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6월27일 감사원은 김정태 행장이 자사주 매입기간이던 지난해 8월6일 스톡옵션을 행사하고 행사방식 또한 ‘은행에 불리하고 본인에 가장 유리한 방식’을 택해 은행에 최소 13억원, 최대 1백13억원의 손실을 끼쳤다고 금감원에 통보했다. 더불어 국민은행이 카드발급이 부적정한 1백만 명에게 신용카드를 발급해 2002년 신용카드 부분에서만 2천1백88억원의 손실을 내는 등 경영부실을 초래했을 뿐만 아니라 복수카드 발급으로 다중 현금서비스가 가능하게 해 신용불량자를 양산하는 결과를 초래했다며 사실상 징계를 요구하고 나섰다.
이에 이미 올해 초 낙마설과 함께 ‘장례절차를 준비할 정도의 중병’을 앓으며 곤욕을 치렀던 김 행장에게 또다시 퇴직압력이 가해지는 것 아니냐는 추측과 함께 일각에서는 중징계가 가해질 경우 ‘중도퇴진’이라는 불명예를 짊어질 수도 있으리라는 예상이 나오기도 했다.
그러나 이날 열린 금융감독위원회의에서 정부측 위원 및 민간위원들은 별다른 논쟁없이 김정태 행장에 대해 가장 경미한 징계인 ‘주의적 경고’ 조치를 결정했다. 주의적 경고는 ‘동일사안이 되풀이될 경우에는 문책하겠다’는 뜻으로 금융감독당국이 금융기관 임직원에 대해 내릴 수 있는 공식 제재(해임권고, 업무집행정지, 문책적 경고, 주의적 경고) 중 가장 가벼운 것.
사실 이날 금감위 징계가 경미한 수준에 그칠 것이라는 예상은 그간의 경과를 지켜보면 충분히 예견 가능한 일이었다. 처음 감사원의 통보를 받은 금감원에서는 김 행장에 강력한 제재를 가해야 한다는 강경파의 주장이 압도적이었던 것으로 전해진다. 이와 관련해 금감원의 한 고위 관계자는 징계조치가 내려졌던 지난 5일 “스톡옵션의 행사방식은 은행이 정하는 것으로 되어 있으나 김 행장은 이사회의 정식 논의를 거치지 않고 자신에게 유리한 현금교부방식으로 스톡옵션 행사방식을 결정했다”며 “김 행장이 대표이사인 만큼 법령위반은 아니지만 문제가 있는 것은 사실”이라고 강조하기도 했다.
스톡옵션 행사방식은 보통 현금차액교부방식, 신주발행, 구주교환과 같은 세 가지 방식이 사용되며 지난해 8월 1백억원대의 스톡옵션 수익을 남겼던 김 행장은 가장 큰 차익을 올릴 수 있는 현금차액교부방식으로 스톡옵션을 행사했다. 스톡옵션 행사방식을 결정할 권한을 가진 최고경영자가 자신에 가장 유리한 방식으로 스톡옵션을 행사할 수 있도록 한 셈이다.
그러나 이 같은 강경기류는 금감원 내외의 전문가들로 구성된 제재심의위원회를 거치면서 다른 방향으로 흐르기 시작했다. 징계안건이 금감위에 상정되기 전에 반드시 통과해야 하는 제재심의위원회에서 교수, 변호사 등으로 구성된 민간위원들은 스톡옵션 행사에 대한 감사원의 지적은 ‘경영실적을 크게 개선시킨 최고경영자에게 회사의 손실을 감수하고 막대한 금전적 이익을 보상한다는 기본 정신을 이해하지 못한 소치’일 뿐이라며 금감원의 중징계 방침에 반대하고 나선 것으로 전해진다.
