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행병은 통제 못해도…’ 위생·청결 통제력 유지 수단…장기간 보관해도 언젠간 사용한다는 점도 영향
코로나19 바이러스 확산으로 전세계가 패닉에 빠진 가운데 몇몇 나라를 중심으로 기이한 현상이 벌어지고 있다. 다름 아닌 두루마리 휴지 사재기 열풍이다. 너나할 것 없이 마트로 달려가 닥치는 대로 두루마리 휴지를 쓸어담는 진풍경을 보면 과연 그 이유가 뭘까 궁금할 수밖에 없다. 통조림이나 생수와 같은 비상식품은 그렇다 쳐도 코로나19와 휴지는 대체 무슨 상관인 걸까. 전문가들은 심리적 배경과 경제적인 이유를 들면서 사람들이 왜 비상상황에서 두루마리 휴지에 집착하는지에 대해 설명했다.
코로나19 확산에 따라 세계 곳곳에서 두루마리 휴지 사재기 현상이 벌어지고 있다. 미국 워싱턴 주 타코마의 대형마트에서 시민들이 매장에 갓 도착한 휴지를 구매하는 모습. 사진=AP/연합뉴스
코로나19가 미국에서 급속도로 확산되기 시작했던 초반, 대형마트 코스트코는 불안감과 공포를 느낀 사람들의 행렬로 매일 인산인해를 이뤘다. 거의 모든 생필품들을 싹쓸이했지만 이 가운데 가장 눈에 띄는 제품은 두루마리 휴지였다. 문을 연 지 얼마 지나지 않아 휴지가 진열되어 있던 선반은 텅 비기 일쑤였고, 그나마 남은 하나를 사기 위해 실랑이가 벌어지는 일도 비일비재했다.
이는 미국에서만 발생하고 있는 현상은 아니다. 코로나19 공포가 덮친 호주, 일본, 뉴질랜드, 홍콩 등에서도 비슷한 일이 벌어졌다. 홍콩에서는 강도들이 휴지를 확보하기 위해 슈퍼마켓을 털었는가 하면, 호주에서는 지역 마트마다 휴지 품귀 현상이 빚어졌다. 멜버른에 있는 한 대형마트에서는 두 여성이 마지막 남은 휴지를 사기 위해서 다투는 모습이 언론에 보도됐다. 이미 다섯 묶음을 쇼핑카트에 담은 여성이 남은 하나마저 사가려고 하자 다른 여성과 싸움이 붙은 것이다.
그 누구도 휴지 부족을 말한 적이 없고, 정부나 언론에서도 이와 관련해 언급한 적이 없어 이런 현상은 더욱 기이할 수밖에 없다. 마스크나 손세정제라면 모를까 생산량도 충분한 데다 바이러스 예방과도 별 상관이 없어 보이는 휴지를 사재기한다니 말이다.
이는 무엇보다 코로나19 영향으로 중국에서 들어오는 휴지 공급에 차질이 생길 수 있다는 가짜 뉴스가 시민들의 소비심리에 영향을 미친 것으로 보인다. 이에 대해 미국의 전문가들은 “전혀 사실이 아니다”라고 지적했다.
미국인들이 사용하는 휴지의 양은 1년에 평균 약 100롤 정도. 만약 휴지 대부분이 중국에서 수입된다면 이는 큰 문제가 될 수 있다. 코로나19 여파 때문에 중국 내 공급망이 붕괴될 위험이 다분히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데일리비스트’는 미국의 휴지 수입량은 극히 미미한 수준이기 때문에 걱정할 필요가 전혀 없다고 보도했다. 2017년의 경우 수입량은 전체 공급량의 10% 미만이었으며, 그마저도 대부분은 캐나다와 멕시코에서 수입하고 있다.
