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전경련 회장 선임을 둘러싸고 회장직을맡지 않으려는 재벌들의 신경전이 치열하다. 사진은 지난 여름 노무현 대통령의 재계 인사 초청 오찬에 함께한 재벌 총수들. 왼쪽부터 손길승 전 전경련 회장,이건희 삼성 회장, 노무현 대통령,구본무 LG회장,정몽구현대차 회장. | ||
요즘 재계에 나도는 우스갯소리다. 한때 전경련 회장직은 재계의 총수라고 부를 만큼 영광스런 명예직이었다. 그러나 요즘에는 사정이 완전히 달라졌다. 전경련 회장직은 재벌총수라면 누구나 맡기를 싫어하는 자리가 되었다. SK그룹 비자금 문제와 관련해 손길승 회장이 최근 전경련 회장에서 전격 물러나면서, 후임자를 택하지 못하고 있다. 재벌총수들은 한결같이 전경련 회장을 맡길 꺼리고 있다.
이렇게 되자 전경련은 ‘회장 유고 시 최연장자가 직무를 대행한다’는 정관 규정에 따라 ‘현역 최고 연장자’인 강신호 동아제약 회장을 차기 회장으로 추대했지만, 강 회장마저 ‘불가’의사를 분명히 밝혀 당분간 무주공산 상황이 계속될 것으로 전망된다.
이 같은 상황 속에 최근 재계 내부에서는 전경련 회장직을 두고 각 그룹간에 ‘미묘한 신경전’이 형성되고 있어 주목된다. 전경련이 회장단 소속 재벌총수들에게 회장직을 맡아 달라고 ‘SOS’를 보내자 해당 그룹에서는 “S그룹 사정이 더 낫다” “L그룹 총수가 (전경련 회장직을) 원한다더라”는 등 핑퐁식 추천을 하는 상황이 발생하고 있는 것이다. 이런 핑퐁식 추천이 지속되면서 일부 재벌들은 노골적으로 상대방을 비방하는 모습까지 보이고 있다.
대표적인 케이스가 지난 10월 말 벌어진 삼성그룹과 LG그룹의 신경전. 당시 검찰 수사로 손 회장의 입지가 좁아지자 현명관 전경련 부회장은 “손 회장의 뒤를 이을 차기 회장은 반드시 대그룹에서 나와야 한다”는 발언을 했다.
현 부회장의 말은 SK 사태가 악화되는 등 재계가 혼란스러운 상황에서 재계의 중심축을 하루빨리 안정시키기 위해서는 전경련 회장은 ‘실세 회장’을 뽑아야 한다는 점을 강조한 것이었다.
대그룹이 어디인지에 대한 논란은 있을 수 있지만, 재계 ‘빅3’ 그룹인 삼성, LG, 현대차그룹을 염두에 둔 것으로 해석된다.
특히 이건희 회장의 경우 최근 몇 차례 전경련의 공식 행사에 모습을 보여 전경련 관계자들로 하여금 ‘이번에는 혹시’라는 기대를 갖게 만들었기도 했다. 그러나 전경련의 기대를 받았던 ‘빅3’ 그룹은 이 소식이 전해진 직후 “우리는 안된다”며 손사래를 쳤다.
삼성은 “여러모로 보건대 현재 이건희 회장이 전경련 회장을 맡기는 어렵지 않겠느냐”며 전경련의 제안을 일축했고, LG 역시 “최근 몇 년간 전경련 회의에 참석조차 안할 정도인데, 새삼스럽게 무슨 회장이냐”며 불쾌한 반응을 보였다.
현대차도 마찬가지. 현대차는 “과거에도 그랬지만, 그룹 내부 경영을 챙기기에도 빠듯한 상황이라서 전경련 회장직을 맡을 여력이 없다”며 거부했다.
‘빅3’ 그룹이 모두 고사의 뜻을 밝히는 데까지에는 별 문제는 없었다. 그러나 언제부터인가 이들 중에서 구본무 회장이 ‘차기 전경련 회장으로 유력하다’는 얘기가 나오기 시작했다. 이는 몇몇 언론을 통해서 그럴 듯하게 보도됐다. 전경련 관계자들에 따르면 이 얘기의 핵심은 ‘빅3’ 회장 중 구 회장이 현상황에서 전경련 회장을 맡기에 가장 적절하다는 것이었고, 특히 전경련이 강력하게 추대를 하면 결국에는 수락을 하지 않겠느냐는 것이었다.
이 소식을 접한 LG그룹은 황당하다는 표정을 지었다. LG그룹 고위 관계자는 “전혀 사실과 다르다”며 “결과를 지켜보면 분명히 알 수 있지 않겠느냐”며 불편해했다.
실제 구 회장의 경우 지난 10월30일 전경련 회장 추대를 위해 가진 행사에 모습을 드러내지 않았다. 물론 이날 행사에는 이건희 회장, 정몽구 회장의 모습도 찾아볼 수 없었다.
하지만 문제가 된 것은 LG그룹의 본심과 달리 구 회장이 차기 전경련 회장으로 유력하게 관측된 배경이었다. 재계에서는 전경련의 ‘강력한 의지 표명’이 구 회장 추천설의 근거였을 것으로 보고 있다.
실제로 전경련 안팎에서는 최근 전경련 모임에 자주 참석했던 그룹 회장들 중 ‘원로급’이 많다는 점을 감안하면, 이들이 구 회장을 강력히 설득할 경우 전경련 회장직을 맡게 되지 않겠느냐는 얘기가 오갔던 것으로 전해진다. 결국 전경련의 강한 의지가 ‘구 회장의 전경련 회장 만들기’로 전해졌다는 것이다.
그러나 한편에서는 전경련 회장직을 제안받은 다른 그룹들이 ‘계획적으로’ 구 회장의 차기 전경련 회장설을 부추겼다는 얘기도 오가고 있다. 이 같은 얘기는 LG그룹 관계자를 통해 나왔다.
LG그룹 고위 관계자는 한동안 구 회장이 차기 회장감이 아니냐는 질문이 이어지자 “특정 그룹이 우리를 지목하고 있는 것이 아니냐”며 불쾌해했다. 특히 LG그룹이 지목한 ‘특정그룹’의 경우 자사와 거의 전 부분에 걸쳐 경쟁 관계에 있는데다, 지금까지 그다지 좋은 관계를 유지해오지는 않았던 기업이다.
재계 관계자는 “공석이 된 전경련 회장 자리를 두고 각종 배후설, 음해설 등이 떠돌아 다닐 정도로 요즘 재계의 분위기가 살벌해졌다”며 안타까워했다.