기업의 몰락을 보여준 전형이었다.
서통은 듀라셀 외에 프록터앤갬블과도 초기에 합작회사를 세웠다가 지분을 모두 매각하는 방법으로 시장에서 철수했다. 시장 진출 초기에 숙주 노릇만 하다 점차 외국기업에 경영과 자본을 잠식당한 뒤 버림받은 셈이었다. 그 결과는 외국기업의 국내 시장 진출길을 터주는 꼴이 됐다.
서통은 자사의 대표적인 브랜드였던 썬파워 사업부를 매각한 후 뚜렷한 수입원이 없었다. 다국적 기업인 질레트는 썬파워를 인수한 후 지난 98년 국내 건전지 시장의 양대 브랜드였던 로케트 건전지 상표까지 사들였다.
이들 두 상표가 질레트로 넘어갔지만 브랜드 파워는 예전과 비교해 떨어졌다. 특히 서통이 만들어낸 썬파워의 점유율은 20%대까지 추락했다.
▲ 벡셀(왼쪽)은 현재 서통의 주력 건전지이고 썬파워는 질레트에 넘긴 과거 효자상품. 이종현 기자 | ||
실제로 벡셀은 출시 1개월 만에 18%의 시장점유율을 기록하는 등 순항하는 듯했다. 하지만 벡셀의 성공적인 시장 안착에도 불구하고 모기업인 서통의 경영상황은 거꾸로 악화되고 있었다. 벡셀을 제외한 다른 사업부문의 영업이 침체에 빠진 게 원인이었다.
그러자 서통은 알짜사업 부문인 벡셀을 지난해 1월 모기업인 서통에서 분리하는 조치를 취했다. 벡셀이라도 건지자는 경영진의 판단이 작용했던 것. 기업 분리 이후 벡셀은 지난해 매출 4백40억원에 순이익 20여억원을 기록하는 등 순항하고 있다.
벡셀마저 떨어져 나간 서통의 경영상황은 최악의 상태로 빠져들었다. 결국 회사측은 지난 4월 본사 사옥을 (주)디지털온넷(매각대금 72억원)에 팔고, 필름사업도 KDB론스타컨소시엄에 6백억원을 받고 넘기는 등 자구에 들어갔다. 하지만 누적된 부실로 인한 위기를 벗어나기엔 역부족이었다.
서통은 자산매각을 통해 2천3백50여억원에 달하던 부채를 최근 1천2백억원대로 줄였지만 상황을 바꾸지는 못했다. 이렇게되자 주변에서는 알짜인 건전지사업을 분리한 이면에는 서통의 회생이 어렵다고 판단한 오너측이 벡셀을 건지기 위해 택한 조치가 아니냐는 해석이 오가고 있다.
특히 업계에선 벡셀이 자본금 1백억원에 부채규모 4백여억원, 매출규모 4백여억원으로 모기업인 서통에 비해 재무구조가 우량하고 새로운 수익원으로 떠오르고 있는 2차 전지 사업 등 사업전망이 밝아 최 회장 일가가 경영권을 유지할 경우 다시 재기할 가능성이 큰 것으로 보고 있다.
한편 서통이 과도한 채무부담으로 사업매각, 알짜사업 분리를 거쳐 부도난 과정이 자연사인지, 의도적인 고사였는지에 대한 논란도 재계 일각에서 일고 있다. 자연사가 아닌 고사라면 서통 오너 경영인에 대한 따가운 비판이 제기될 수 있는 부분이기 때문이다.
이에 대해 서통쪽에선 “벡셀의 오너지분도 부채 상환을 위해 매각했다”며 “서통테크놀로지 등 계열사를 합병해 기업경영 정상화를 추진할 것”이라고 밝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