무엇보다 미국은 휴지를 직접 생산하는 ‘휴지 대국’이다. 1800년대 후반부터 이미 대량 생산해 왔으며, 신발 제조업과 같은 다른 산업은 해외로 공장을 이전했지만 휴지 제조업은 여전히 미국에서 성업 중이다. 오늘날 약 150개의 미국 회사들이 휴지를 제조하고 있기 때문에 공급 부족은 전혀 걱정할 문제가 아니다.
그럼 미국인들은 왜 공급이 풍부한 데도 사재기를 할까. 멜버른대학에서 ‘재난위험저감을 위한 지역사회 프로젝트’를 담당하고 있는 브라이언 쿡은 이렇게 설명했다. “휴지를 사재기하는 행동은 비교적 비용이 적게 드는 행동이다. 사람들은 위험에 처했을 때 자신이 ‘뭔가를 하고 있다’고 생각하고 싶어 한다.” 다시 말해 자신이 이 상황을 통제하고 있다는 느낌을 갖고 싶어 한다. 이는 ‘제로 리스크 편향’의 한 예다. 사람들은 아무리 비생산적이라고 해도 확실성을 선호하는 경향이 있다.
또한 쿡은 “이는 사람들이 스트레스에 어떻게 반응하는가와도 관련이 있다”고 설명하면서 “많은 서양인들에게는 휴지 없이 청소하는 것을 ‘역겹다’라고 생각하는 심리적인 장벽이 있다”고 덧붙였다.
실용적인 이유도 있다. 두루마리 휴지는 공간을 많이 차지하는 상품이다. 따라서 정상적인 상황에서는 집에 휴지를 많이 비축해두는 경우는 드물다. 그런데 독감이나 독감 비슷한 질병에 걸렸을 때는 휴지가 더 많이 필요해진다고 생각하고 갑자기 대량으로 사들이게 되는 것이다.
세계 곳곳에서 휴지 사재기가 벌어지는 이유로 통제할 수 없는 유행병과 달리 화장지를 비축해 두는 행동은 스스로 통제할 수 있기 때문이라는 분석도 나오고 있다. 영국 런던 테스코 슈퍼마켓의 휴지 매대가 텅 비어 있다. 사진=신화/연합뉴스
퀸즐랜드공과대학교 공중보건 및 사회복지 전문학교의 니키 에드워즈는 휴지가 ‘통제’를 상징하기 때문이라고 설명했다. 그는 “사람들은 무언가를 깔끔하게 정리하거나 청소할 때 휴지를 사용한다. 혹은 대변이나 소변을 볼 때도 사용한다”고 말하면서 대다수의 사람이 코로나19에 대한 소식을 듣고는 혹시 이런 통제력을 잃지는 않을까 두려워하게 됐다고 설명했다. 요컨대 이런 경우 휴지를 위생과 청결에 대한 통제력을 유지할 수 있는 유일한 수단으로 여기고 있다는 것이다.
그런가 하면 뉴캐슬대학교 경영대학원의 데이비드 세비지 교수는 “사람들은 두루마리 휴지야말로 완벽한 상품이라고 생각한다”고 말했다. 휴지는 절대 상하지 않기 때문에 오래도록 안전하게 비축할 수 있는 몇 안되는 상품 가운데 하나다. 아무리 오랫동안 보관해도 언젠가는 결국 사용하게 된다는 심리적 안정감이 작용한다는 의미다.
센트럴퀸즐랜드대학 보건의료응용과학 교수인 알렉 러셀은 시각적인 효과 때문에 휴지 품귀 현상이 더 두드러지는 경향이 있다고 지적했다. 분명 손세정제나 마스크, 통조림도 품절이긴 마찬가지인데 유독 휴지 품절이 도드라지는 이유는 바로 큰 부피 때문이다.
그는 “두루마리 휴지는 선반에서 공간을 많이 차지한다. 때문에 다른 상품들보다 더 눈에 잘 띈다. 마트에서 손세정제와 같은 작은 크기의 상품이 매진될 경우에는 선반이 비어도 별로 티가 나지 않는다. 빈 공간은 옆에 있는 다른 물건들로 채워지기도 한다. 하지만 휴지가 품절될 경우에는 사정이 달라진다. 근처에 있는 다른 물건들로 채울 수 없을 만큼 넓은 공간이 텅 비어 버리기 때문이다”라고 말했다.
