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각종 구설수에도 자신의 억울함을 토로했던 홍 업씨의 주장은 결국 모두 ‘거짓’이 되고 말았다. 지난해 6월21일 구속되는 홍업씨. | ||
김 대통령의 세 아들 중 홍업씨는 가장 ‘유력한’ 권력형 비리의 연결고리로 여겨졌다. 장남인 김홍일 의원은 지병으로 인해 곁에서 들어도 말을 이해하지 못할 정도로 대화 장애가 심각했다. 막내인 홍걸씨는 미국 체류중이었다. 김 대통령의 외곽조직인 아태재단을 맡고 있던 홍업씨야말로 권력을 등에 업고 이권을 챙기려는 검은 세력의 좋은 먹이감이었다.
‘경계경보’가 없었던 것도 아니다. 수 차례 긴급상황을 암시하는 기이한 사건들이 터지고 소문이 꼬리를 물었으나 철저하게 무시됐다. 일부 언론이 홍업씨를 ‘제2의 김현철’로 비유하면 오히려 ‘소수정권의 비애’를 토로했다.
98년 상반기 청와대 박주선 법무비서관과 홍업씨 사이의 비화는 맨 처음 울렸던 경계경보였다. 박 비서관은 당시 모종의 비리혐의를 받고 있던 홍업씨를 불러서 조사했다.
권력의 위세가 하늘을 찌르던 시기였지만 박 비서관은 개의치 않았다. 초면인 홍업씨를 앞에 놓고 각종 혐의를 까다롭게 캐물었다. 항간의 루머들까지도 일일이 확인했다.
박 비서관은 홍업씨에게 김영삼 전 대통령의 차남 현철씨의 사례도 거론하면서 충고했다. 그 과정에서 “당신이 그러면 아버지에게 누를 끼치는 것이야”라는 식의 반말투까지 했다는 후문이다. 홍업씨는 겸손하게 반응하면서도 거꾸로 억울함을 호소했다.
수시간 동안의 조사를 끝낸 뒤 박 비서관과 홍업씨는 친구로 지내기로 했다. 두 사람 모두 49년생 동갑이었기 때문이었다. 서로 반말을 쓰기로 할 정도였다. ‘친구사이’는 낯을 가리고 소심한 스타일인 홍업씨에게 호탕한 성격의 박 비서관이 먼저 제안했다고 한다.
박 비서관이 홍업씨를 죄인 다루듯이 조사한 배경에 대한 해석은 제각각이다. 정권을 걱정하는 ‘엘리트 검사’였기 때문에 가능했다는 얘기도 있었다. 사시 16회 출신인 그는 검찰 동기 중에서 자타가 공인하는 선두 주자였다.
전남 보성 출신이지만 역대 영남정권 아래서도 대검 중부수 1, 2, 3과장을 거쳐 서울지검 특수부 1, 2부장 등 요직을 거쳤다. 청와대 비서실도 본인은 원치 않았지만 호남지역 선배인 김태정 검찰총장이 강력하게 요구해서 수락했던 것으로 알려졌다.
반면 정권 초기에 박 비서관이 대통령의 차남을 불러서 조사한 것은 김 대통령의 재가 또는 지시 없이는 불가능했을 것이라는 주장도 만만치 않다.
어쨌든 첫 경계경보는 나름대로 심각하게 받아들여졌던 것 같지만 결과적으로는 잘못 처리됐다. 98년 7월 홍업씨는 이미 현대그룹으로부터 헌 수표로 10억원을 받았던 것으로 드러났기 때문이다.
홍업씨 본인이 겪었던 징후는 더 심각했다. 홍업씨 고교 동창생 중 경남지역에서 근무하던 경감이 있었다. 그 친구가 애절하게 인사청탁을 해왔다. 처음에는 뿌리쳤으나 너무 간곡하게 매달려서 결국 홍업씨는 김세옥 당시 경찰청장에게 사람을 보내 ‘선처’를 부탁했다.
김 청장의 반응은 뜻밖이었다. 홍업씨의 대리인이 말을 꺼내기가 무섭게 “또 그런 부탁을 하느냐. 이러면 안 된다. 그렇게 처신하다가는 제2의 김현철이 될 수 있다”고 큰 소리를 쳤다.
대리인은 그 위세에 눌려 변명도 못한 채 돌아와 홍업씨에게 사정을 전했다. 홍업씨는 즉각 김 청장에게 전화를 걸어 경위를 따졌다. 그동안 수 차례나 온갖 신분의 사람들이 찾아와 ‘홍업씨 부탁’임을 강조하면서 청탁을 해서 할 수 없이 들어줬다는 게 당시 김 청장의 설명이었다. 물론 홍업씨는 김 청장에게 그런 부탁을 한 적이 없었다.
홍업씨가 속아넘어가는 해프닝도 벌어졌다. 정권 출범 초기 신주류의 좌장으로 부상했던 김중권 청와대 비서실장은 민주당 주변 인사로부터 “홍업씨가 만나고 싶어한다”는 전갈을 받고 약속장소에 나갔다. 홍업씨를 만났으나 김 실장은 어리둥절해졌다.