▲ 43일이나 병원에 입원했다 출근한 지난 6월 17일 밝게 웃고 있는 김정태 국민은행장 | ||
그러나 스톡옵션 행사를 이유로 한 징계는 불합리하다는 민간 출신 제재심의 위원들의 주장과 언론의 비난여론에도 불구, 신용카드 부실을 초래했다는 이유를 들어 금감위가 경미하나마 징계를 강행한 것은 고질적인 ‘윗사람 눈치보기’가 원인이었다는 해석. 이와 관련, ‘김 행장의 스톡옵션 행사에 대한 모럴해저드 시비는 겉으로 보이는 명분일 뿐이며 오히려 국내 최대 은행의 행장으로서 제 역할을 못하고 있다는 청와대의 시각이 문제’라고 밝힌 금감위 고위 관계자의 코멘트는 많은 것을 시사하고 있다.
이를 알아보기 위해서는 지난 2000년으로 돌아갈 필요가 있다. 당시 청와대는 국제시장에서 경쟁할 수 있는 초대형 은행의 필요성을 절감하고 당시 국내 최대 은행이던 국민은행과 2위인 주택은행의 합병을 강행했다. 이로 인해 발생한 금융권 초유의 은행 총파업도 공권력을 투입해 진압해가며 마침내 통합 국민은행을 출범시켰다.
뒤이어 국내에 은행이 설립된 이후 처음으로 탄생한 자산 2백조원의 거대 은행의 행장직을 두고 금감원 부원장 출신의 김상훈 국민은행장(현 국민은행 회장)과 동원증권 사장에서 주택은행장으로 발탁돼 국내에 처음으로 ‘CEO주가’라는 신조어를 등장시키며 성가를 올리던 김정태 주택은행장이 정면으로 충돌했다. 결국 당시 김대중 정부의 적극적인 지원을 받던 김정태 은행장이 3년 임기의 행장직을 거머쥐었다.
당시만 해도 월드컵 공식후원은행 지정부터 대박열풍으로 사회적 문제로까지 대두됐던 로또복권 주간은행 선정 등 광주 출신인 그를 지지하는 정부 실세들의 지원 아래 김 행장은 승승장구를 거듭했다. 그러나 지난해 대선을 전후해 견고해 보이기만 하던 김 행장의 아성에도 균열이 나타나기 시작했다. 사실 여부는 확인할 방법이 없으나 전해지는 바로는 당시 이회창 대통령후보에게 여론조사 지지율이 밀리던 노무현 후보측에서 김 행장에게 지원을 요청했으나 통합은행장에 선임된 이후 정치권과 거리를 두기 시작한 김 행장이 이를 거절하면서 틈이 벌어졌다는 것.
이와 관련, 한 금융계 고위 관계자는 “여론조사에서 밀리던 노무현 후보측에서 경제계 인사로는 드물게 인지도가 높은 김 행장에게 지원요청을 했으나 김 행장이 이를 거절했던 것으로 알고 있다”며 “이 때문에 오히려 노 후보측에서는 김 행장이 이회창 후보측을 지원하고 있다고 오해한 것으로 전해 들었다”고 털어놓았다. 이처럼 은행장의 생사여탈권을 쥔 정부와 틈이 벌어지기 시작했던 김 행장에 대한 정부의 곱지 않은 시선이 두드러지기 시작한 것은 인수위 시절부터인 것으로 알려져 있다.
당시 금감원은 물론 인수위에는 국민-주택 합병과정에서 불만을 품은 국민은행 안팎의 인물들로부터 김 행장과 주변인사들의 비위사실을 고발하는 투서가 산더미처럼 날아들었다. 여기에 그간 ‘올 수’를 기록한 우등생이었던 김 행장의 경영성적이 실적부진으로 추락하면서 그의 위상은 바람 앞의 등불이 됐다. 그러나 일단 그의 스톡옵션에 대한 금융당국의 조치가 미미하게 나오면서 내년 2월 정기주총까지 자리는 지킬 수 있게 됐다. 김정민 한국금융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