또 다른 이유로 마땅한 대체품이 없기 때문이라고 러셀 교수는 설명했다. 만약 마트에서 찾던 식재료가 없을 경우에는 다른 식재료를 구매하거나 또는 완전히 다른 먹거리를 구매하면 그만이다. 하지만 휴지가 없다면 꽤 불편할 수밖에 없다. 물론 미용 티슈나 종이 타올도 있긴 하지만 분명 용도는 다르기 때문이다.
‘데일리비스트’의 한 경제 칼럼니스트는 “이런 현상은 전세계가 거의 또는 전혀 통제할 수 없는 새로운 유행병에 직면했을 때와 같은 불안한 상황과 특히 관련이 있다. 통제할 수 없는 유행병과 달리 화장지를 충분히 비축해 두는 행동은 스스로 통제할 수 있기 때문”이라고 설명했다.
이 밖에도 그는 인간이 생물학적으로 사재기를 하도록 프로그램되어 있을 수 있다는 가능성을 제시했다. 가령 식량을 비축하는 습성이 있는 새나 다람쥐를 비롯한 몇몇 동물들처럼 말이다. 유전자 속에 새겨져 있는 오래된 습성이 위기가 닥치면 나도 모르게 불쑥 발현되는 것일지도 모른다는 것이다.
김민주 해외정보작가 world@ilyo.co.kr
토크쇼 조크가 폭발시킨 1973년 미국 휴지 사재기 소동 미국에서 휴지 사재기 열풍이 분 것은 이번이 처음이 아니다. 1973년에도 비슷한 소동이 벌어져 쓴웃음을 자아내게 했다. 당시 미국인들 사이에서 한달여간 불어닥친 휴지 사재기 광풍은 어처구니없게도 토크쇼 진행자가 농담조로 내뱉은 말 한마디 때문이었다. 난데없이 벌어진 휴지 품귀 현상의 전말은 이랬다. 1973년의 휴지 사재기 소동은 자니 카슨의 조크에서 비롯됐다. 1973년은 미국인들에게는 여러모로 궁핍한 해였다. 연초부터 폭락을 거듭한 주식시장에서는 시가총액의 45%가량이 순식간에 증발해버렸고, 같은 해 10월에는 아랍 국가들의 석유수출금지 조치로 인해 휘발유 가격이 배럴당 3달러에서 약 12달러까지 치솟으면서 경제 전반에 걸쳐 위기가 도래했다. 서서히 미국 사회에서는 대공황 이후 다시 경기 침체가 시작될지 모른다는 공포와 불안감이 팽배해갔다. 이에 휘발유, 전기, 양파 등과 같은 생필품 공급이 제한될지도 모른다는 소식이 대대적으로 보도됐고, 미국인들 사이에서는 혹시 발생할지 모르는 생필품 부족 사태에 대비해야 할지 모른다는 혼란이 시작됐다. 명확한 근거 없이 소문으로만 떠돌던 공포에 불을 붙인 것은 두루마리 휴지를 둘러싼 거짓 정보들이었다. 1973년 11월, 몇몇 방송국에서 일본에서 휴지 부족 현상이 벌어지고 있다는 소식을 전했다. 하지만 그때만 해도 이 뉴스를 귀담아 듣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단 한 명을 제외하고 말이다. 바로 당시 위스콘신주의 공화당 하원의원이었던 해럴드 V 프롤리히였다. 전통적인 산림 지대인 위스콘신주 의원이었던 프롤리히는 지역 유권자들로부터 근래 들어 펄프 용지의 공급이 줄어들었다는 불평을 듣고 있었다. 연방정부의 가격 통제를 피하기 위해 펄프 수출량을 늘린 제지 회사들 때문에 국내 공급량이 부족하다는 것이 이유였다. 이에 프롤리히 의원은 언론 보도를 통해 “정부 인쇄국이 심각한 종이 부족에 직면해 있다”는 내용의 성명을 발표했다. 