별다른 안건이 없었기 때문이다. 홍업씨도 묘한 표정을 지었다. 알맹이 없이 의례적 대화만 나누고 헤어진 두 ‘실세’는 나중에 쓴웃음을 지었다.
알고 보니 홍업씨도 “김 실장이 보자고 한다”는 말을 듣고 나온 형편이었다. 중간에 연결했던 사람이 자신이 홍업씨와 친한 사이라고 과시하기 위해 허풍을 떠는 과정에서 만남까지 주선하게 됐던 것으로 드러났다.
동교동계 핵심부에서 홍업씨 문제가 거론되기도 했다. 한 동교동계 실세가 아태재단의 행정실장 K씨를 유상부 포철 회장에게 보낸 적이 있다. 목적은 물론 인사청탁이었다.
그러나 유 회장은 아태재단이 찍힌 명함을 보자마자 격렬한 반응을 보였다. “부탁이 너무 많다. 지금까지 해준 것도 적지 않다. 그런 식으로 처신하면 홍업씨는 현철이 꼴이 될 것 아니냐”는 식으로 홍업씨를 맹비난했다.
동교동계 실세의 부탁을 전달하기 위해 찾아갔던 아태재단 K씨는 “사실은 딴 사람 부탁으로 찾아왔다”는 해명조차 하지 못했다. 대신 홍업씨를 비난하는 유 회장에 맞서서 화를 내며 “홍업씨가 무슨 부탁을 했다고 없는 말을 만드느냐”고 큰소리를 쳤다.
▲ 김대중 대통령도 초반에는 홍업씨(맨 왼쪽)에게 강하게 경고했지만, 나중에는 얘기만 꺼내도 역정을 냈다고 한다. | ||
홍업씨측은 당시 “우리도 유 회장이 터무니없는 얘기를 하고 돌아다닌다는 얘기를 들었다. 하지만 사실이 아니다. 엉뚱한 사람들이 홍업씨를 팔아먹고 다니는 것이다. 유 회장측에 해명하는 방안도 생각해봤지만 홍업씨가 속만 태우고 있다. 유 회장의 ‘폭언’이 정도에 지나쳤기 때문이다”라고 주장했다.
그러나 동교동계 일각에서는 “홍업씨가 문제”라는 걱정 어린 수군거림이 잦아졌다. 비슷한 시기에 홍업씨가 인사민원을 하면서 형인 김홍일 의원과 다퉜다는 소문도 들렸다.
97년 대선 때 홍업씨 팀원으로 선거를 도왔던 몇 사람의 취직을 부탁했으나 김 의원이 야단을 쳤다는 얘기다. 이에 평소 형을 깍듯이 모셨던 홍업씨가 목소리를 높이며 대들었다는 것이다. 이 사건을 계기로 홍일-홍업 형제간의 불화가 싹텄다는 분석도 있다.
홍업씨가 95년 설립, 96년 총선과 97년 대선에서 활용했던 홍보기획사 ‘밝은세상’을 둘러싼 구설수도 집권 첫해인 98년에 무성하게 퍼졌다.
김 대통령은 당시 매주 일요일 아들 가족들을 불러 점심식사를 했고 그 자리에서 홍업씨가 다양한 청탁을 관철시켰을 것이라는 게 그 골자였다.
실제로 청와대 국정원 언론사 등 각종 기관에 ‘밝은세상’ ‘아태재단’ 출신 인사들이 취업해 활약했던 사실이 확인되기도 했다. 2002년 군 장성 인사에 개입해 돈을 받은 혐의로 구속된 임정엽 청와대 행정비서관은 아태재단과 밝은세상에 모두 근무했던 인물이었다. 그는 홍업씨의 이름을 팔면서 ‘장사’를 했던 것으로 확인됐다.
재벌 관계자들의 홍업씨 접촉설도 무성했다. 그때만 해도 홍업씨측은 강력 부인했으나 2002년 7월 검찰수사 발표에 따르면 홍업씨는 98년부터 2000년 1월까지 현대 삼성 등 재벌기업으로부터 활동비 명목으로 22억원, 기업체 청탁 대가로 25억여원 등 총 47억여원을 받은 것으로 드러났다. 소문이 진실이었던 셈이다.
홍업씨측은 당시에 “이런저런 구설수로 인해 홍업씨가 괴로워하고 있다. 본인은 차라리 해외로 이민을 가고 싶다는 말을 입에 달고 산다”고 강조했다. 하지만 이 같은 해명은 완전한 ‘거짓말’이었던 것이다.
99년과 2000년 동안 홍업씨가 ‘강남의 황태자’라는 풍설이 파다하게 퍼졌다. 나중에 구속된 김성환씨처럼 직업도 일정치 않은 친구들 서너 명과 어울려서 고급 룸살롱을 제집 드나들 듯이 매일 출입한다는 내용이었다. 술집 전체를 빌려서 친구들과 폭탄주를 20~30잔씩 마시고 만취하는 경우도 적지 않았다는 얘기였다.