하지만 당시 그의 성명에 귀를 기울이는 사람은 없었다. 그리고 얼마 후 프롤리히 의원은 연방정부의 국립구매센터가 정부 관료들과 군인들에게 제공하는 4개월 치 분량인 18만 2050상자의 휴지를 입찰하는 경쟁에 평소보다 업체들이 50% 적게 참여했다는 문서를 발견했다. 사정이 이렇게 되자 프롤리히 의원은 보다 더 심각한 보도자료를 발표했다. 내용인즉슨 이랬다. “어쩌면 미국은 몇 달 안에 휴지가 심각하게 부족해질지도 모른다. 우리는 정부가 휴지를 배급하는 사태에 이르지 않기를 바란다. 화장지 부족은 웃을 일이 아니다. 이는 잠재적으로 모든 미국인을 궁지에 몰아넣을 수 있는 문제다.” 프롤리히의 이런 주장은 생필품 부족, 석유 공포, 경제적 압박의 분위기 속에서 삽시간에 퍼져 나갔고, TV 방송국, 라디오, 그리고 외신기자들도 모두 이 이야기를 앞다퉈 자극적으로 보도하기 시작했다. ‘어쩌면’과 ‘잠재적으로’와 같은 표현은 사라졌고, 휴지 부족은 마치 진실인 양 호도되었다. 이렇게 암암리에 공포심이 퍼지고 있는 가운데 화룡점정을 한 사건이 발생했다. 인기 심야 토크쇼 프로그램 진행자인 자니 카슨이 자신의 토크쇼 오프닝에서 인용한 휴지 부족과 관련된 조크가 그만 공포심에 불을 댕기고 말았던 것이다. 그는 전국의 2000만 시청자들에게 이렇게 말했다. “요즘 모든 게 부족하죠. 그런데 최근 소식 들으셨어요? 농담하는 게 아니에요. 제가 신문에서 읽었어요. 글쎄, 두루마리 휴지가 부족하다지 뭐예요?” 이는 분명 조크였지만 파장은 어마어마했다. 다음날 수백만 명의 미국인들이 마트로 달려가 휴지를 사재기하는 광풍이 시작됐다. 마트를 찾은 한 시민은 “뉴스에서 소식을 듣고 화장지 열다섯 묶음을 추가로 샀다”고 말했는가 하면, 또 어떤 시민은 “곧 베이비 샤워를 하는데 손님들에게 휴지를 선물해달라고 부탁했다”고도 말했다. 갑자기 시작된 대혼란 속에서 휴지 제조업체 간부들과 관계자들은 대중들에게 침착하라고 당부했다. 하지만 아무 소용이 없었다. 슈퍼마켓 주인들은 천문학적인 양의 화장지를 주문해야 했고, 고객 한 명당 두 개로 구매 제한을 두는 등 조치를 취했다. 규정을 따르는 사람은 없었다. 어떤 슈퍼마켓에서는 휴지 가격을 개당 39센트에서 69센트로 올렸지만 그럼에도 사람들은 여전히 매일 휴지를 싹쓸이해갔다. 심지어 물물교환 용도로 거래되기도 했으며, 암시장에서 웃돈을 얹어 거래되는 일도 속출했다. 이 기이한 휴지 소동은 4개월간 계속됐다. 서서히 흥분이 가라앉자 그제야 미국인들은 애초에 휴지 부족 같은 사태가 발생할 가능성은 없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급기야 화살은 거짓 정보를 퍼뜨렸다는 이유로 카슨에게로 돌아갔고, 카슨은 토크쇼에서 진지하게 사과문을 발표해야 했다. 그는 카메라를 정면으로 응시한 채 웃음기 없이 이렇게 말했다. “저는 거짓 화장지 공포를 조장한 사람으로 기억되고 싶지 않습니다.” 김민주 해외정보작가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