야당 시절부터 민주당을 출입했던 일부 기자들이 “홍업씨의 술자리에 초대받아 갔었는데 엄청나게 고급 룸살롱이더라. 아가씨들도 한결같이 미인이었다”는 식으로 자랑하는 모습도 목격됐다.
국정원 고위인사가 홍업씨에게 불리한 내부 정보보고를 사전에 알려줘서 적절하게 대처하도록 도와준다는 루머도 끊이지 않았다. 국정원 내부에 홍업씨 라인이니 권노갑 라인이니 하는 얘기도 적지 않았다.
이 같은 소문들은 확인하기 힘든 것들이지만 신건, 임동원 전 국정원장들이 홍업씨에게 3천5백만원의 용돈을 줬던 사실이 검찰수사를 통해 밝혀지기도 했다.
홍업씨의 강남 역삼동의 개인 사무실도 역시 문제였다. 98년 중순께 일부 언론에 의해 개인 사무실의 존재가 보도되면서 ‘비리의 온상’이 될 것이라는 의혹이 제기된 바 있었다.
이와 관련 홍업씨측은 “아태재단 사무실에는 민원인들이 너무 많이 찾아와서 개인적 공간을 마련한 것일 뿐이다. 의혹의 눈초리로 보지 말라”고 요구했다. 그러나 결국 강남 사무실은 홍업씨가 친구들과 어울려 다니면서 폭탄주를 마시고 업자들의 돈을 받는 근거지로 사용됐음이 확인됐다.
김 대통령이 마냥 방관만 했던 것은 아니다. 정권 초반기에 홍업씨의 구설수에 대해 경고했던 것으로 전해지고 있다.
김 대통령은 98년 11월 아태재단 초청 청와대 만찬에서 “아태재단이 정권의 부담이 돼서는 안된다. 대통령의 아들이 문제다”라는 취지의 발언을 했다.
아태재단과 대통령 아들의 공통분모는 바로 홍업씨다. 그를 겨냥한 주의 조치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더욱이 김 대통령 발언은 오기평 아태재단 사무총장이 ‘아들들의 근신조치를 완화해달라’는 건의를 한 데 대한 반응이었다.
그러나 집권 중반기로 넘어가면서 김 대통령의 태도는 변해갔다. ‘아들 문제’를 건드리면 역정을 내는 분위기로 변모해갔다는 것이다. 여권의 한 인사가 청와대에 들어가서 홍업씨와 홍걸씨 문제를 거론했다가 ‘면박’만 당하는 사건도 벌어졌다. 이희호 여사는 그 인사가 물러날 때 인사도 제대로 하지 않을 정도로 냉랭한 반응을 보였다는 후문이다.
홍업씨는 삼형제 중 김 대통령이 가장 믿었던 아들이라고 한다. 남 앞에 잘 나서지 않아 “낯을 가린다”는 평판을 들을 정도로 신중한 성격이었다. 김 대통령으로서는 믿었던 아들로부터 배신을 당한 셈이었다. 홍업씨 비리사건이 정신 없이 터져 나오던 2002년 민주당의 동교동계 의원은 이렇게 말했다.
“DJ는 YS의 전철을 밟지 않기 위해 노심초사해왔다. 특히 홍업씨가 현철이처럼 사고를 치지 않도록 철저하게 근신을 시켰다. 그러나 권력 주변의 인사들은 오히려 홍업씨를 활용하려 했다. 홍업씨나 주변 인물의 부탁을 들어주고 홍업씨를 통해 DJ에게 영향력을 행사하려 했다. DJ는 음모가 판을 치고 검은 돈이 난무하는 정치판이지만 홍업씨 같이 신중한 성격은 문제가 없을 것으로 기대했었다.”
대통령 아들을 둘러싼 비리 구조를 사전에 파악, ‘경계경보’를 제대로 울려줘야 할 권력내부 인사들이 대통령 아들과 함께 ‘장사’를 해먹었다는 자조였다.
홍업씨의 사례는 노무현 정권에게도 반면교사가 돼야 한다는 지적이 높다. 노 대통령의 경우 아들을 둘러싼 풍설은 없지만 소위 핵심측근 인사들은 비슷한 소문에 시달리고 있다.
한 측근의 경우 빈번한 강남 룸살롱 출입설, 인사 전횡설 등의 타깃이 되고 있다. 그러한 소문이 설령 거짓으로 확인된다 해도 경계경보로서의 의미를 절대로 간과해서는 안된다는 게 정치권의 일반적 견해다.
민주당의 한 인사는 “노 대통령은 정에 약하다. 그래서 인사청탁을 하는 사람은 손해를 보게 하겠다고 공언해놓고 정실인사를 하는 측면도 있다”고 꼬집기도 했다.
이진설 언론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